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동거
* * *
지금까지는 반대세력이 마왕성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외팔이 노마법사 멀린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지배자의 수정이 이제는 야구공만 한 크기로 쪼그라 들어서는 에스카로스의 손에 쥐어져 있다.
수정구를 비스듬히 들어 올려서 이리저리 살펴본 에스카로스는 시험 삼아 가볍게 마나를 흘려 넣어 봤다.
"………."
이번에도 역시 이렇다 할 반응은 없다. 수정 자체에서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는, 영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휙!
"어이쿠쿠쿠…! 갑자기 던지시다니…."
그는 예고 없이 수정을 포물선으로 던져서 멀린에게 다시 돌려줬고 한쪽밖에 없는 팔로 그것을 요령 있게 받아낸 노마법사는 진땀을 흘리는 시늉을 했다.
"흠… 조금 전에 들었던 너의 추측에 따르자면 전대 마왕이 용사에게 당했을 시기에 태어난 마족일 경우에 아직 14 살이거나 이제 막 15 살이 될 정도로 어린 녀석이겠군. 덩달아서 자기의 힘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 했으니 고위 마족일 확률도 매우 낮다."
"맞습니다. 그런 이유로 내일부터는 이 수정을 이용해 각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빈민가에 거주하고 있는 어린 마족들을 먼저 조사하고 거기서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마계국에 있는 고위 마족들도 천천히 살펴볼 요량입니다."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마족들의 대다수는 신원이 불분명한 경우가 있어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마계국에는 마족들을 10살이 될 때까지 의무적으로 관리하는 시설이 도시마다 존재한다. 그곳에 남겨진 기록을 따라가 본다면 14~19 살 사이에 있는 마족들의 이름이나 행방을 대략적으로 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멀린의 수색 계획을 듣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린 에스카로스가 피곤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늘은 이미 충분히 늦었으니 마왕을 수색할 인원 분배는 내일 하기로 하지."
"아, 그 점은 따로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원들은 제가 진작에 마련했으니까요."
"덕분에 수고를 하나 덜었군. 목표물을 찾게 된다면 내 앞으로 데려오도록."
에스카로스의 말을 들은 멀린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 이유를 물어봤다.
"호오, 직접 없애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을 처리할지 말지의 여부는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판단하려고 한다. 반론은 듣지 않겠으니 이제 나가보거라."
"……."
축객령이 떨어지자 주군의 성격상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한 멀린은 개인실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정구를 움켜쥔 채 순순히 물러갔다.
마왕성 내부를 순찰하고 있는 몇몇의 경비들을 지나치며 연구실을 겸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멀린은 미리 마련해둔 움푹한 받침대 위에 수정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마에 손을 올려서 정신을 집중한다. 시전자가 미리 지정한 대상과 생각만으로 서로의 의사를,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마법인 텔레파시를 사용했다.
아아, 검은 사냥개. 들리나?
네. 주인님. 저희 모두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멀린이 연락한 대상은 마계국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조직 중 하나인 검은 사냥개. 표면적인 신분은 전혀 다르지만 조직의 일원은 전원 유년기 때부터 멀린의 손에 의해 철저히 길러진, 검은 사냥개라는 조직명에 걸맞도록 완벽히 훈련된 사냥개들이다.
노마법사는 텔레파시를 통해 검은 사냥개들에게 조금 전에 에스카로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미각성 마왕 수색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줬다.
알겠습니다. 내일 주인님에게 수정을 전달받는 대로 수색을 시작하도록 하죠. 대상을 발견한다면 즉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다. 그냥 죽여라.
예? 하지만 조금 전에 전달하신 내용은 분명히 에스카로스님이 생포를 명하셨다고….
너희들의 주인이 누구더냐? 내가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지? 수정에서 반응이 나타나면 반격할 틈도 없이 죽여버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냥개들의 대답을 확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텔레파시를 중단한 멀린은 푸르른 달빛이 야트막하게 비치는 창가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는 오른팔 밖에 남지 않은 누추한 몸으로 나마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오오…, 하루라도 빨리 마왕님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군요."
* * *
메림의 모습을 했던 마릴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고서 쌍둥이 자매와의 관계를 록시아에게 밝히게 된 지 어느덧 일주일이 훌쩍 지나간 날의 아침.
그동안 록시아랑 충분한 대화를 나눈 로덴은 쌍둥이 자매와 본격적으로 같이 생활하고자 장사를 쉬는 날에 맞춰 본래는 빈방이었던 장소에 제법 커다란 침대를 들여놓게 됐다.
"연금술사 선생님! 이걸로 다~ 됐습니다. 그나저나, 침대가 하도 커서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모양새가 됐는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이 방은 침실로만 사용하고, 생활 자체는 거실에서 하겠다고 미리 정했거든요. 이걸로 괜찮습니다."
"선생님하고 쌍둥이 모험가에 대한 소문을 얼핏 듣긴 했었는데 이렇게 커다란 침대까지 마련하는 걸 보면 그게 진짜였나 보네유. 양손의 꽃이라… 어유, 같은 남자로서 참 부럽구만유~"
설치 작업을 마무리하고 로덴과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들은 커다란 침대와 로덴을 번갈아보면서 상당히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지다니… 아무튼,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별 말씀을유. 마법사 아가씨가 부품들의 무게를 줄여준 덕분에 저희도 상당히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거든유. 이럴 때마다 마법이 차암~ 편하긴 하네유~"
투박하고 느릿한 말투가 인상적인 점원이 록시아가 선보인 무게를 조절하는 마법을 아낌없이 칭찬하자, 그녀는 다소 쑥스러운 듯 코 밑을 슥슥 훑어냈다.
"아하하…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서 연습 겸 시도해 봤는데, 도움이 된 거 같아서 저도 기쁘네요. 안녕히 가세요."
로덴과 록시아는 이 더운 날에 수레를 끌고 와서 침대 부품을 가져오고, 집안으로 옮기고, 방안에 조립까지 하느라 적지 않게 고생한 가구점 직원들에게 수고의 말과 함께 약간의 팁을 건네준 뒤에 그들을 떠나보냈다.
두 남녀는 집안에 새로 들어온 커다란 침대를 이리저리 구경하고 만져보거나 시험 삼아 누워보거나 하면서 쌍둥이 자매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시간을 때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두툼한 배낭을 메고 있는 쌍둥이 자매가 찾아왔다. 그녀들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조금 전에 새로이 마련한 침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우야, 가구점에서 점찍었을 때부터 대강 예상은 했는데 막상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니까 진짜 크긴 크네. 후우우… 어디, 어디, 어디~! 성능 좀 시험해 보실까?"
중얼거리면서 배낭을 풀어헤친 메림은 그대로 과감하게 점프! 덩치만 커다랑 아이 마냥 새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뒹굴거렸다.
"아~! 좋다. 좋아! 야, 야, 마릴. 너도 뛰어들어봐!"
"하아… 난 됐어. 우리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만하면 충분하니까 빨리 일어나. 메림."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대신 창피해하는 것은 언제나 동생의 역할이었다.
"네이, 네이."
어차피 침대의 감촉은 밤에 실컷 즐기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순순히 내려온 메림은 동생과 바짝 붙은 채로 로덴과 록시아의 앞에 나란히 섰다.
"아참참. 로덴 오빠, 록시아. 우리 뭐 좀 달라진 거 모르겠어?"
"달라진 거?"
"아앗…! 찾았어요!"
쌍둥이 자매를 번갈아서 바라보던 로덴과 록시아는 평소와 다른 특이점을 금방 발견했다.
"……아. 머리를 좀 건드렸나 보네."
"딩동댕~!"
자세히 살펴보니 쌍둥이 자매는 하루 못 본 사이에 서로의 머리 모양을 조금씩 다르게 꾸며놓은 상태였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언니인 메림은 단발머리의 가르마를 7:3의 비율로, 동생인 마릴은 3:7의 비율로 치우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머리 길이까지 똑같다 보니까 저희가 사복을 입을 때 주변 사람들이 자주 헷갈려하더라고요. 그래서 기분전환 겸 살며시 바꿔봤는데… 잘 어울리나요?"
"당연히 어울리죠! 애초에 메림 언니랑 마릴 언니는 워낙 아름다우셔서 머리를 어떻게 하든 어울렸을 거예요."
"록시아의 말대로야. 두 사람 모두 잘 어울려."
"흐흐, 당분간은 이렇게 고정해 놔야겠네."
새로 마련한 침대와 새로 가꾼 머리에 관한 이야기를 얼추 마무리 짓기로 한 로덴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메림, 마릴. 의뢰는 받아왔어?"
"응, 너무 멀지 않은 위치에서 무난히 할만한 토벌 의뢰로 받아왔어."
"동북쪽 방향에 있는 숲에서 쭉 나아가면 도달할 수 있는 마물들의 영역이 있는데 거기에 자주 자리 잡는 고블린의 부락을 정리하는 내용이에요."
"고블린 부락이라… 마물과의 첫 번째 실전 경험을 알려주기에는 딱이겠네. 어제 말한 대로 아침은 미리 먹고 왔겠지?"
"당연하지."
"그러면 우리만 갈아입고 오면 되겠네. 잠깐만 기다려."
로덴은 오늘 가게를 쉬는 대신 쌍둥이 자매, 그리고 록시아와 함께 토벌 의뢰를 수행하기로 했다.
아직까지 마물과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는 록시아에게 실전에 의한 경험치를 쌓아주기 위함과 마릴의 수련 성과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덤으로 약간의 돈도 벌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 삼조다.
쌍둥이 자매는 진작에 장비를 다 입어둔 상태였기에 로덴과 록시아만 갈아입으면 된다. 두 남녀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적당히 싼 걸로 마련하긴 했지만 간만에 새 장비를 입으니까 기분이 남다르긴 하구만."
방에서 다시 빠져나온 로덴은 수수하면서도 전형적인 검사의 복장과 예전에 어비스에 진입할 때 사용했던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원래는 이리저리 녹슬어 있는 투구였지만 얼마 전에 대장간에서 수리를 받으면서 녹을 말끔히 제거해뒀다.
그 결과. 거리에서 정면으로 마주쳐도 10초 만에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로 흔해빠진 검사의 모습이 됐다. ……뭐, 특유의 체격 덕분에 아주 흔한 건 아니지만.
"지금 입고 계시는 장비도 잘 어울려요 삼촌! 평소랑 달리 얼굴을 못 보는 게 아쉽긴 하지만요."
"고마워. 록시아도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마법사 티가 확 나는데?"
"에헤헷…."
한편, 먼저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던 록시아는 메림이 입고 있는 옷을 축소한 듯한 보라색의 로브랑 고깔모자, 마무리로 늘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완드를 착용하고 있는 어린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걸 목표로 하자고."
그렇게 해서 로덴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거린 여자들과 처음으로 다 같이 토벌 의뢰를 하기 위해 동북쪽의 숲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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