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쌍둥이 자매 (6)
* * *
자기 전에 닫아둔 커튼의 좁은 틈새 사이로 밝은 햇살이 밀려들어와 어여쁜 소녀의 얼굴을 비췄다.
"으으음… 하아아~!"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록시아는 아기 고양이처럼 눈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커튼을 양 옆으로 활짝 열고, 조금 전까지 몸을 맡겼던 침대를 정갈히 정리한 뒤에 방에서 나왔다.
끼익….
끼익!
끼익.
그리고 이날만큼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세 개의 방에 있던 문이 그야말로 동시에 열려버렸다. 소녀는 양 옆에 있는 방에서 똑같은 모습을 드러낸 쌍둥이 자매를 눈에 담게 돼버렸다.
"어, 어, 어어…?!
록시아는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스승의 모습을 양쪽 방향에서 동시에 마주하게 되자 순간적으로 오른쪽 눈동자와 왼쪽 눈동자의 방향이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사팔뜨기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소녀의 위치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메림(진짜)과 같이 튀어나온 주인의 모습은 덤이다.
"메림 언니가 둘? 그리고 주인님까지?!"
어찌나 당황했는지 쌍둥이 자매 앞에서 주인님이라는 호칭까지 툭 튀어나왔다. 상황이 상황이라 쌍둥이 자매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어 버린게 다행이다.
"어머…."
양쪽으로 돌아가버린 록시아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다행히도 1초도 되지 않는 짤막한 시간만에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현 상황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과 마음만은 여전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마주하게 된 막장 드라마 같은 현장에 혼란스러워진 것은 마릴또한 마찬가지다.
"그, 그게 있지. 록시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어째서인지 그녀는 애인있는 남자한테 꼬리친 여자가 할 법한 어조로 말을 마구 더듬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나란히 있는 로덴과 메림의 모습을 바라본 그녀는 전날 밤에 언니를 흉내 내어 그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도 당장 눈 앞에 있는 록시아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고 있다.
마릴과 록시아 두 사람 모두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가 마구 돌아가고 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그러게. 평소에는 가장 먼저 일어나던 오빠가 오늘은 웬일이람? 역시 어제는 무리해버렸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정신 사나우니까 잠깐 조용히 해봐."
한편, 이 상황에서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메림과 로덴은 혼란에 빠진 소녀와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전날 밤에 아무런 대책 없이 잠들어 버렸다는 생각과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지금까지 단 둘이서 은밀한 관계를 가졌을 때와는 달리 이제부터는 동시에 두 명이라 몰래 사귀기도 굉장히 힘들다.
애당초에 록시아에게 로덴과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슬슬 그녀에게도 속 시원히 관계를 밝힐 때가 된 것이다.
조용히 턱을 쓰다듬으며 세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덴은 메림과 눈빛을 교환한 뒤, 속닥거리듯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메림, 록시아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너는 동생 좀 진정시킬 겸, 둘이서 천천히 씻고 돌아와."
"알았어."
고개를 끄덕거린 메림은 곧장 마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볼기짝을 팡팡 두드렸다.
"야, 야, 어이, 마릴, 마~아~릴! 퍼뜩 정신 차리고 따라와. 어젯밤은 어땠는지 이 언니랑 진솔한 얘기나 좀 나누자고."
"어, 엇!"
동생이 무어라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손목을 붙든 메림은 마릴과 함께 욕실로 향했고 순식간에 로덴과 록시아, 단 둘이서만 남겨지게 됐다.
로덴은 잠시 두 손을 모아 얼굴에 가까이하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무언가 이상 야릇한 냄새나 체취가 남았는지의 여부를 다시금 확인해봤다.
흠, 방에서 나오기 전에 메림에게 클린 마법을 받아두길 잘했군.
이미 상황이 들통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진한 밤꽃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소녀에게 접근할 정도로 얼굴이 두텁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록시아에게 천천히 다가간 그는 소녀의 양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걸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아침부터 많이 놀라게 해 버렸구나.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아서 그런데, 방에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아… 예, 주인님. 당연히 괜찮아요. 어느 방으로 들어갈까요?"
손님용 방과 로덴의 방 안에서는 전날 밤에 쌍둥이 자매와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던 냄새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을게 뻔했으니 당연히 제외다. 소거법으로 인해 남은 것은 록시아의 방뿐이다.
"네 방으로 들어가자. 괜찮지?"
"괘, 괜찮긴 한데… 그…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없을까요? 3분… 아니, 2분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최대한 빨리 정리할게요."
"그래, 그래. 난 괜찮으니까 준비가 다 되면 불러주려무나."
아무래도 저 나이대면 감수성이 유독 풍부한 시기라서 남에게 방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겠지.
대답을 듣고 나서 로덴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혼자서 방에 들어간 록시아는 문을 닫자마자 엿보기용 구멍을 메워둔 벽을 향해 거의 달려가듯이 후다닥 다가갔다.
원래부터 타고난 성격인지 아니면 보호자의 영향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록시아 또한 로덴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꼼꼼한 성격의 보유자가 되어 버렸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전날 밤에 구멍을 메워둔 흔적이 눈에 띄는지 한번 더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엿보기용 구멍의 존재를 들켜버리고, 여태까지 로덴과 메림의 행위를 훔쳐봤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소녀는 극도의 수치심 때문에 목을 매달게 될지도 모른다.
으음…, 너무 집중적으로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이걸 들킬 걱정은 없을 거예요.
다시금 확인해 봤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한 솜씨였다. 벽의 이음매는 매우 미미했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무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선을 새겨놓기까지 했다. 이곳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모른다면 구멍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은 어지간히 솜씨 좋은 도적이 아닌 이상 '불가능' 할 것이다.
록시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음의 프로페셔널(Professional)로 성장해 버렸다.
"…하아아아……."
깊은 한숨과 함께 밀물처럼 스멀스멀 떠밀려오는, 깊고 어두운 자괴감을 마음속 깊은 구석자리에 꾹꾹 눌러 담은 소녀는 주인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을 잽싸게 정리한 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주인님, 오래 기다리셨죠?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별게 다 미안하다. 그럼 실례할게."
로덴은 록시아를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그녀를 존중하고 있기에 어지간하면 록시아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정리는 스스로도 잘하고 있으니 굳이 간섭할 필요도 없거니와 저 나이 때 여자의 방에 보호자가, 그것도 시커먼 남자가 함부로 들락거리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는 게 주된 이유다.
오랜만에 그녀의 방에 입장하게 된 로덴은 무의식적으로 눈동자를 굴려서 안의 풍경을 쓱 훑어봤다.
맨 처음에 록시아가 이 방에 생활하기 시작할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이 약간의 먼지만이 쌓여있던 황량한 방이었지만, 이제는 마음껏 누울 수 있는 침대도 있고 예쁜 옷가지들이 마련돼있는 옷장과 원하면 언제든지 책을 펼칠 수 있는, 책장을 겸하는 책상과 의자도 배치되어있다.
그 위에는 로덴이 선물해준 몇 권의 책과 완드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록시아의 방도 이런저런 물건들을 많이 들이게 됐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얘가 딱히 뭘 사달라는 적이 없어서 여자아이의 방 치고는 뭔가 좀 수수한 면이 없잖아 있네. 귀여운 인형이라던가 소소한 화장품 같은 게 놓여 있으면 더 산뜻할 거 같은데.
대강 그런 생각을 하며 록시아랑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은 로덴은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둔 말을, 본론보다는 서론을 먼저 꺼내 들었다.
"조금 전에는 선생님이 두 사람으로 늘어난 줄 알았지? 나도 어제는 마릴의 모습을 보고 깜빡 속았었는데."
"아, 역시나 한쪽분은 마릴 언니였군요. 맨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도플갱어가 나타난 줄 알았어요."
"그거 재밌는 발상이네. 덧붙이자면 나랑 같이 있던 쪽이 메림, 내 방에서 나온 쪽이 마릴이야."
로덴의 말을 들은 록시아는 전날 밤에 구멍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려봤다.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스승의 몸을 정리해준 다음에 불을 끄고 어디론가로 나가던 주인의 모습.
평소 같았으면 상대방과 함께 같이 잠들거나, 혹은 씻고 나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거나 둘 중에 하나였는데 어제만 주인 혼자 방에서 떠나는 것에 의아함을 품었지만 지하실에 볼일이 있거나 새벽의 산책이겠거니 하고 그녀도 곧장 엿보기용 구멍을 다시 메웠었다.
그렇다면 어젯밤에 주인님이랑 사랑을 나눴던 건 메림 언니가 아니라 마릴 언니. 더군다나 조금 전에 메림 언니하고 방에서 같이 나왔다는 건 주인님은 어젯밤에 두 언니를….
"실은 말이지. 지금까지 주변에는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이미 반년 넘게 메림하고……"
록시아의 추측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뒤늦게나마 로덴이 그녀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과 쌍둥이 자매가 어쩌다가 지금의 관계가 되었는지 천천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록시아도 알만한 건 다 알만한 시기니까 어설프게 꾸며내거나 거짓말을 할 바에야 사실을 알려주는 게 차라리 서로에게 더 좋다는 근거에 의해서다.
"… 그러다가 어젯밤에는 메림의 모습을 하고 있던 마릴이 내 방에 찾아와서……"
물론, 소녀에게 너무 자극적일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배제하고 순화해서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지금까지 그녀가 염탐했던 광경을 생각하면 순화의 의미는 거의 없겠지만.
"결국에는 조금 전에 우리가 봤던 그 상황이 나오게 된 거야."
"……그렇군요. 주인님, 뭐라고 해야할지… 축하드려요."
"그래, 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록시아는 거의 세 달 전부터 주인과 스승이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꾸준히 훔쳐봤기에 로덴과 메림이 깊은 관계라는 것 자체는 새삼 놀랍지 않았지만, 메림만이 아니라 동생인 마릴하고까지… 그것도 어제부로 관계를 맺어버렸고 이제부터 쌍둥이 자매를 동시에 취하겠다는 이야기를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있으니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됐다.
"막상 다 털어놓으니까 속이 후련하군.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나뿐만 아니라 록시아도 쌍둥이 자매랑 더욱 자주 얼굴을 보면서 살게 될 테니까. 개인적으로는 서로 지금보다 더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
"걱정 마세요. 저도 메림 언니랑 마릴 언니 두 분 다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된다면 더 친해지면 친해졌지. 사이가 안 좋아질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거 기특하구나."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는 소녀에게 다시 고맙다는 뜻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로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침도 좀 늦어버렸고, 네 사람분의 몫도 챙겨야 하니까 빵이라도 사 와야겠어. 그동안 너는 스프를 좀 만들어 줬으면 하는데…."
"네! 얼마든지요. 주인님."
"믿음직스럽네. 그러면 잠깐 나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주인님… 정말 잘 됐어요.
록시아는 확실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로덴에게 '사랑'이라는 형태와 이름을 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가 조금 전에 주인에게 쌍둥이 자매와 사귀게 된 것을 축하한 것도 앞으로 그녀들과 더 사이좋게 지내게 될 것이라 대답한 것도 틀림없는 진심이다.
이것은 소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주인과 스승이 연인 관계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사이를 비집을 틈이 도저히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 메림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생인 마릴하고도 깊은 관계가 됐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록시아는 순간적으로 더 절망하기도 했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보니 이것은 오히려 희망적인 이야기다.
주인님이 두 명의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서 세 명의 여자도 얼마든지…!
순식간에 그런 결론에 도달한 록시아는 여느 때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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