〈 61화 〉 동거 (3)
* * *
"체인 라이트닝!"
메림의 입모양이 바뀔 때마다 지팡이 끝에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차츰 뭉쳐진 푸르른 빛 덩어리는 전류가 터질 때 나는 특유의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 무리를 향해 재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침입자를 위협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있던 고블린들이 그것을 피하기는 불가능. 번개에 적중당한 녀석은 전류가 몸속을 헤집는 충격에 온 몸을 바르르르 떨었다.
파지지지직!!
바들거리고 있는 녀석을 중심으로 비산한 번개는 가까이 붙어 있는 고블린들에게도 뻗어 나가 사슬처럼 연결된 채로 놈들을 단체로 지지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전기 통구이가 돼버린 다섯 마리의 고블린은 노릇노릇한 냄새를 풍기면서 땅바닥에 털썩털썩 쓰러졌다.
"윈드 커터!"
불행스럽게도 고블린들에게 쏘아진 마법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머금은 보이지 않는 칼날이 고블린에게 다가오고 있다. 록시아의 작품이다.
샤아악! 목표물로 삼은 고블린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낸 바람의 칼날은 덩달아 옆에 있던 녀석의 팔을 잘라내고 또다시 옆에 있는 다른 놈의 가슴팍을 얇게 베어낸 뒤에야 소멸됐다.
수준 낮은 마물인 고블린들은 마땅히 항마력이 있는 부류도 아니었으니 마법에 속절없이 당해버렸다.
그리하여 불과 몇 초 전까지 스물한 마리였던 고블린 무리는 팔이 날아간 놈을 포함해 순식간에 열다섯 마리로 줄어들었다.
"키릭! 키리리! 키리에엑!!"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유일하게 쇳덩어리를 들고 있는 고블린의 상위 개체. 홉고블린이 녹슨 검을 높이 들면서 후방에 있는 적들을 향해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짤막한 순간에 여섯이나 되는 동족들이 당해버렸지만 놈들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용맹함 보다는 무지함에 가깝다는 게 큰 문제다.
고블린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죽은 놈들이 멍청하고 약하다.
작달막한 덩치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갖추고 있는 고블린들에게 있어 적들과 자신의 전투력의 차이를 판단하는 근거는 오로지 숫자뿐이다.
적은 겨우 넷, 그것에 비해 남은 동족들은 무려 열다섯. 뒤에서 수상한 요술을 부리고 있는 인간 암컷 둘만 처리한다면 인간의 고기를 실컷 맛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암컷의 고기는 야들야들한 맛이 일품이라 없어서 못 먹는다. 고블린들은 벌써부터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키르르, 키라키긱!"
홉고블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자신을 포함한 다섯이서 혼자서 다가오는 암컷을, 나머지 부하들은 후방에 있는 셋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단신으로 용맹하게 뛰어오고 있는 마릴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적들을 이끄는 대장이라고 판단. 마찬가지로 무리의 대장인 자신이 부하들과 함께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네 마리의 부하 고블린이 마릴의 주위를 동그랗게 에워싸고 일제히 덤벼들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는 곤봉과 석창이 그녀의 몸을 노린다.
무기를 휘두르는 힘과 속도는 인간의 그것보다는 현저히 느리다.
로덴에게 꾸준히 훈련을 받았던 마릴은 물 흐르는 듯한 유연한 동작으로 뒤에서 날아온 공격을 효율적으로 회피한 뒤, 발을 내디디며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촤악! 뼈를 써는 느낌과 함께 피가 튀었다.
그녀의 머리를 노리기 위해 점프를 하면서 곤봉을 휘둘렀던 고블린의 머리통이 빙글빙글, 허공에서 피를 흩뿌리며 생의 마지막 비행을 했다. 머리를 잃어버린 고블린의 몸뚱이는 벌레처럼 움찔거리다가 목에서 요란하게 피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아아압!"
뒤이어 정면에서 복부를 노리고 있는 창을 베어낸 마릴은 무기를 잃어버리고 허점투성이가 돼버린 고블린의 정수리를 버클러로 내리찍는다.
퍼억! 버클러의 모양대로 머리가 움푹 들어가 버린 녀석은 양 쪽 눈이 툭 튀어나오고 코피가 줄줄이 뿜어져 나오면서 숨이 끊어졌다.
파죽지세로 다시금 검과 방패를 휘두른 마릴은 조금 전과 비슷한 흐름으로 다른 두 마리의 고블린도 확실하게 처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칼을 들고 있는 홉고블린 밖에 없다.
"키륵! 킥! 키리리키!"
용맹함과는 거리가 먼 홉고블린은 조금 전에 후방으로 보냈던 부하들을 다시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녀석의 시선에 담긴 건 진작에 싸늘한 시체가 돼버린 부하들의 모습과 한가롭게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나머지 세 명의 인간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싸울 것 인가, 도망칠 것 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홉고블린이 선택한 것은 당연히 도주였다.
당연했다. 유일한 이점이었던 숫자의 우위마저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면서 홉 고블린의 전의도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니 말이다.
똑똑하다고 할 수준의 지능은 아니지만 이대로 혼자서라도 싸워봐야 확실히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지혜 정도는 갖추고 있다. 몇 초 정도 나마 목숨을 길게 이어갈 수 있었으니 도주를 택한 홉고블린의 행동은 매우 옳았다.
"어딜도망가!"
제법 빠르게 도망가고 있긴 했지만 도저히 못 쫓아갈 수준의 속도는 아니다. 마릴이 곧바로 홉 고블린을 추적하려고 하니, 어느 틈엔가 바짝 다가온 로덴이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목소리를 냈다.
"수고했어, 마릴. 그만하면 충분해. 녀석은 내가 마무리 지을 테니까 애들이랑 같이 숨좀 돌리고 있어."
"앗… 네."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거린 마릴을 지나치고 쏜살같은 속도로 홉고블린과의 거리를 좁힌 로덴은 쥐고 있던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휘둘렀다.
한참 달려가고 있던 홉고블린의 몸은 달리고 있는 폼을 유지한 상태로 양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세로로 깔끔하게 절단된 녀석의 단면에서 뇌수와 내장, 피가 울컥울컥 터져 나와 수풀을 붉게 물들였다.
이건 고철값도 못 받겠는데….
미세하게 꿈틀 거리고 있는 홉고블린의 시체가 쥐고 있던 녹슨검을 대충 흘겨보던 로덴은 그대로 짓밟아서 말끔히 부러뜨렸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쇳덩어리지만 고블린에게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 놈들이 무기를 회수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미리 처분한 것이다.
로덴은 모험가 시절에 몇 번이나 반복했던 능숙한 동작으로 홉고블린의 오른쪽 귀를 잘라낸 뒤에 일행에게 돌아갔다. 쌍둥이 자매는 주변에 널브러진 고블린들의 시체에서 오른쪽 귀를 잘라내고 있었고 록시아는 천막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결과만을 이야기하자면 돈이 될만한 물건은 딱히 없었다. 놈들의 소지품과 천막 안의 내용물은 쓸모없는 잡동사니와 벌레가 꼬인 고깃덩어리, 먹다 남은 나무 열매가 전부였다.
"으음~ 어차피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이놈들 귀 말고는 달리 챙겨갈 게 없네."
"유적이나 마을 근처에 자리 잡은 고블린들과 달리 숲 속에 있는 고블린은 나무하고 가죽으로 만든 장비만 간신히 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한 마디씩 내뱉은 쌍둥이 자매는 조금 전에 로덴이 녹슨검을 부러뜨린 것과 같은 이유로 고블린의 천막을 남김없이 때려 부수고, 활활 태웠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모든 게 마무리되는 분위기로 전환되려니 옆에서 뒷정리를 도와주고 있던 록시아가 힘찬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수고의 말을 건넸다.
"록시아도 여기까지 따라다니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어. 오늘 마물 토벌은 해볼 만했니?"
"네! 조금 긴장되긴 했는데, 삼촌이 지켜준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부담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록시아는 겉보기에 여려 보이지만 빈민가에서 지낼 때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고, 피난길에 오를 때도 내내 걸어 다녔던 과거가 있었기에 하루 종일 숲 속을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의외로 모험가 체질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맨 처음에 이쪽 세상에 끌려오고 모험가가 됐을 시절에는 이 아이랑 비슷한 나이 때였나? 만약에 그 시절의 나랑 지금의 록시아랑 동등한 관계로 만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있을 수 없는 가정을 짧게나마 상상해본 로덴은 언니와 떠들고 있던 마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알려준 동작들 하나하나를 실전에서도 잘 응용하고 있네.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아하하… 칭찬 고마워요. 이게 다 좋은 스승을 둔 덕분이죠."
아무튼, 할당량도 모두 채웠으니 쌍둥이 자매가 길드에서 받아온 토벌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수됐다. 짤막한 휴식을 취한 로덴 일행은 숲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 * *
"… 얘들아 잠깐만, 금방 돌아올게."
숲에서 돌아가던 길. 멀찍이서 무언가를 찾아낸 로덴은 뒤따라온 일행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그것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로덴의 예상대로 그곳에는 물결치듯 출렁거리고 있는 녹색의 슬라임이 있었다. 녀석은 조금 전에 메림이 쓰러뜨렸던 고블린의 시체를 포식하는 중이었다.
일부 대중 매체에서는 슬라임들을 초보자들이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좆밥 마물이라고 소개하는 경향이 흔하게 보이는데…
몸에 닿는 물체를 녹일 수 있는 부정형 생물체가 만만한 적 일리가 있겠나.
웬만한 물체는 부식시킬 수 있기에 지속적인 물리 공격을 하려면 슬라임의 산성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한 무기를 사용하거나 마나나 오러를 사용해서 무기를 보호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속성 마법을 활용한 공격으로 녀석들을 사냥하는 편이지만… 여하튼, 이쪽 세상의 슬라임은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마물에 해당된다.
만약에 유적이나 동굴 같은 장소에서 방심하고 있다가 천장에 붙어 있던 슬라임을 재수 없게 뒤집어쓰기라도 한다면 대부분의 생물체들은 머리부터 녹아내리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버리니 말이다.
뭣도 모르고 슬라임한테 덤벼들다가 무기를 허무하게 잃어버려서 다른 모험가한테 온종일 병신 취급 당한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새삼 창피해지는군.
로덴은 옛날 일을 떠올리면서 기척을 죽인 채로 슬라임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놈은 고블린을 소화하고 있느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흡…!"
무기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의 표면에 오러를 두른 로덴은 재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푸욱! 희미하게 보이던 슬라임의 핵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괴했다.
로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서히 붕괴하고 있는 슬라임을 고블린의 사체에서 떼어내 진작에 인벤토리에서 꺼내 두었던 냄비에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라임이었던 것은 단순한 점액 덩어리가 돼버렸다.
만약에 녀석이 살아있었다면 냄비도 부식됐겠지만 슬라임은 죽는 순간에 산성이 상당히 약해져서 큰 문제는 없다. 그는 슬라임을 담은 냄비 뚜껑을 닫은 뒤에 인벤토리에 도로 집어넣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행에게 돌아갔다.
로덴은 그녀들에게 잠시 볼일을 좀 보고 온 것이라 무난하게 둘러대며 다시금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 *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별다른 문제없이 집으로 돌아온 로덴은 보수금을 챙기러 길드에 향한 쌍둥이 자매와 그녀들이 임무 보고를 하는 것을 한번 보고 싶다며 사이좋게 따라간 록시아와 헤어지고, 세 여자가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 잠시 혼자 남게 됐다.
여러모로 타이밍이 참 좋다. 곧장 주방으로 가서 조금 전에 챙긴, 점액 덩어리가 담겨 있는 냄비를 꺼내 든 로덴은 그곳에 보드카를 한병 부어서 가볍게 헹궈낸 뒤에 소금과 설탕을 몇 덩어리 뿌려서 골고루 버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액 덩어리는 공중에 붙들고 있어도 바닥에 흘러넘치지 않을 정도로 점성이 더욱 강해졌다.
로덴은 그것을 냄비째로 챙기고 바깥으로, 정확히는 건조대로 다가간 뒤, 빨랫감을 널어놓는 듯한 느낌으로 점액 덩어리를 햇볕이 잘 들게끔 쫘악 널어두었다.
과거에 동방 대륙에서 공부할 때 덤으로 배웠던 제조 과정 중 하나다. 사실 슬라임은 동방 대륙에서는 고급 식재료로 상당히 인기가 많은 편, 이대로 차분히 말린 슬라임을 얕게 썰어내면 꼬들꼬들한 식감이 일품인 면발로 변신한다.
할 일을 끝내고 뿌듯한 표정을 하며 집으로 다시 들어간 로덴은 오늘 아침에 새로 마련한 커다란 침대를 바라보면서 잠시 후에 찾아 올 밤을 기대했다.
…이 정도 크기면 세 명이서도 여유롭게 뒹굴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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