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신세대 마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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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한 키와 각 잡힌 근육질의 몸, 반듯한 콧대와 어울리는 날카로운 얼굴선, 은을 녹여서 만들어 낸 듯한 찰랑찰랑한 백은발과 어울리는 푸르른 피부.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시꺼먼 코트를 입고 있는 그의 은발과 대비되는, 검고 반질반질하면서도 < > 형태를 한 전형적인 마왕뿔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위엄마저 느껴진다.
황혼이 깃든 것처럼 고요히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종족과 신분,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여인이 눈을 마주치자마자 단번에 반해버릴 만큼 뛰어난… 귀공자라는 칭호를 붙이기 실로 어울리는 미모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부정당한 순간 타오르는 듯한 분노로 일그러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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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충동적으로 거대한 수정을 향해 날카로운 검격을 수십 번 휘두르고 위력적인 마법을 여러 차례 퍼부운 에스카로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수정은 어떻게 됐냐고? 비밀방의 지형과 수정을 지지하던 받침대가 잘게 베이고 부서져 버렸을 뿐, 수정 자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멀쩡하다.
제기랄. 이럴 가능성을 아예 염두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막상 겪어보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기운 낭비만 해버렸군.
비밀방이 난장판으로 뒤바뀌는 동안 문 앞에서 들려오는 파괴음을 내내 듣고 있던, 커다란 지팡이를 쥐고 있는 마족이 따악, 딱, 거리는 지팡이 소리를 일부로 흘리면서 에스카로스에게 다가갔다.
"에스카로스님, 원하시는 결과는 나왔습니까?"
그 순간 에스카로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사람을 매료하는 힘을 가진 마성의 목소리였지만 명확한 노기와 살기가 뒤섞였다.
"…멀린, 지금 날 놀리는 거냐? 내가 저지른 이 꼬락서니를 보거라. 그 질문을 던진 자가 나에게 마법을 진리를 가르쳐준 인도자이자 충신인 네 녀석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거다."
에스카로스가 대답하면서 뒤를 돌아봤을 때 멀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외팔이 노마법사는 진작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숙이 숙인 충성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멀린은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몸을 덮쳐오고 있는 흉흉한 살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길게 대답했다.
"허허, 이 늙은이에게 그런 유머감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저 같은 늙다리와 달리 에스카로스님처럼 혈기왕성한 나이 때의 마족은 절실히 원하는 것을 손에 넣든, 넣지 못하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을 휘두르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를 베어봤자 힘만 낭비할 뿐이니 살기를 거둬주시죠."
"하! 너구리 같은 노인네… 어느 쪽이든 내가 아직 감정조절이 서투르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싶었나?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 반박은 못하겠군. 이제 됐으니 일어나거라. 이딴 좁아터진 공간에 계속 있으려니 답답하다."
"예."
헛웃음을 지은 에스카로스는 살기를 완전히 거두고 노마법사와 함께 비밀방에서 알현실로 빠져나왔다. 수하들은 모두 바깥에 대기시켜놨기에 알현실에는 두 명의 마족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고 보니 질문에 대답을 안 해줬군. 유감스럽게도 수정에서는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에스카로스님이 [지배자의 수정]에게 부정당할 줄이야… 자존심 강한 고위 마족들을 완전히 통제하려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마왕이라는 상징성과 힘이 나에게 없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아쉽지만 반대 세력은 모두 굴복시켰으니 당장 큰 문제는 없다. 아무튼간에 오늘부로 지겨운 내전도 끝났으니, 일단은 엉망이 돼버린 마계국을 안정화시키는 게 최우선이겠지."
"흠, 맞는 말씀입니다만…."
길게 자라 있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린 노마법사는 한동안 그 상태로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일전에도 제가 이야기했죠? 마왕의 힘을 가진 존재가 죽는 순간, 그 힘과 권능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마족들 중에 가장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 저절로 전승됩니다.
"알고 있다."
"이제 몇 달만 더 지나면 현재 저희가 위치한 이 알현실에서 마지막으로 싸우셨을 '전대' 마왕님이 용사의 손에 의해 쓰러져버린지 벌써 15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것도 알고 있다."
"마왕의 힘을 전승받은 마족이 그것을 완전히 깨우치기 위해 필요한 건 감정이 극한으로 몰렸을 때야 나타나는 순수한 분노입니다."
"……그 역시도 이미 너에게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더냐?"
"흠흠, 효율을 따지자면 사념 전달이 훨씬 좋겠지만 에스카로스님은 제가 머릿속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시니 이걸 사용하도록 하죠."
멀린은 웅얼거리듯이 주문을 읊더니 바닥에 내리꽂은 지팡이를 통해 홀로그램과 유사한 모양새의 반투명한 마력 덩어리를 띄워 올렸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를 허공에 구체화시키는 고위 마법이다.
그는 마력의 덩어리로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와 갓난아이, 마지막으로 전대 마왕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줬다.
"참고로, 이 남자아이는 에스카로스 님이 5살인 때를 가정한 겁니다. 최대한 신경 써서 멋지게 만들어봤죠."
마력을 조작해서 전대 마왕의 홀로그램을 자그마한 가루로 만들어낸 멀린은 그 가루들을 남자아이의 홀로그램 근처에 둥둥 떠다니게 만들었다.
"저는 마왕님이 쓰러지는 순간에 그분이 가진 힘을 에스카로스님께서 전승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군의 잠재력은 최고위 마족들의 그것과도 확연히 비교될 만큼 어마어마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자의 수정이 에스카로스님을 부정했다면 남은 가능성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남자아이 주변을 떠다니던 마왕의 파편은 옆에 있던 갓난아이의 몸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제가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지만 에스카로스님 보다 더 높은 잠재력을 가진 마족이 동시대에 있던 것이죠. 이건 저의 추측이오나 이 마족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시기에 전대 마왕님이 돌아가셨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래야지 아직까지 그런 무시무시한 재능을 아직까지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설명이 되니까요. 이것 또한 추측이지만 힘을 물려받은 마족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이번 세대를 이끌어야 할 마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힘을 가진 자의 의무를 내버리고 있는 괘씸한 자로군."
에스카로스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으흐흐, 에스카로스님의 말씀대로 의무를 내버리고 있는 나태한 자는 힘을 가질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놓치지 않은 멀린은 음흉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거세게 휘둘렀다.
퍼석!
휘둘러진 지팡이는 갓난아기의 홀로그램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가루가 되어버린 갓난아이의 파편들은 옆에 있던 남자아이의 홀로그램에 스며들었다.
"이 마족이 아직 스스로가 마왕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처분한다면 이번에야 말로 에스카로스님이 마왕의 힘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이번 세대의 마왕이 될 것입니다."
* * *
날이 차츰 저물어 갈 때 가게문의 간판을 도로 뒤집어서 오늘의 장사를 끝낸 로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게 구역을 찬찬히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와 같이 청소하고 있는 마릴의 모습. 그녀는 오늘 혼자서 모험가 활동을 하는 대신 로덴과 함께 남아서 하루 종일 가게 일을 도와줬다.
임시 종업원이 된 그녀는 손님들이 들어오면 로덴을 보조했고 손님이 없다면 로덴과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틈틈이 서로의 몸을 만지작 거리거나 물고 빨면서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아무튼, 금세 정리를 끝마친 로덴은 문을 닫으면서 마릴을 바라봤다.
"후! 오늘은 도와줘서 고마워."
"고생하셨어요. 로덴 씨. 오늘은 들어오는 손님들마다 다들 저를 메림이라고 착각하는 게 은근히 재밌네요. 후후후…."
"지금의 모습이면 어쩔 수 없겠지. 그런데, 오늘 우리가 키스하던 현장을 몇몇 손님한테 보여줘 버린 바람에 오늘부터 너희하고 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차츰 도시로 퍼질 텐데 괜찮겠어?"
"오래 지내다 보면 늦던 빠르던 어차피 알 사람들은 다들 알게 될 거고 딱히 숨겨야 할 이유도 없는걸요. 로덴 씨는 저희랑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려나요?"
"뭐, 나도 주변의 눈은 크게 신경 안 쓰는 편이니까 너희만 괜찮다면 그걸로 됐어. 일단 들어가서 애들이나 부르자."
곧장 메림과 록시아를 찾아가서 수업을 끝내게 한 로덴은 다시금 마릴과 함께 뒷마당으로 가서 그녀와 대련을 했다. 오늘은 마릴의 검이 로덴에게 닿을 듯 말듯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허공만을 가르게 됐다.
그렇게 해서 모든 할 일을 끝마치고, 잠시 거실에 나란히 모인 네 사람. 먼저 입을 열은 인물은 메림이었다.
"저기, 아저… 아니지. 로덴 오빠, 이제부터 주변은 아예 신경 안 쓰기로 했으니까 앞으로는 우리도 여기서 같이 지낼 수 없을까? 숙식비도 꼬박꼬박 낼게."
아무래도 당장 재산을 공유하거나 뭐 그러기에는 너무 이르기도 하고, 우리가 염치없으니 당분간은 이러는 게 맞겠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고민한 로덴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을 좀 해보기로 했다.
"잠깐만… 너희들은 평소에 어느 여관에서 주로 지내고 있는 거지?"
"응? 요즘처럼 주머니가 여유로울 때는 대부분 푸른 모자 여관에서 숙박하고 있어."
"그 여관은 방이 그럭저럭 깔끔하기도 하고 가격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편이거든요."
이곳에 지내면서 몇 번 스쳐 지나간 적 있는 여관이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록시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로덴은 소녀와 쌍둥이 자매를 번갈아 봤다.
"조금만 더 여관에서 지내면서 기다려주지 않겠어? 그전까지 이 아이도 준비할 시간을 좀 주고 싶어서 그래."
"아… 하긴. 너무 우리 생각만 했네. 알았어. 어차피 지금껏 여관에서 지내 왔으니까 괜찮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그러면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로덴 씨. 다음에 또 보자. 록시아."
로덴의 대답을 듣고 납득한 쌍둥이 자매는 각자의 짐을 챙기고 다음을 기약하며 도심지로 향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녀들을 힘차게 배웅한 록시아는 곧바로 가게 문과 창문의 커튼들을 모두 닫아두고 나서 반지를 뺏다. 소녀는 주인과 둘만이 있을 때의 모습, 마족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한결 편해진 얼굴이 된 록시아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로덴은 곧장 그녀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약초 조제 작업을 시작하면서도 옆자리에 있는 록시아랑 잡담을 나누었다.
"록시아."
"네, 주인님."
"우리가 같이 지낸 지 벌써 8개월이 다 돼가네. 시간 참 빨리 지나지 않아?"
"그러게요. 지금까지 살면서 시간이 가장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록시아의 대답은 한치의 거짓 조차 없다. 지금처럼 주인과 같이 지내고 있는 매일매일이 너무 행복했으니까.
소녀의 순수한 미소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은 로덴은 예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들을 천천히 꺼내보기로 했다
"실은 말이지. 전부터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묻고 싶은 거요?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 그게 있지……."
………
………
………
"……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작업을 하면서도 로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던 소녀는 중간 즈음부터 얼굴이 차츰 굳어지다가…작업을 끝낸 이후에그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자 세찬 목소리를 냈다.
"시, 시…, 싫어요!!!!!"
록시아가 생전 처음으로 주인에게 완강한 거절의 표현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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