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신세대 마왕
* *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는 빵집에 들렀다가 빵을 한 가득히 담은 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금방 돌아온 로덴은 안쪽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고소한 스프 냄새에 이끌린 듯이 거실문을 열어젖혔다.
"오셨어요? 삼촌."
"어, 어서 오세요. 로덴 씨."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먼저 먹고 있어도 됐는데."
"아무리 그래도 의리라는 게 있지. 배고프니까 얼른 앉아."
받침대가 깔린 큼지막한 냄비를 중심으로 네 그릇의 접시와 짝을 이룬 스푼이 놓인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의 시선이 일제히 로덴에게 꽂혔다.
그녀들 중 마릴의 눈빛에는 애정과 미안함이 뒤섞여있었다.
"저기… 로덴 씨 어젯밤은…!"
그녀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그만 말하라는 듯 손바닥을 펼치며 고개를 가로저은 로덴의 동작에 말 끝을 흐렸다.
"밥 먹기 전에 나눌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조금 이따가. 그리고 지금은 다들 배고플 테니 얼른 먹기나 하자."
"네…."
짤막한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소녀의 옆자리에 앉은 로덴이 가죽 주머니에 담겨있던 빵을 차곡차곡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마릴은 그것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냈고 국자를 집어 든 메림이 냄비에 있던 스프를 각자의 접시에 가득 담았다.
모락모락 한 김과 달짝지근한 냄새가 뿜어지고 있는 연주황빛 스프에서는 크고 작은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로덴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봤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굵직한 꼭다리의 형태를 보아하니 스프의 주재료는 역시나 호박인 모양이다.
눈 뜨자마자 벌어진 해프닝 덕분에 식사시간이 조금 늦어진 만큼 네 사람은 곧바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푼을 들었다.
후루룩, 후루룩.
"와."
종류는 전혀 다르지만 주방장님이 내오던 스프를 다시 맛보는 기분이네. 요리를 배운 지 얼마 안 됐다는 애가 벌써 이런 절묘한 맛을 낼 수 있다니…
록시아가 차려준 요리를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된 마릴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간다.
달달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호박 스프가 입안에 스며들어 식도를 타고 비어있던 위장을 부드럽게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허나, 아무리 스프의 맛이 좋더라도 그것 하나만으로 아침의 공복을 달랠 수는 없는 법.
네 사람은 스프를 절반 정도 먹어치울 즈음부터 각자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로 잘라둔 빵을 집어 들고 달달한 스프에 찍어먹으면서 식탁을 비우는 만큼 뱃속을 채웠다.
잠시 후.
스프가 담긴 냄비와 접시는 말끔히 비워지고 빵이 담긴 주머니는 자잘한 부스러기만이 남게 됐다. 메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가볍게 두드렸다.
"후우! 잘 먹었어."
"로덴 씨, 잘 먹었어요. 그리고 록시아가 준비해준 스프도 정말 맛있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요리법을 배우고 싶을 정도야."
"에헤헤… 칭찬 고마워요 마릴 언니. …어… 마릴 언니 맞죠? 솔직히 아직도 적응이 잘 안돼네요."
아낌없는 칭찬에 수줍은 미소를 보이던 록시아는 맞은편에 있는 쌍둥이 자매의 얼굴을 다시금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구분하는 요소는 복장과 체격, 얼굴, 걸음걸이 등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요소는 머리카락, 달리 말하자면 헤어스타일이다.
마지막으로 쌍둥이 자매를 봤을 때만 해도 긴 포니테일과 단발머리라는 커다란 차이점 덕분에 곧바로 구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단발머리로 통일해 버렸으니 말투랑 복장으로 구분해야 하는 상황이다.
으흐흐, 저 반응을 보고 있으니까 이거 생각보다 훨씬 재밌네?
자기들을 수시로 번갈아보고 있는 시선을 내심 즐기고 있던 메림은 마릴의 옆구리를 살살 찌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야. 다음에 모험가 길드 방문할 때 서로 옷이랑 장비 바꿔서 가보자."
"됐어. 더 이상 애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가 장비를 뒤바꾸면 출발할 때 다시 갈아입어야 되잖아. 너무 번거로워."
"재미없게시리."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 얻어먹었으니까 최소한 뒷정리는 우리가 해야지."
"네~ 네. 그러면 록시아는 잠깐 쉬면서 기다리고 있어. 이것만 치우고 바로 수업 시작할게."
"알았어요."
단호한 거절에 속으로 혀를 찬 메림은 동생과 함께 식탁 위에 있는 빈 접시와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곧장 움직인 로덴도 지하실에 보관 중이던 포션을 챙기고 진열대의 빈자리를 보기 좋게 채워놓은 뒤, 가게문에 걸어둔 간판을 뒤집어서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차적으로 찾아온 손님들에게 체력 포션과 해독제, 스태미나 그리고 피임 포션 등 약품을 종류별로 판매하고 나서 가게가 잠잠해졌을 때, 문 너머에서 로덴을 지켜보고 있던 마릴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로덴 씨는 하루를 이렇게 시작하시는군요. 평소에는 많이 여유로운 분위기였는데 아침에는 은근히 바쁘네요."
"아무래도 주 고객층이 모험가니까 아침이랑 저녁때 많이 몰려오거든. 그 이외에는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분위기야."
잠깐 못 보던 사이에 옷을 완전히 갈아입은 마릴은 반팔 블라우스와 타이트한 검은색 가죽 바지를 조합한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렇다 할 노출이 없도록 신경 써서 차려입은 옷이지만 의도와는 달리, 잘 빠진 다리와 잘록한 허리, 탐스러운 가슴의 아름다운 곡선이 저절로 부각됐다.
아무튼, 단 둘이서 로덴과 같이 있게 되자 전날 밤의 일을 다시금 떠올린 마릴은 발그레진 얼굴로 상대방을 흘끔흘끔 올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로덴 씨, 어제는 여러 가지로 죄송해요. 언니처럼 꾸미고는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린 데다 내내 반말까지 했네요."
"사과는 어제 메림한테 대신 받았으니까 굳이 또 할 필요는 없어. 너야말로 몸은 좀 어때? 첫경험부터 그렇게 해버렸는데… 많이 아프거나 힘들진 않았어?"
조금 전에는 바로 옆에 록시아가 있었고 식사 직전이라 대놓고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로덴은 전날 밤에 그녀를 언니인 메림이라고 생각해 버린 탓에 첫경험부터 혼절해 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안았다. 그 경험 자체가 마릴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마릴은 로덴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피워낸 채 더욱더 가까이 다가갔다.
"예. 보시다시피 전 괜찮아요. 무엇보다도 제가 원해서 한 걸요. 로렌 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걱정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숨결이 닿을만한 거리까지 다가간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출입문을 흘끔거리다가 로덴의 손을 잡아서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솔직히… 어젯밤에 기분도 너무 좋아서 기회만 된다면 또 하고 싶어요. 로덴 씨는 어땠어요? 제 몸… 기분 좋으셨나요?"
"…응. 나도 마릴하고 마찬가지야. 기회가 될 때마다 언제든지 또 안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았어."
"다행이다… 이대로 잠시 손좀 잡고 있어도 될까요?"
"괜찮아. 이 시간대는 사람들도 잘 안 오니까."
마릴은 긴 시간 동안 로덴의 손을 잡고 있어서 굉장히 행복했지만 포옹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녀는 다시 로덴에게 허가를 받고 나서 포옹을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마릴은 막상 포옹까지 하고 나니까 이보다 더한 것을 원하게 됐다.
"로덴 씨, 이대로 뽀뽀 …아니, 키스해도 될까요?"
지금은 장사 중인 시간이라 출입문이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하게 되니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돌적으로 변한다. 지금 당장 상대방과 입을 맞춰서 애정을 나누고 싶다.
로덴은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마릴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농밀한 키스를 나누었다.
"…웁, 응 …우웅."
서로가 서로의 향기에 취해버려 키스는 절대 단기간 내에 끝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연장선을 걷는다.
쭙쭙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타액을 교환하다 보니 마릴의 몸을 등반하기 시작한 로덴의 손은 슬금슬금 올라가 풍만한 가슴 위에 자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만져줬으면 좋겠다. 두 남녀의 끈적하고 농밀한 키스는 출입문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쭈욱 이어졌다.
* * *
같은 시각.
마계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마왕의 부재로 인해 마음 깊이 충성할 대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고위 마족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시작된 다툼은 감정과 시간이 쌓이고 쌓인 끝에 거대한 세력과 세력 간의 다툼. 즉, 내전으로 까지 번져졌다.
내전이 막 시작될 당시에는 네 개의 세력으로 쪼개진 바람에 승자가 어느 쪽이 되었든 마계국의 내전이 완전히 끝나려면 최소한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지만
네 개의 세력은 겨우 6개월 만에 세 개의 세력으로 줄어들었다.
세 개의 세력은 다시 4개월 만에 두 개의 세력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두 개의 세력은 약 2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에 완전히 통합되어 최소 10년이라는 세월이 예측된 마계국의 내전은 1년이 조금 지나지 않은 시간만에 끝을 보게 되었다.
다른 세력들의 수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전장을 누비며 순식간에 내전을 종결시키고 당당하게 이번 세대의 마왕이라고 칭한 마족의 이름은 에스카로스.
그는 10살이 되는 해에 측정을 받았을 때부터 최고위 마족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제1급으로 판정받았다. 그로부터 약 10년, 곧 있으면 딱 20세가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등한 적수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패배]라는 단어를 평생 모르고 살았다.
그렇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 벌어진 내전을 종결시키고, 마왕성 깊숙한 곳에 있는 수정에 직접 도달하면 자신이 이번 세대의 마왕임을 증명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전의 종결을 선언한 날.
최고위급 마족들만이 존재를 알고 있는, 마왕성 알현실에 숨겨진 비밀방으로 서슴없이 들어간 에스카로스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수정 앞에서 방대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자신이 이번 세대의 마족을 이끌 진정한 마왕임을 증명하기 위해.
……
……
……
하지만 수정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