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신세대 마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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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나서 바갑스니다… 즈, 주인님. 저…, 록시아… 입니다.
어눌하기 짝이 없는 서툰 인사말이 록시아가 맨 처음으로 로덴을 만났던 순간에 겨우겨우 쥐어짜 낸 말이었다.
[주인님] 록시아가 로덴을 부를 때 언제나 사용하는 호칭이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는 경우에 그것은 삼촌으로 뒤바뀌지만 기본적으로 소녀는 로덴을 늘 주인님이라고 칭하며 마음속 깊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노예로서 경매되고 있던 마족 소녀를 20 골드라는 상당한 거금을 들여서 정당하게 구매한 로덴의 입장에서 소녀의 입을 통해 주인님 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연했다.
이쪽 세상에 완전히 적응했기에 노예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별 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로덴이었지만 차츰차츰, 록시아와 함께 지내는 시간과 추억이 쌓여갈수록 소녀의 입에서 주인님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조금씩 아려오는 느낌이 들게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그 순간마다 자기 자신이 결국에는 노예이며 타인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니까.
주인님… 죄송해요. 모처럼 주인님이 주신 선물을 사용해 버렸어요. 귀중한 물건 같았는데….
특히 항구도시의 뒷골목에서 보았던, 소녀의 몸에서 생생히 새어 나오고 있는 피를 처음으로 목격한 날.
그런 상황에서도 상처가 아프다는 말 대신 자신에게 사과를 먼저 건네는 록시아의 목소리를 듣게 된 날부터 지금 이대로도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민하게 됐다.
"실은 말이지. 전부터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묻고 싶은 거요?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언제 말을 꺼내 볼까 하며 내내 생각하고 있던 로덴은 쌍둥이 자매와의 관계를 밝히게 된 오늘날에 이르러 쇠뿔도 단김에 빼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그게 있지… 음, 일단은…."
여러 번 이런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해봤지만 막상 실제로 하려니 어울리지 않게 긴장감을 느끼게 됐다.
로덴은 아침에 록시아와 대화를 나누던 것과 마찬가지로 본론보다는 가벼운 이야기를, 내일 아침 메뉴는 뭘로 할까 수준의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들면서 천천히 전철을 밟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려주는 소녀와 함께 시작한 조제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대화의 흐름이 달라졌다.
"그러고 보면 록시아는 나하고 단 둘이 있을 때 주인님이라 부르는 게 내심 불편하거나 하진 않니?"
"아뇨!! 전혀요!"
주인이 꺼낸 말과 동시에 얼굴이 살짝 굳어져버린 소녀의 오밀조밀한 입술에서 반사적인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단호한 목소리를 높이면서까지 말이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로덴은 물론, 큰 목소리를 내버린 록시아 본인 또한 깜짝 놀라버렸다.
"앗! 죄, 죄송해요. 주인님… 저도 모르게 그만."
"아냐, 아냐, 괜찮아. 내가 놀라게 해 버린 모양이구나. 일단은 작업도 거의 다 끝나가니까 마저 끝내고 다시 이야기하자."
"…네."
잠시 후, 다시금 작동하기 시작한 자동 배합기에서 들려오는 특유의 소리가 작업이 다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대신 알려줬다.
록시아와 함께 작업복을 벗은 로덴은 평소처럼 소녀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면서 조금 전에 나눈 이야기의 연장선을 탔다.
"오늘도 수고했어. 조금 전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내서 많이 당황스러웠지?"
"조금은요… 지금까지 주인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지금까지 불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로덴은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소녀의 봉긋한 가슴의 중앙을 슬며시 바라봤다. 불건전한 의도로 보는 건 아니고 가슴팍에 새겨져 있을 그것을 생각하다 보니 저절로 시선이 가버린 것이다.
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겠지. 몸안에 복종의 각인이 남아 있는 이상….
사령과 정신계열 마법에 능통하다는 흑마법사들이 노예상인들이나 몇몇 죄인을 노예로 만드는 기관에 협력해서 부여한, 보이지 않는 구속구.
마나 인식을 통해 주인으로 등록한 자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시 머리와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는 저주를 반영구적인 마법의 형태로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명령은 거의 내리지 않았지만 록시아에게 있어 몸에 새겨진 각인의 존재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었을 거야. 평소에 사과 먼저 하는 버릇도 각인의 영향이 적지 않을 테고.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행동을 중단한 로덴은 자세를 낮춰서 소녀와 시선을 나란히 한 뒤에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너하고 처음으로 만났던 날에는 주인과 노예의 입장으로서 이 집안에 들였었네."
"네. 아직도 전날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나요. 그 당시 주인님께서는 가게일을 도울 점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었죠."
그때의 주인님은 눈빛이 지금보다 차갑기도 했고 뭔가 알 수 없는 행동도 많이 하셔서 지레 겁먹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새삼 창피하네요.
소녀는 주인과 이야기하며 첫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점원이라… 지금까지 록시아가 우리 가게 점원으로서 열심히 도와준 덕에 나도 한결 편했고. 너랑 같이 지내는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즐거웠지."
말을 이어가는 로덴은 두 팔을 찬찬히 뻗어서 앞에 있는 소녀의 부드러운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러자 록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어딘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록시아, 내가 평소에 표현이 많이 서툴러서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널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 그런 만큼 네가 스스로를 타인의 소유물인 노예가 아니라 행복할 권리가 있는 한 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해."
"주인님…?"
"너의 몸에 복종의 각인이 남아있는 이상, 내가 이야기하는 게 말뿐인 위선으로만 느껴지겠지. 그래서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이며 침을 꼴깍 삼킨 로덴은 록시아랑 생활하기 전의, 타인을 믿지 못했던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꺼냈다.
그녀를 위해서.
"가까운 시일 안에 시간을 내서 수도에 있는 마탑으로 가보자. 그곳에서 네 몸에 새겨져 있는 각인을 지워내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시, 시…, 싫어요!!!!!"
조금 전에 내지른 목소리는 차라리 애교라고 생각될 정도로 쩌렁쩌렁한 비명소리가 소녀의 입을 통해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곧장 주인의 품에 매달리듯이 안겨 들은 록시아는 극심한 불안에 떨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만 해주세요. 뭐든지 바로 고칠게요. 앞으로는 청소도 저 혼자서만 더 깨끗이 할게요. 식사도 주인님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더 맛있게 차릴게요. 앞으로는 몰래 방을 엿보지도 않을게요. 주인님이 명령하는 건 무엇이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테니까 제발… 저를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또 버림받고 싶지 않아요…."
…뭔가 이상한 말이 하나 섞여있는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로덴은 중얼중얼거리듯이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한 록시아의 극단적인 반응에 한 순간 놀라버렸지만 곧장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거나 살살 매만지며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진정해, 진정해.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갔어. 몸에 새겨진 각인을 지운다는 게 너를 버리겠다거나 혼자서 살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야. 앞으로는 그런 속박 없이 가족처럼 지내자는 뜻이었지."
각인을 풀어준다고 해서 록시아를 밖에 내보내려는 생각 따위는 정말이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마법을 배우게 됐고 이 주변 일대가 비교적으로 평화로운 측에 속하는 영지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마물들과 때로는 그것들보다 더 사악한 인간들이 바깥에 널리고 널린 험한 세상이다.
가족조차 없어서 의지할 데 없는 소녀를, 심지어 인간도 아닌 마족인 소녀를무턱대고 인간들의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말 그대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
로덴의 차분한 말을 듣고서야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록시아는 주인의 품에 안겨있는 그대로 고개만을 들어 올렸다. 그 짧은 사이에 촉촉해져 버린 두 눈에서는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다.
"정말로… 요?"
"물론.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이런 일로 거짓말한 적 없잖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네…, 네… 주인님."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록시아는 주인의 가슴팍에 여름날의 매미처럼 착 달라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록시아를 울려버린 죄가 있는 만큼 바들거리고 있는 소녀를 떨어뜨릴 생각만은 차마 하지 못한 로덴은 한쪽 팔로 그녀의 하반신을 지지, 나머지 팔로 등을 받치는 자세로 안아 들어서 나란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정면으로 계속 안고 있으니 소녀의 봉긋한 가슴이 로덴의 몸에 꾸욱 눌리고 있는 게 느껴졌으나 그는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록시아를 끌어안은 상태로 한동안 거실을 배회한 로덴은 소녀의 떨림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어르고 달래줬다.
"…주인님, 이제 괜찮아요. 내려갈게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가고서야 완전한 평정을 되찾은 록시아는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와 주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혼자서 멋대로 판단해버려서 주인님께 또다시 폐를 끼쳐버렸네요…."
"나도 너에게 오해할만한 상황을 만들어 버렸으니 서로 비긴 걸로 하자. 하여간에 조만간 같이 마탑으로 가서 각인을 지워볼 생각은 있니?"
주인의 말을 듣고서 복종의 각인이 새겨져 있을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린 록시아는 마냥 소리를 질렀던 조금 전과는 달리 굉장히 차분하게 거절했다.
"주인님이 해주신 제안은 정말이지 감사하지만… 지금 당장은 지금 이대로 있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로덴과 피가 이어진 가족도, 사랑을 나누는 애인 사이도 아닌 록시아에게 있어서 주인과의 유일한 연결점은 복종의 각인을 통한 주종관계뿐이기에 소녀는 이것마저 함부로 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 뜻만 강요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 혹시라도 각인을 지우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말해. 나는 언제나 네 편이고 널 존중하고 있으니까."
"네, 주인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작은 소란을 마무리 지은 두 남녀는 그 이후로 평소처럼 같이 저녁을 먹고 순서대로 씻은 뒤에 각자의 방에서 잘 시간을 맞이했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곧장 침대에 몸을 맡긴 로덴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서서히 의식이 흐릿해지려고 할 때…,
똑똑똑!
규칙적인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모습을 보인 건 당연히 록시아였다.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던 소녀는 다소 부끄러워하고 있는 얼굴로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얘가 이 시간에 별일이네.
"주인님… 정말로 면목 없지만 그…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있는데요."
"무슨 일이니?"
"그, 그게 있죠…."
문을 두드리기 전에 나름의 각오를 했었지만 막상 주인에게 말하려니 입이 벌어지지 않았던 록시아는 두 눈을 꼭 감으면서 간신히 용기를 냈다.
"오늘은 혼자서 자려는 게 너무 무서워서요… 주, 주인님이랑 같이 잘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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