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동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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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을 갖춘 무뢰한들의 모임이나 다름없는 모험가 길드가 일정 규모의 도시마다 버젓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마물들을 상대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뭐, 마음만 먹는다면 도시를 지키는 경비병이나 군대를 동원해서 마물들을 충분히 구제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대인전에 특화된 병력이며 공격보다는 수비가 주된 역할이다.
세상 곳곳에 들끓는, 광범위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다종 다양한 마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매번 도시의 병력을 움직여 버린다면 소모되는 수고와 비용은 둘째 치더라도 수비에 구멍이 생기는 리스크까지 포함해서 군력을 활용한 마물 구제는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그러한 이유로 마물들이 서식하는 영역에는 언제나 모험가들이 찾아가기 마련, 모험가와 마물은 서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매우 가까운 관계에 머물러 있다.
"……라는 게 우리 같은 모험가들이 특정한 국가에 소속되지 않고도 어느 정도의 신분을 보증받을 수 있는 이유야~"
"요즘에 이르러서 모험가는 정작 '모험'이라는 단어랑은 꽤나 동떨어진, 도시의 편리한 심부름꾼 같은 의미로 변질돼버린 게 개인적으로 안타깝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니 어쩌겠어."
"그렇군요…. 예전에 언니들이 빌려주신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모험가의 이미지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원래 애들이 읽는 동화책에서는 냉정한 현실이 아니라 낭만만을 꾹꾹 눌러 담아주는 법이거덩."
고블린의 부락을 찾기 위해 굵직한 나무가 우뚝우뚝 솟아나 있으면서 드문드문 야생동물들과 날벌레들이 돌아다니는, 동북쪽의 울창한 숲지대를 넷이서 다 같이 탐색하는 길.
어느 순간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적들을 충분히 경계하면서도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한 쌍둥이 자매는 모험가가 하는 일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소녀인 록시아에게 모험가라는 직업의 존재 의의에 대해 서로 번갈아가며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고블린 토벌 의뢰는 영지 주변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조기구제 작업 같은 거죠?"
"응, 맞아. 고블린들의 경우에는 숲 속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뒤, 무리가 불어나도록 장시간 방치하게 된다면 나중에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비교적 만만한 농가를 습격해. 그렇게 된다면 애써 키운 농작물들을 약탈하고, 가축들을 때려죽여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고블린들에게 저항하는 농민들이 크게 다칠 위험까지 있어."
"그걸 사전에 미리 막기 위해서 대부분의 영주님들은 모험가 길드에 정기적으로 토벌 의뢰를 수배하고 있는 거야."
"아하, 이런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마물들까지 사냥해야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거네요."
현역 모험가인 쌍둥이 자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소녀의 호기심과 지식을 충족해 나간다. 어느덧 숲 속을 헤쳐나간 시간이 모두 합쳐서 두 시간가량 지나갔을 무렵.
"…다들, 이걸 봐봐."
그녀들보다 조금 더 앞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사. 로덴이 자세를 낮추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의 끝에는 자그마한 발자국 모양대로 수풀이 눌려있는 흔적이 여럿 있었다.
로덴은 옆으로 바짝 다가와 쪼그려 앉아서 발자국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록시아를 위해 보충 설명을 해줬다.
"록시아, 여기 이거. 인간하고 달리 발가락이 네 개 밖에 없는 거 보여? 이게 고블린의 발자국이란다."
발가락이 네 개인 아인종은 고블린 이외에도 흔하게 있는 편이지만 이 정도로 작은 발을 소유하고 있는 종류는 고블린과 코볼트 외에는 달리 없다.
코볼트들은 대체로 광산 근처에 서식하는 마물. 그렇다면 남은 용의자는 현재 목표물인 고블린뿐.
"드디어 흔적을 찾은 거네요. 삼촌."
"응. 탐색은 영 특기가 아니라서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버렸지만 이걸 쭉 따라가면 고블린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구체적인 단서를 찾아낸 일행은 높이 솟아난 나뭇잎 사이사이로 피부를 쬐여 오는 햇빛을 받아내며 더욱 빨라진 걸음으로 나아간다.
제법 깊숙한 구역까지 진입한 영향으로 더욱 울창해진 풀을 밟을 때마다 각자 신고 있는 신발에는 풀이 짓이겨지며 자연스레 묻어버린 즙의 풀내음이 폴폴 풍기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에서 발자국을 쫒고 있던 로덴의 시야에 고블린의 모습이 담기게 됐다. 그는 말 대신 수신호를 보내서 뒤따르는 일행에게 자세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이거. 내가 모험가였을 때 사용하던 수신호인데. 아직도 유효한 건가?
로덴은 혹시나 싶어서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도 쌍둥이 자매는 조금 전에 앞에서 보인 수신호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는 옆에 있는 소녀와 함께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가 모험가를 관둔 사이에도 수신호 체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네 사람은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녹색의 점으로만 보이는 작은 생물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10살짜리 꼬마랑 비슷한 수준의 자그마한 신장, 초록색의 칙칙한 피부, 우둘투둘한 돌기가 나있는 매부리코, 덤으로 미묘하게 뾰족한 귀를 소유하고 있는 소귀(小?)의 모습이 드러났다.
외계인처럼 길쭉한 머리에 꼬불꼬불한 머리털이 듬성듬성 나있으니 외모에 마이너스가 더해진다.
대충 무두질한 들짐승의 가죽을 걸쳐서 간신히 고간만을 가리고 있는 차림새인 고블린 두 마리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허름한 자루와 조잡하게 다듬어낸 몽둥이를 각 손에 쥔 채로 숲 속을 배회하고 있다.
"…대강 폼을 보아하니 먹이를 찾으려고 부락에서 나온 녀석들인 모양인데."
"그러게. 로덴 오빠, 어떻게 시작할까?"
형식상으로 의뢰를 받아온 파티장은 메림이었지만 그녀는 결정권을 로덴에게 넘겼다.
"음, 록시아. 이제부터 네가 마법을 사용해서 고블린을 공격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지?"
"네! 삼촌. 문제없어요."
지금까지 메림에게 마법을 꾸준히 배우기도 했고 일전에 항구도시에서 실전 경험을 한번 겪어보기도 했기에 소녀는 주인에게 씩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러면 두 사람이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는 걸로 하자. 메림이 오른쪽에 있는 녀석을 처리하고 록시아는 왼쪽에 있는 녀석의 다리를 노려."
"다리를 노리라고요? 일단 알겠어요."
"아하, 안내인 역할을 맡기려는 거구만? 그게 좋겠어."
로덴에게 고개를 끄덕이면 각각 스태프와 완드를 쥐고 재빠르게 주문을 외운 두 명의 마법사는 마력이 담긴 언어를 동시에 내뱉었다.
"아이스 니들!""어스 스파이크!"
푸욱! 한기를 내뿜고 있는 얼음송곳이 재빠르게 고블린에 머리에 꽂혀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녀석을 처리했다.
"키르르륵…?!"
그 모습을 바라본 나머지 고블린이 놀랄 틈도 없이 수풀 사이를 뚫고 지면 밖으로 튀어나온 돌덩이가 뼈가 부러지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다리를 거세게 강타했다.
순식간에 한쪽 다리가 부러져버린 고블린은 쥐고 있던 물건들을 내팽개치고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멀어지는 고블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덴은 록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을 뒤쫓기 딱 좋을 정도의 부상을 입혀놨구나. 잘했어."
"아하하! 지금까지 정성껏 가르쳐준 보람이 있는데? 잘하고 있어. 록시아, 앞으로도 실전에서 그런 느낌으로 해봐."
"네!!"
주인과 스승에게 동시에 칭찬을 받으니 자신감이 더욱 솟아오르게 된 록시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중, 고블린의 시체로 다가간 마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마, 마릴 언니…? 고블린의 귀는 왜 자르시는 거예요?"
갈무리용 단검을 이용한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블린의 귀를 마저 잘라낸 마릴은 소녀가 놀라지 않게끔 친절히 설명해줬다.
"아참, 우리가 록시아한테 미리 얘기를 안 해줬구나. 이건 증거품으로 제출하기 위해서 자르는 거야. 마물의 종류마다 부위가 다르지만 고블린 같은 아인종 계열 마물의 경우에는 오른쪽 귀를 가져오면 추가금을 받을 수 있거든."
"참고로 이번 의뢰에서는 하나당 동화 3개씩 추가금을 받을 수 있어."
…흠, 그 규칙은 여전하네.
쌍둥이가 해주는 설명을 같이 들은 로덴은 과거에 마물들의 특정 부위를 잘라내면서 먹고살던 모험가 시절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잡생각을 금방 떨쳐낸 그는 일행들이 들을 수 있게끔 적당히 큰 소리로 손뼉을 치고는 다시 앞장섰다.
"너무 늦기 전에 슬슬 쫓아가자. 저놈이 우리를 부락까지 안내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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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챙겨둔 휴대용 식량으로 점심을 때우며 고블린의 뒤를 뒤쫓은 일행의 시야에 울타리의 형태를 하고 있는 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침입자들 보다는 짐승들이 못 오게 하려고 지은 거 같네요."
"…저렇게 허접하게 지어두면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는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행들은 조금 전과 달리 자세를 숙이지 않고 제 집 구경하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로 울타리 너머의 부락을 슬쩍 확인해봤다.
짐승의 가죽과 주변의 나무를 이용해서 조잡하게 지어낸 자그마한 천막이 네 채 지어져 있었고 그 천막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는 짐승들의 피와 부패한 살의 냄새가 흘러들어온다.
일정 수 이상의 마물들이 터를 잡은 장소에서 흔하게 풍기는 악취, 놈들의 배설물과 먹다 남은 찌꺼기들이 퇴적되어 있는 것이다.
"키륵…! 키키르르륵!"
한편, 다리를 절뚝거리며 동료들에게 돌아간 고블린은 놈들과 뭐라 뭐라 떠들더니 부락을 구경하고 있는 로덴 일행을 가리켰다.
그러자 녀석들은 천막에 있는 무기를 꺼내 들어 하나둘,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끼륵! 끼르르르에엑!!"
"끼리리리리!!"
로덴 일행 중에 고블린과 소통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녀석들이 자신들에게 적의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화가 참 많이들 나셨어."
고블린들이 로덴 일행에게 화를 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사냥하러 나간 동족이 다리가 병신이 돼서 돌아왔는데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하겠지.
녀석들의 무기는 대부분이 나무를 깎아서 만들어낸 곤봉과 창이다. 유일한 쇳덩어리는 어디서 운 좋게 주운 듯한 낡아빠진 철검뿐.
"스물한 마리인가. 이 정도 규모라면 본격적으로 숫자를 불리기 전이네. ……마릴, 네 언니랑 록시아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싸워봐."
진작에 검과 방패를 빼들어둔 마릴은 로덴에게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고블린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녀를 지켜보던 메림과 록시아는 서서히 공격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로덴은 마법사들의 곁에서 조용히 검만 빼들었을 뿐이다. 그녀들을 위협할만한 공격이나 적은 모두 베어낼 생각이지만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 로덴이 고블린들을 향해 검을 한 두 번 휘두르기만 한다면 굉장히 손쉽게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양민학살 따위나 하려고 여기까지 따라나선 게 아니라, 일종의 안전감독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것이다.
…이윽고 주문을 완성시킨 메림과 록시아의 지팡이 끝에서 구현화된 마법이 고블린들에게 쏘아졌고 마릴은 그것을 신호로 과감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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