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45화 (45/149)

〈 45화 〉 스승과 제자 (5)

* * *

그날 새벽.

"으으음냐… 주인니임… 뿔을 그러케 양 손으로 함부러… 망지시면 앙대요… 은근히 민강하니까 좀 더 상냥하게엣…."

…저 아이의 꿈속에 있는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지?

록시아의 방문을 살짝 열어서 세상모르고 잠꼬대를 하는 소녀의 모습을 슬며시 확인한 로덴은 다시 방문을 닫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지하 작업실을 향했다.

여태껏 로덴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조해준 록시아는 약초학과 연금술에 대한 지식을 얇게나마 쌓았지만… 지금부터 다룰 물건은 전문가의 손으로만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로덴이 혼자서 은밀하게 작업해야 한다.

당당한 절차를 거쳐서 얻은 게 아니기도 하고, 록시아 같은 애가 다뤄도 되는 종류의 물건도 아니지. 만에 하나 도움을 받는다 쳐도 최소한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 받는 게 옳아.

그리 생각한 로덴이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식물은 일전에 항구도시에서 페트로그파의 창관을 털어내는 김에 챙겨 온 아샤스 꽃과 줄기다.

이어서 재료를 포함한 준비물을 하나하나 꺼내든 그는 평소보다 호흡기 주변을 신경 쓰며 작업복을 철저히 착용했다.

물론, 로덴의 정신과 육체 레벨이라면 제조 과정에서 흘러나올 마약 성분을 다소 흡수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작업복으로 신체를 보호하는 것은 저항력을 논하기 이전에 약을 취급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다.

방법은 알고 있지만 내 머리에 있는 지식을 너무 자만해도 안 돼. 이번에는 책을 참고해야겠어.

준비를 끝마친 로덴은 인벤토리를 뒤적거려 종이들을 실로 엮은 형태의 책을 꺼내 들었다. 동방의 대륙에서 지식을 쌓을 때 입수한 책이다.

팔락팔락, 그는 책에 적힌 지식과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조합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약품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로덴이 이번에 도전하고 있는 약품은… 흔히들 말하는 미약이다. 물론 안전한 농도로 조절해서 부작용과 의존성이 없게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잠시 후, 신중하게 작업하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한 로덴은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작업복을 벗었다.

"후우우우…! 첨가한 재료들이 충분히 섞이려면 대강 일주일 정도 걸리려나? 다 완성되면 나중에 가벼운 실험 먼저 해봐야겠다."

그리고는 아직은 미완성인 수제품 미약들을 바라보며 음흉한 상상이 머릿속에 치솟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스태미나를 회복하는 포션과 조합한 덕분에 상대방이 저걸 먹으면 쉬이 쓰러지지도 않아서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을 거다.

순수하게 본인만이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물건이다. 애초에 영주의 허가도 받지 않고 몰래 만든 미약이라 팔지도 못한다.

실험을 통해 안전 여부가 확인된다면 미약을 사용할 대상은 당연히 메림.

로덴은 맨 처음으로 그녀와 관계를 맺기 전 까지는 가끔씩 홍등가에 들르는 정도로만 욕망을 해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림과 꾸준히 관계를 가지다 보니 뒤늦게나마 본격적으로 성욕에 불이 붙어 버렸고, 기어코 수제 미약까지 만들어 버렸다.

기왕 얻게 된 귀한 재료인 만큼 가끔씩은 새로운 도전과 자극을 추구하는 것도 괜찮겠지.

약품의 뚜껑을 완전히 닫은 로덴은 시험품들을 담아낸 상자를 최대한 서늘한 구석 자리에 두었다.

주변에 다른 상자들도 같이 있어서 자연스럽고, 평상시에 록시아에게는 상자에 보관 중인 약품은 건드리지 말라고 누누이 이야기해뒀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할 일을 끝마치고 작업복을 벗은 그는 올라가서 씻기 전에 인벤토리에 보관 중인 몇몇 물건들을 점검 및 정리하기로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로덴은 세 번째 루프 이후에 해금된 특성인 인벤토리 덕을 지금껏 참 많이도 봤다.

정식 명칭은 전혀 다르지만 로덴은 인벤토리라는 단어가 훨씬 익숙하기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게 칭하고 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험해봤지만… 크기에 상관없이 살아있는 생물은 보관할 수 없고, 지나치게 부피가 커다란 물건도 넣지는 못해. 용량 제한은 대략 200Kg라서 상당히 넉넉한 편이지.

그 이외에 딱히 이렇다 할 제약은 없다.

보관한 물건을 너무 오래 방치하면 먼지가 쌓이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정확히 꺼내기 위해 나름의 요령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숙달된 로덴이 손만 뻗으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원하는 물건을 꺼낼 수 있으니 거의 만능 배낭이다.

인벤토리를 뒤적거려서 스크롤과 아티팩트들을 꺼내든 로덴은 바닥에 쭈르륵 널어서 하나씩 확인해 봤다.

우선 스크롤들. 괴짜 마녀와의 거래를 통해 얻었던 스크롤 중 소환 마법의 각인이 새겨진 스크롤은 록시아에게 다시 쥐어준 걸 포함하면 세 장 남았다.

만약에 이게 다 떨어진다면 로덴은 그 마녀와 다시 연락을 취해볼 예정이다.

그다음은 인식을 왜곡하는 까마귀, 불완전한 시간의 모래시계, 마력 구동 생체 금속구…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와 용사였던 시절에 사용했던 애검과 방어구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아티팩트를 몇 개 더 소유하고 있었지만 과거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제외하고 비싼 값에 처분했다.

"…이것도 그때 같이 팔아버릴걸 그랬나?"

그리 중얼거린 로덴은 볼링공만 한 크기의 쇠구슬에 쌓인 먼지를 닦으면서 다시금 정보를 확인해봤다.

[마력 구동 생체 금속구 : 손상된 팔이나 다리를 대체할 수 있는 마법 합금을 압축시킨 구체. 착용자의 마나를 연료 삼아 움직일 수 있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일단은 보관 중이다. 보시다시피 인벤토리에서 처박혀서 먼지만 잔뜩 먹고 있는 신세인 아티팩트라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물건은 쓰이는 일이 아예 없는 게 가장 좋은 법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아무튼, 나머지 아티팩트와 애검, 방어구에 쌓인 먼지를 순서대로 닦아낸 로덴은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지하에서 빠져나와 간단히 씻고 나서야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 * *

열흘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로덴을 찾아가 꾸준히 가르침을 받고 있던 마릴은 오늘도 어김없이 장사가 다 끝나가는 포션 가게에 언니와 함께 방문해 지난 훈련의 연장선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시작하자마자 로덴이 보는 앞에서 검과 버클러를 뽑아 들어 자세를 잡고, 허공에 몇 차례 가볍게 휘둘러봤다.

"후… 어떤가요?"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세가 나오게 됐어. 검을 휘두르는 자세도 전보다 깔끔해졌고, 다시 올 때까지 연습 많이 한 모양이네."

"그동안 로덴 씨에게 배운 덕분에 전보다 전체적인 움직임이 훨씬 더 좋아졌어요. 저번에 사냥했을 때, 메림만이 아니라 대장님이랑 쥬노아도 제 움직임을 보며 내내 칭찬하던 거 있죠?"

자신이 가르쳐주는 대로 착실하게 따라준 결과, 의미 있는 성과를 얻게 된 마릴의 모습을 지켜보며 내심 기분이 좋아진 로덴은 가볍게 손뼉을 쳐서 오늘의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슬슬 허공에 칼만 휘두르는 것도 지루하지?"

그리 말하며 미리 준비해둔 목검을 잡아든 로덴은 뭉툭한 칼끝을 마릴에게 향했다.

로덴이 깎아둔 목검은 날도 칼 끝도 전부 뭉툭하게 되어있는, 말 그대로 수련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칼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몽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다.

검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목검을 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뻔하다.

아…, 드디어 로덴 씨랑 검을 부딪힐 수 있겠구나!

어차피 적당히 봐줄게 뻔했지만 형식상으로 나마 실력자와 대련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차오른 마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하나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할 어느 물건을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보아하니 목검을 찾고 있는 모양새인데, 딱 하나만 준비했어. 너는 그냥 지금 들고 있는 무기로 덤벼."

"예? 진검으로 대련을 하라고요?"

"실력을 빨리 늘리려면 목검보단 평소에 휘두르는 무기를 사용해야 효율이 좋겠지. 나는 걱정 마,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검으로 검을 상대하는 게 내 특기니까."

"……알겠습니다."

마릴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이내 각오를 굳히고,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 자세를 잡고 있던 로덴을 바라봤다.

목검을 쥐고 있는 것뿐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상대방은 이미 멋들어지게 뿌리를 내린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흔들림이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든든함과 신뢰감마저 느껴진다.

"아무 걱정 말고 전력을 다해 덤벼도 좋아."

그럼 시작해, 라는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마릴은 로덴에게 달려들었다. 버클러를 들고 있는 손을 쭉 뻗으면서도 횡베기를 시전 해서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공격했다.

카아앙! 목검과 검이 부딪혔음에도 쇠끼리 부딪히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덴이 그 상태에서 목검의 각도를 안쪽으로 기울여 힘을 가하자, 마릴이 쥐고 있던 검은 순식간에 허공에 떠올랐다.

이어서 비어있는 손으로 버클러를 휘두르고 있는 팔을 휘감듯이 붙잡은 뒤에 마릴의 몸을 확 끌어당겼고, 다리를 걸었다.

땅바닥에 쓰러진 마릴은 곧장 일어나려 했으나 목검의 끝부분이 그녀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실력 차이가 너무 명확하니 분한 마음조차도 들지 않았다.

"괴, 굉장하네요. 로덴 씨…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에요."

"최대한 실전처럼 하려다 보니까 조금 거칠게 다루게 됐네. 계속 대련하다 보면 몇 번 더 넘어져야 할 거 같은데, 어때? 괜찮겠어?"

"괜찮아요!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부탁드립니다!"

"좋아, 다시 일어나서 자세 잡아."

"네!"

노력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로덴도 마찬가지라 여전히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마릴의 자세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마릴의 몸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열 번은 족히 넘게 땅바닥을 굴렀다.

"하아… 하아아…!! 하아…!"

마릴은 상대방의 반격을 염두하며 다시 덤벼들 때마다 더욱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줬지만, 번번이 카운터를 당하거나 오히려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급소를 찔리는 등, 그녀의 공격은 로덴에게 단 한 번도 닿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무기를 휘두르고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니 마릴은 진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땅바닥에 힘없이 누워있던 그녀는 온몸에 진주처럼 투명한 땀이 흘러내렸다. 반대로 로덴은 땀 한 방울은커녕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은 쉬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터프하네. 오늘은 특히 고생했어."

목검을 내려놓은 로덴은 마릴이 쉽게 일어날 수 있게끔 손을 뻗었다.

"앗…, 지금은 땀범벅이라서 지저분해요."

"수련의 성과로 흘린 땀이 뭐가 지저분해? 신경 쓰지 말고 내 손 잡고 일어나."

마릴은 로덴의 말을 듣고 나서 기뻤으나 감정과는 별게로 여전히 망설여졌다.

로덴 씨는 몰라도 나는 신경 쓰이는데….

"…네. 오늘도 고맙습니다."

상대의 호의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마릴은 부끄러움을 감추며 내민 손을 잡아서 일어났고, 그녀는 로덴의 몸에 살며시 기댄 상태로 함께 가게 문 앞까지 걸어갔다.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클린!""클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림과 록시아는 땀과 먼지 범벅이 돼있는 마릴과 마주치자마자 미리 준비한 클린 마법을 시전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용해서 그런지 효과는 굉장했고, 마릴은 순식간에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고마워."

"로덴 아저씨도 참… 적당히 좀 봐주면서 하지."

"그러면 훈련이 안 돼. 이것도 나름대로 신경 쓴 거라고."

"아, 그러셔?"

메림이 로덴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하고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툴툴거리는 느낌이 잔뜩 들었다.

하지만 내일 밤이 지나간다면 메림은 한동안 다시 순한 양처럼 변할 것이다.

내일은 메림이 록시아를 가르쳐주기 위해 로덴의 가게에 아침부터 방문하는 날이다. 그 말은 즉 밤에 그녀와의 은밀한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덴은 얼마 전에 실험 검증을 끝마친 미약을 저 건방진 태도와 말투의 마법사에게 사용해볼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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