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쌍둥이 자매 (2)
* * *
배낭을 뒤적거리는 메림이 가위뿐만이 아니라 머리카락 받침대로 사용할 천, 머리카락을 묶어둘 가느다란 끈, 마지막으로 빗을 차곡차곡 바닥에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마릴은 기가 찬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아주 작정하고 있었네."
"기왕이면 준비가 철저하다고 표현해줬으면 좋겠는데."
메림과 마릴은 어릴 때부터 복장을 똑같은 종류로 맞추면 저택에 있던 사용인들 만이 아니라 가족들조차도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굴과 체격, 몸매, 목소리를 포함한 신체적 특징이 똑같은 그야말로 완벽한 일란성쌍둥이 자매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 들었던 제안대로 머리카락 모양만 똑같이 하고 옷과 행동, 말투를 언니처럼 꾸민다면 그간 쌍둥이 자매와 나름 오랫동안 알고 지낸 로덴이랑 록시아도 머리카락을 자른 마릴을 평소의 메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면 결과적으로 로덴 씨를 속이는 거잖아."
"이렇게라도 안 하면 같이 만나고 있는 여자가 버젓이 있는 남자한테 어떻게 들이대려고 그러니? 나랑 같이 그 오빠한테 '원 플러스 원으로 즐겨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달려들어볼까? 와 씨, 내가 생각했지만 이거 괜찮네. 어쩌면 더 잘 먹힐 수도 있겠는데."
굉장히 노골적인 메림의 대사를 들은 동생은 동공이 이리자리 흔들거리며 오물거리던 입술을 앙 다물었다. 시시각각으로 다양하게 변하는 마릴의 모습을 지켜보던 언니는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뭐냐, 혼자서 다수의 미녀를 안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사양하지 않는 편이긴 한데… 이게 마냥 무조건은 아니야. 어쩌다 가끔씩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만을 바라보는 순정파도 있거든. 로덴 오빠가 그런 예외의 경우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이걸 미리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확실한 방법을 고르려는 거야."
"확실한 방법이 내일 밤에 너 대신 로덴 씨의 방에 들어가는 거라고?"
경험은 없지만 기초적인 성지식은 있었기에 야심한 밤에 여자가 남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고 있는 마릴은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렸다.
"응, 응. 로덴 오빠가 네 몸의 처음을 맛본다면 그때부터는 차마 너를 거절하지 못할 거야."
"일방적으로 로덴 씨를 속인다고 생각하니까 양심에 찔리지만…."
별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끝내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결심한 동생을 위해 방 한가운데에 깔아놓은 천 위로 의자를 올려둔 메림은 등받이 부분을 탁탁 치면서 손짓했다.
"자자! 세팅 다 해놨으니까 앉아, 앉아."
언니의 말대로 고분고분히 의자에 앉은 마릴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음? 혹시 머리카락에 미련이 남았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벌써 십 년도 넘게 같은 모양으로 유지하고 있던 머리카락인데 이제 와서 자른다고 생각하니까 새삼 신기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릴은 머리카락을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하게 됐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그때부터 나랑 언니를 구분하기 편하게 해야 한다고 따로 명령해서 나만 쭉 기르기 시작했었지.
"듣고 보니 옛날 생각나네. 그전까지는 우리 둘 다 적당히 긴 머리였잖아. 나는 그때 엄마가 품위 유지를 핑계 삼아 단정하게 유지하라고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단발로 잘라버렸는데. 뭐, 막상 자르고 나니까 무진장 편해서 쭉 이대로 고정한 상태지만."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빗질을 먼저 시작한 메림은 자연스럽게 동생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가락 위에 걸쳐본다.
관리가 잘 된 아름다운 주황색 머리카락. 메림의 손가락의 사이사이로 주황빛의 비단실 같은 것들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이것을 막상 자르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것을 번복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시험 삼아 들고 있는 가위를 허공을 향해서 벌렸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가위 특유의 짤각거리는 소리를 여러 번 냈다.
"어디 보자… 한 번에 자르기는 너무 두꺼우니까 양쪽으로 묶어서…."
썩뚝! 썩뚝!
중간중간에 끈으로 묶어놓은 긴 머리카락을 과감하게 자르는 것을 두 번 반복한 메림은 동생의 머리를 순식간에 일자형 단발로 만들었다.
"와…."
십 년 동안 계속 머리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게 되자 어마어마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 마릴은 나직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절단면을 만지작거렸다.
"오호호, 기분은 좀 어떠신지요. 손님?"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엄청 가벼워졌는데도 영 실감이 안 나."
"금방 익숙해질 거야. 이제 다듬어 줄테니까 얌전히 손 내리고 눈 감아."
"응."
마릴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살며시 눈을 감은 순간, 본격적인 손질이 시작됐다. 가위가 맞물릴 때마다 고운 주황빛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조금씩, 천을 깔아 둔 발치에 떨어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가위를 다루고 있는 메림의 손놀림은 굉장히 깔끔하면서도 능숙하다. 마치 숙련된 미용사의 손질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흠흠, 여행하면서 틈틈이 가위를 다룬 보람이 있네. …어릴 때 맨 처음으로 가위를 들었을 때는 자고 있던 집안사람 몇몇을 빡빡머리로 만들어 버린 바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한테까지 크게 혼나버렸던가. 역시 뭐든 간에 많이 해 봐야 한단 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동생의 머리를 훌훌 털어내어 마무리 지으며 마릴에게 손거울을 건네줬다.
"좋았어~! 이걸로 완벽해. 한번 봐봐."
"깔끔하게 잘라줬네… 고마워."
거울을 바라보던 마릴은 언니와의 유일한 차이점인 머리카락 모양까지 똑같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손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있는 사이에 사각사각, 다시 가위가 맞물리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가위를 내려놓지 않은 메림이 본인의 머리카락 끝자락을 간단히 손질하고 있다.
동생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메림은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만약을 위해서야. 머리카락을 막 잘라낸 티까지 없애지는 못하잖아. 내 머리도 슬슬 손질할 때 됐으니까 겸사겸사지."
금세 손질을 끝마친 메림은 동생과 함께 뒷정리를 하고는 여관에 딸려있는 우물에서 머리를 번갈아 감은 뒤, 마법으로 화력을 조절한 불을 이용해 금세 말리면서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서랍장 위에 머리가 잘린 뱀의 몸뚱이처럼 축 늘어져 있는, 끈으로 단단히 묶인 머리카락 덩어리를 마주했다. 시험 삼아 움켜잡아 들어 올리면 은근히 묵직하다.
"지금까지 이걸 머리에 달고 있었다니…."
"으음, 일단은 천으로 감싸서 배낭에 보관해야겠다. 나중에 다 쓸데가 있겠지."
잘라낸 머리카락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때에 따라서 밧줄 같은 용도로 쓰일 수도 있고 실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 정도로 찰랑찰랑하면서도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면 최상품의 가발 재료로 상당히 높은 가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돈이 급하면 이거라도 팔아야지.
아무튼, 결전의 준비를 끝마친 쌍둥이 자매는 곧장 랜턴을 끄고 그대로 각자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릴은 내일 이 시간쯤에 언니의 모습으로 로덴의 방에 들어갈 생각에 푹 빠져서 한참 동안 잠을 설쳤다.
* * *
다음날.
수업을 모두 끝마친 개인 교사 메림, 포션 가게의 주인장 로덴, 수습 마법사이자 종업원인 록시아. 이렇게 셋이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중. 메림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로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냈다.
"…자세히 보니까 머리카락을 좀 다듬은 모양이네?"
"여자의 변화를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둔해 빠졌네. 아저씨랑 달리 록시아는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알아차렸는데 말이지."
"이번에도 메림 언니가 혼자서 다듬은 거라고 하셨죠? 전에도 생각했지만 엄청 자연스럽게 자르시네요."
밥을 우물거리고 있는 입가를 조신하게 가린 록시아가 말을 건네니 설익은 미소를 보여준 메림은 전날에 다듬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소녀의 머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여자끼리 여행하다 보면 가위질도 점차 익숙해지더라고. 록시아는 평소에 삼촌이 잘라주는 거니?"
"예, 세 달 전에도 너무 긴 거 같다고 한번 손봐주셨어요."
아아, 역시나… 그때 즈음에 록시아의 머리 끝부분이 꽤나 거칠어진 느낌이 들었었는데. 하여간에 저 아저씨는 여자의 생명인 머리카락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람.
"음…, 다음번에 자를 때는 내가 다듬어서 더 예쁘게 해 줄게. 록시아, 로덴 아저씨, 그래도 괜찮지?"
"그래 주면 나야 고맙긴 하지."
일전에 록시아의 머리를 자르는 순간에 '이렇게 잘라도 되나?'라는 의문을 여러 번 품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가위질을 했던 로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반가운 제안이었다.
"예! 저도 괜찮아요. 다음번에 잘 부탁드릴게요. 메림 언니."
"그래, 그래. 얼마든지 기대해도 좋아."
록시아 또한 메림의 제안을 듣자마자 냉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덴의 손에 의해 머리를 다듬어진 직후, 이것도 다 주인님이 신경 써준 흔적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기쁘게 받아들이긴 했으나 끝부분이 거칠어진 머리카락이 은근히 속상했으니 말이다.
이후에도 머리카락에 대한 화제로 신나게 떠들면서 식사를 끝마친 세 사람은 제 각기의 방법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다가 순식간에 찾아온 밤을 맞이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 인사를 나눈 뒤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
평상시였다면 메림은 이대로 책을 읽다가 로덴의 방으로 돌격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방문을 잠가둔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이리저리 돌아가던 고개는 낮은 위치에 쪼그려 앉아있던 동생에게 고정됐다.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언제쯤부터 거기 앉아있던 거야?"
"한 30분 정도."
이런 상황에서도 발에 묻은 흙을 최대한 털어낸 마릴은 언니의 손을 붙잡아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서 손님방으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쌍둥이 자매는 신속하게 서로 입고 있는 옷을 바꿔 입었다. 체격이 완전히 똑같으니 자기 옷처럼 딱 맞는다.
"말투가 어색하지 않게 연습은 충분히 해뒀지?"
"응."
"처음에는 좀 아프겠지만 생각보다 금방 괜찮아지니까 너무 겁먹지 마."
"…응."
"아침에도 미리 말했지만 그 오빠는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피임 준비도 철저히 해두고 나서 기다리는 편이니까 임신 걱정은 하지 말고."
"……응."
"좋아. 너도 그만한 나이면 좋아하는 남자의 자지로 처녀 딱지 떼 버려야지. 이대로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로덴 오빠의 방으로 들어가서 확 물어버려. 그 오빠도 새 보지 맛을 보면 정신 차리지 못할 거야."
처녀 딱지에…. 자지랑 보지라니….
마릴은 전날부터 내내 각오했지만 언니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대사와 저런 음탕한 단어들을 들으니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 그녀도 한창때의 여자인 이상 언젠가는 마음에 둔 남자와 몸을 겹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 정도는 했었고.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일 뿐이다.
기다리는 동안 언니의 격려를 받으며 용기를 얻은 마릴은 엄지를 치켜들고 있는 메림을 뒤로하고 혼자서 방을 빠져나와 곧장 로덴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후우우… 후욱… 후…!"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물러날 수 없다. 문 앞에서 다시금 심호흡을 한 뒤에 눈을 번쩍 뜨며 문고리를 스르륵 돌렸다.
이미 상반신을 벗은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로덴을 향해 언니처럼 손을 흔든 마릴은 언니가 쓰던 특유의 헤맑은 말투를 사용했다.
"로덴 씨오빠! 기다렸지~?"
"…씨오빠는 또 뭐냐."
"아…."
마릴의 말투랑 행동은 그야말로 완벽했으나 극도로 긴장한 탓에 이상한 호칭을 붙여버렸다. 뒤늦게서야 실수를 인지한 마릴은 최대한 두뇌를 회전시켜서 지금의 실수를 만회할 대답을 생각해봤다.
"씨… 씨…."
나는 지금 메림이다.
나는 지금 메림이다.
나는 지금 메림이다.
"하참, 뭐긴 뭐겠어? 씨 뿌려 줄 오빠의 줄임말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