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스승과 제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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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자매를 뒤따라간 끝에 도착한 건물은 모험가 길드다. 조금 더 정확히는 길드에 소속된 주점 겸 식당 구역이다.
태양이 높이 떠오르고 있는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성미가 급한 작자들은 낮이건 밤이건 신경 쓰지 않고 술을 부어마시고 있어서 제법 떠들썩한 분위기다.
길드에 소속된 모험가인지, 아니면 단순한 주정뱅이인지 구분하기 힘든 무리들이 자기들 세상인 양 모험담을 있는 힘껏 부풀려서 떠벌리거나 음담패설을 나누기 바빴고, 테이블마다 놓인 안줏거리와 술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모험가 길드는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혹은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저녁때에 모험가들이 몰리는 경향이 있는데,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점심때인데도 식당 구역에 절반 가까이 자리가 차 있었다.
아는 얼굴의 모험가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건네면서 그 사이를 지나치고, 동그란 4인용 테이블에 자리 잡은 네 사람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는 방향이 점점 모험가 길드랑 겹쳐서 설마설마했지만 진짜 여기로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이 도시에서 지내시는 동안 길드에 붙어 있는 식당은 이용하지 않으셨나 보네요?"
"지금 시간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아침이나 저녁 시간 때의 모험가 길드처럼 지나치게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개인적으로 영 별로야."
"전형적인 아싸의 발언이네. 로덴 아저씨."
조금 전에 성공한 마법에 관해 록시아랑 신나게 떠들다가도 동생과 로덴이 나누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 메림은 얄미운 목소리를 내었다. 로덴은 못 들은 척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경험상, 길드에 딸려있는 주점에서 내놓는 음식은 그다지 기대할만한 게 아니었어."
로덴에게 있어 모험가 길드와 연결된 주점이란… 의뢰 보수를 받고 나서 지갑 사정이 풍족해진 모험가들이 주변의 동업자에게 자랑질하면서 먹고 마시기 위해 존재할 뿐인, 그저 술안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수준의 음식만을 제공하는 공간일 뿐이다.
"맛은 걱정하지 마. 우리도 여기 머물기 전까지 여러 도시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 들러봤는데, 적어도 여기서 내놓는 음식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저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지금까지 이곳의 음식을 맛보지 않았던 로덴과 록시아는 은근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동시에 품게 됐다.
"오,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수수 위주로 만들어진 노란 스튜와 노릇하게 구워진 커다란 닭다리 구이 두 조각, 추가로 신선한 샐러드가 각자의 자리에 먹음직스럽게 놓였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두 사람은 기대 이상의 맛에 감탄했다.
"삼촌이랑 여기 음식은 이번에 처음 먹어봤는데 맛있네요."
"그러게 모험가 길드가 아니라 멀쩡한 식당에서 먹는 느낌이야."
샐러드는 평범했지만 옥수수 스튜는 구수하면서도 달달하다. 특히 기름기가 쏙 빠지도록 잘 구워진 닭다리의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듣자하니까 저희 길드에서 일하는 주방장님이 예전엔 수도의 고급 음식점에서 일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뭐어~ 근거는 전혀 없는 단순한 소문이지만. 그나저나 마릴, 이번 의뢰에서 뭐 재밌는 일은 없었어?"
마릴은 식사를 천천히 이어가면서도 메림의 질문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전날에 겪은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으음…. 실은 어제 나하고 쥬노아랑 대장님. 이렇게 셋이서 토벌 대상을 찾으러 산속 깊숙이 들어갔을 때, 정찰하고 있던 쥬노아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인간하고 오크가 한 개체씩 있는 냄새가 풍긴다고 했거든?"
"응, 응."
"그래서 우린 누군가가 오크한테 공격받고 있는 줄 알고는 셋이서 합의하고 그쪽으로 달려가 봤고, 쥬노아의 말대로 인간하고 오크가 같이 있었어."
메림만이 아니라 맞은편에 있던 로덴과 록시아도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잘 보니까 서로 손을 꼭 잡은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 있지? 그게… 마치 연인처럼 말이야. 참고로 인간 쪽이 남자고, 오크는 암컷이야."
그 이야기를 들은 메림과 록시아는 머리 위에 차디찬 물을 들이부어서 푹 젖어버린 것과 유사한 느낌의 충격을 받았고,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던 로덴은 내심 뜨끔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에라이 지지배야!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하게 해야지."
"아니, 아니, 아니. 진짜야 진짜. 정 의심되면 나중에 쥬노아랑 대장님한테도 물어봐봐."
"…진짜?"
"진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려고 하니까, 둘이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도망가 버린 탓에 자세한 사정은 도통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자기 동생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성격도 아니고 말재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메림은 신기해하면서도 무진장 아깝다고도 생각했다.
"수인이나 마족 하고 사귀거나 부부 사이가 된 인간의 얘기는 몇 번 들어봤는데, 오크가 가능하다는 남자의 이야기는 태어나서 처음 듣네. 그거 평생 안줏거리로 삼아도 되겠어. 나도 같이 봤어야 했는데."
"…후우.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잠깐 의뢰 좀 넣고 돌아올게."
반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기 은근히 불편했던 로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접수창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주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록시아는 조금 전에 메림이 무심코 흘려 말한 말을 제차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메림 언니, 마족 하고 인간이 맺어지는 경우도 있나요?"
"후후, 너도 한창때의 여자니까 이런 얘기에 저절로 관심이 생기는구나? 흔치는 않지만 있긴 해. 그 뭐냐, 서로 사랑한다면 종족의 차이 정도는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거든."
"…그렇군요…."
스승의 대답을 들은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이종족간의 사랑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이 다시 앉은 로덴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잘 먹었어요. 마릴 언니."
"지금까지 몰랐는데 여기 음식도 꽤 괜찮네. 덕분에 잘 먹었어."
쌍둥이 자매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던 로덴과 록시아는 이번에 점심값을 부담한 마릴에게 순서대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우리 길드 음식이 입맛에 맞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요즘에 로덴 씨에게 쭉 신세 지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뭐라도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남는 시간에 알려주는 정도라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나저나, 너는 메림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뭐 하고 있을 거야?"
"평소 자주 묵는 여관에서 쉬고 있다가 다시 가게로 마중 갈 생각이에요. 로덴 씨, 오늘도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로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에게 긍정의 뜻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어차피 다시 방문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우리랑 이대로 같이 돌아가는 건 어때? 원한다면 씻고 나서 빈방에서 쉬어도 괜찮아."
민폐가 아닐까 싶어서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마릴의 모습을 바라보던 로덴은 말을 이었다.
"전날에는 밖에서 야영했으니까 아직 피곤할 거 아냐? 이따가 제대로 배우려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쉬어둬야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잠시 실례할게요."
그렇게 해서 도심지로 들어올 때 함께 행동했던 네 사람은 가게로 돌아올 때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다 함께 되돌아갔다.
* * *
적당한 시간 때에 손님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가게문을 닫은 로덴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릴을 뒷마당으로 데려갔고, 마릴은 곧장 무기를 빼들어서 자세를 잡았다.
로덴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목검 한 자루 만으로 그녀를 상대해줬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마릴의 검은 오늘도 로덴에게 닿지는 못했으나, 전체적인 움직임이 더욱 날카로우면서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가르쳐줄 때마다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참 좋네. 근성이 있어, 너는."
천부적인 재능 자체는 보통의 모험가보다 나은 정도지만 겉모습과 다르게 힘도 좋고, 끈기도 있어서 가르치는 맛이 있단 말이지.
여태껏 누군가에게 검술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던 로덴은 가르침을 받을 때마다 발전하고 있는 마릴의 모습을 바라보며 적지 않은 성취감을 느꼈다.
"허억… 헉…!"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던 마릴은 숨을 거칠게 고르고 있느라 로덴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했다.
잠시 후. 쌍둥이 자매는 가게에서 떠나기 직전, 문 앞에 서있는 두 사람과 인사말을 건네고 있었다. 로덴은 메림에게 다가가 작은 돈주머니를 쥐어줬다.
"자, 어제하고 오늘분의 과외비. 수고했어."
"…로덴 아저씨도 마릴한테 검술을 가르쳐주고 있는데 나만 매번 과외비를 챙기니까 뭔가 좀 미안하네."
"뭐, 시간이 남을 때 간간히 가르쳐주는 정도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양심에 많이 찔리면 다시 돌려주던가."
"아하하, 아저씨가 막상 그렇게 말해주니까 미안한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어."
너털웃음을 지으며 로덴에게 받은 돈주머니를 품속에 넣은 메림은 그의 옆에 찰싹 붙어있던 록시아에게도 다음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덴 씨. 다음에 다시 뵐게요."
"그래. 둘 다 조심히 들어가."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다시금 로덴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 나서 언니와 함께 도심지를, 여관을 향했다.
쌍둥이 자매는 걸어가는 중간중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릴의 입에서 로덴의 이름이 수십 번은 계속 튀어나왔다.
"그래서 있지, 로덴 씨는…"
심지어 그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고, 얼굴이 발그레지는 마릴의 모습을 바라보던 메림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결국에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 지지배도 로덴 오빠를….
최근 들어 마릴이 로덴과 대화하거나 그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보여주던, 첫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과 같은 얼굴을 거울을 통해서 여러 번 봤었던 쌍둥이 언니는 자기 동생이 로덴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한동안 속앓이를 하던 메림은 평소에 자주 묵던 여관에 도착하게 됐을 때가 돼서야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릴."
"응?"
"너, 로덴 아저씨 좋아하는 거지?"
메림의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던 마릴은,
"………!!"
끓어오르는 주전자처럼 열기가 확 올라버린 얼굴을 감싸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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