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쌍둥이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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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마릴은 그대로 언니와 함께 여관 문을 열어젖혀서 평소에 자주 먹던 저녁을 먹고 평소에 자주 묵던 방을 잡아 2층으로 올라갔다.
쌍둥이 자매가 잡은 방은 소박한 편이다. 비치된 가구는 자그마한 서랍장과 의자 하나, 양쪽에 하나씩 있는 침대가 전부였지만 눈에 거슬리는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니 이 정도면 지친 몸을 달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다.
한쪽에 있는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은 쌍둥이 자매는 조금 전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릴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손으로 옷을 꼼지락거리며 언니를 바라봤다.
"…티가 많이 났어?"
"최소한 내가 봤을 때는 아주 그냥, 좋아하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더라. 정작 로덴 아저씨 본인은 너한테 가르쳐 주는 거에 집중하느라 아직은 잘 모르고 있던 거 같지만."
언니의 말을 들은 동생은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는지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새빨게 졌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고 있는 입술에 침을 적시며 간신히 말했다.
"조금 전에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내가 로덴 씨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 애초에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그러면 내가 시험 삼아 세 가지 물어볼 테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봐."
"응, 알았어."
팔짱을 끼며 어떤 질문을 먼저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한 메림은 동생의 눈앞에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을 펼쳤다.
"첫 번째, 평상시에는 로덴 아저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어?"
"말투랑 행동은 목석처럼 딱딱하지만 늘 정직하고, 가족인 록시아를 언제나 잘 챙겨주는 다정한 사람."
흐음 흐음, 동생의 대답을 평가하듯 고개를 끄덕거린 메림은 다음 질문을 건넸다.
"두 번째, 그 아저씨가 본격적으로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휴가 중에 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고 나서지?"
"응… 아무래도 그때의 일이 가장 컸지. 책에서 나올법한 영웅이나 용사님처럼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 검 한 자루 만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에 동경심마저 들었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거리던 메림은 어비스에서의 낡은 투구를 쓰던 로덴을 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낡은 투구를 쓴 아저씨의 정체를 몰랐던, 러스트라는 이름 모를 검사의 모습을 봤을 당시에는 기사단 출신인 사람이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상상했었지. 마릴, 어비스에서의 그 허여멀건 놈 기억해?"
"오히려 잊어버리기 힘들지."
이미 반년도 더 넘게 지나간 일이지만 그 당시에 쌍둥이 자매는 이곳에서 진짜로 죽겠구나 생각하기도 해서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특히 마릴의 경우는 강화인간의 주먹질에 복부를 집중적으로 가격 당해서 생사를 헤맸었다. 적에게 배를 엉망으로 당한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더듬거렸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
그 모습을 바라본 메림은 동생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냐. 그때 곧바로 기절해버려서 막 그렇게 아프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어. 아무튼 그 괴물이 뭐?"
"로덴 아저씨는 우리랑 다른 모험가 파티가 한꺼번에 덤벼도 당해내지 못한 괴물의 목을 단번에 베어내고, 몸뚱이를 두부처럼 숭숭 썰어버리더라고."
"하얀 괴물을 그렇게 쓰러뜨렸구나. 그것도 생각해 보면 로덴 씨는 나를 두 번 씩이나 구해줬네. …에헤헤."
책 속의 여주인공이 된듯한 낭만적인 느낌을 받은 마릴은 쑥스러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피어났다.
"크흠, 이야기가 딴 길로 새 버렸네. 마지막 질문을 할게. 그 아저씨랑 이야기한다거나 훈련받으면서 중간중간에 가볍게 몸이 닿거나 할 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막 떨리면서도 두근거리고… 이대로 단 둘이서 있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고… 어쩔 때는 서로 손을 잡아봤으면 하는 기분도 들었어…."
답 나왔네.
"세간에서는 그런 기분을 이성으로서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거야. 달리 말하면 첫사랑이지."
내가 딱 그런 마음이니까 아주 잘 알지. 옛날부터 마릴하고는 취향도 대부분 비슷했는데, 이제 보니까 남자 취향까지 비슷했나 보네.
"이게 첫사랑… 이구나."
메림은 똑같은 남자를 마음에 품게 돼버린 동생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자신과 그 남자와의 관계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깊이 고뇌하다가 일단은 빙 돌아보기로 했다.
"로덴 아저씨가 포션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홍등가를 종종 들락거렸던 거 기억나지?"
"아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홍등가에서 돌아다니는 걸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 요즘에는 목격담이 아예 없지만…."
"하여간에 그 아저씨는 여자 경험이 많은 중고품이고, 너는 지금껏 남자경험이 아예 없는 새 거… 아니, 순수한 처녀잖아.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쉽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오히려 로덴 씨의 나이를 생각하면 여자 경험이 없는 게 도리어 부자연스럽지."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각오를 굳힌 메림은 동생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누군가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면 중간에 거울을 놓았다고 생각할 것 같은 구도였다.
"그 아저씨랑 이미 사귀는 사람, 예를 들어서… 너랑 똑같은 날에 태어난 애인이 있다고 한다면?"
현재의 로덴과 메림의 관계는 완전한 애인 사이보다는 주위에는 비밀로 한채 지속적으로 서로 육체관계를 가지는 섹스파트너에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지만 그녀는 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다.
벼락을 맞은듯한 표정을 지은 마릴은 언니가 내뱉은 노골적인 발언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았다.
"메림… 너, 로덴 씨랑…."
"정확히는 로덴 오빠가 러스트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야."
"오빠?"
"그 오빠랑 단 둘이 있을 때만 부르는 호칭이야. 네가 로덴 오빠를 생각하는 감정과 마음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게 된 이상, 더는 숨기거나 속이고 싶지 않거든."
언니의 말을 듣자마자 마릴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놀라움, 이윽고 놀라움이 사그라들면서 그 자리를 채운 감정은 허탈감이었다.
구멍가게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탕을 누군가가 눈 앞에서 날름날름, 핥고 있는 모습을 봐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경우는 그 누군가가 쌍둥이 언니인 메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으로서 마음에 두게 된 남자인 로덴과 이전부터 남녀 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붕어처럼 뻐끔거리던 입술에서 겨우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로덴 씨하고 단 둘이 있을 때는 즐거웠어?"
"응. 여느 때보다도 행복해. 그 오빠랑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마다 너랑 같이 집에서 빠져나오길 잘했다고 저절로 생각할 정도야."
"그거 잘됐네. 모험가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당시에 네가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나중에 성공하고서 괜찮은 남자를 낚아채면 집안 사람들한테 보란 듯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지내겠다고."
내가 늦은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마릴은 상대방에게 고백하지도 못한 첫사랑을 얌전히 접어두기로 하며 애써 밝은 표정을 보여줬다.
어머니가 하는 말에 얌전히 따르기만 하면 마법사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음에도 동생을 지켜주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이 가문의 성을 버리고 한낱 모험가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언니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이네. 어릴 때부터 바보같이 착해빠지기만 해서는.
한편, 메림은 마릴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죄책감을 떠안고 있다. 평소에는 유쾌한 마법사의 가면을 써서 철저히 숨겼을 뿐.
같은 날에 태어난 동생에게서 마법사의 재능을 단 한 조각 조차 남기지 않고 빼앗으며 태어나 버렸다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동생을 향한 죄악감과 책임감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후우!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메림은 동생의 두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입술을 달싹인다.
"우리가 같은 날에 태어난 것처럼 같은 날에 모험가가 되기로 정했을 때 내가 해줬던 말도 기억나?"
"… 앞으로는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뭐든지 함께하자고 했었지."
"그래서 말인데 나하고 로덴 오빠가 이미 그렇고 그런 관계인 상태라고 해도 네가 상관없다고 말한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여자의 행복까지도 마릴하고 함께 공유하고 싶어."
"아…."
마릴은 당장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언니가 이번에 공유하자는 대상이 돈이나 먹을 것도 아니고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다. 아직 그녀에게 일말의 기회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이리저리 교차했다.
"혼란스러운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일단 지금은 잠이나 자자.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지."
아이를 달래주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 메림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마릴은 언니에게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잘 자."
이윽고 메림은 불을 끄고서 반대편에 있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 * *
마릴이 언니와 로덴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알게 된 지 어느덧 닷새가 지나간 날의 밤. 동생은 그 기간 동안 내내 고민했던 마음을 다잡았다.
"메림이 괜찮다면 나도 로덴 씨하고 지금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어."
"결국에 그렇게 대답하는구나 지금까지 혼자서 고민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애썼어. 내 동생."
단 둘만이 있는 방에서 용기 있는 대답을 꺼낸 마릴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은 언니는 그대로 등을 토닥거렸다.
"여러 가지로 고맙고 미안해. … 언니."
"후후, 그 입에서 언니 소리는 오랜만에 듣네. 이왕이면 앞으로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계속 그렇게 불러줬으면 하는데."
"… 실수로 튀어나온 말이니까 잊어버려. 그나저나, 로덴 씨한테는 내 마음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모르겠어.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나를 안 받아줄지도 모르니까 너무 불안해."
그렇다. 사실 지금까지 쌍둥이 자매끼리 서로의 마음만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을 뿐, 정작 떡을 줄 사람인 로덴의 마음은 조금도 확인하지 못했다. 완전히 미지수다.
"괜찮아, 괜찮아. 그 오빠 은근히 섹골 기질이 있어서 네가 고백하면 얼씨구나 하고 꿀떡 삼킬 거야. 자신감을 가져."
그녀는 말을 꺼낸 직후, 어색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라고 말해주고 싶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마냥 확신은 못하겠네. 아무래도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을 때 고백했던 나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
"응…. 그렇긴 하지."
"하지만 걱정 붙들어 매시라! 이런 순간을 위해서 내가 미리미리 준비해둔 물건이 있단 말씀~!!"
동생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메림은 구석자리에 놓아둔 배낭을 뒤적거리더니 찰칵찰칵, 소리가 나는 날카로운 가위를 꺼내 들었다.
씩 웃은 메림은 그 가위랑 마릴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번갈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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