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스승과 제자 (4)
* * *
"어머, 이 가게에 귀여운 종업원도 같이 있다고 하더니…."
로덴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쥬노아는 살며시 시선을 돌려 록시아를 바라보고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면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쥬노아 언니, 록시아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
쥬노아는 소녀 하고도 스스럼없이 악수를 나누었다.
북슬북슬.
처음으로 수인의 손을 만지게 된 록시아는 푹신푹신한 털의 감촉에 그만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후후, 간지러워 얘."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소녀의 사과를 넉살 좋게 웃으며 받아준 수인은 딱히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의 양 옆에 있던 쌍둥이 자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오늘 임무를 끝내고 나서 여기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니까…"
"쥬노아가 따라오겠다고 하더라고."
"여기 지내면서 아직 포션이 필요한 일은 없어서 굳이 방문은 안 했었는데, 일단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움직이기 편하게끔 개량된 도복 위에 급소만을 가리는 가죽 덮개를 걸치고 있던 쥬노아의 목에 걸린 인식표는 다소 밋밋해 보이는 강철이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진열대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맨 오른쪽에 위치한 포션을 하나 집어 들었다.
"만약을 위해 효과 좋은 걸로 하나 장만해야겠네요. 꼬마야 이건 얼마니?"
"중급 포션이니까 은화 다섯 닢이에요."
참고로, 로덴의 가게에는 기본적으로 중급 포션 까지만 진열하고 있다.
상급 포션부터는 재료가 상당히 귀한 편이기도 하고 이런 변두리 영지에서 상급 포션의 비싼 가격을, 은화 50개를 부담할 수 있을 만큼 벌이가 좋은 모험가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덴은 비상용으로 인벤토리에 한 두 개의 완성품을 쟁여두었으며, 만에 하나 제작 주문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상급 포션의 재료들도 작업장 깊숙한 곳에 보관 중이다.
"흐음~ 여기는 중급이 은화 다섯 닢이구나."
짤그랑.
하여튼, 품속을 뒤적거려서 꺼낸 은화 다섯 닢을 소녀에게 건네준 쥬노아는 구매한 포션을 몸에 대각선으로 걸치고 있던 보따리 같은 것에 조심스럽게 보관했다.
이후로 같은 여자들끼리 짧은 잡담을 나눈 쥬노아는 가볍게 몸을 풀면서 나갈 채비를 했다.
"일단 궁금증도 해결했고, 포션도 장만했으니까 난 먼저 가볼게. 다음에 보자."
"바이~!"
"다음에 또 봐."
"안녕히 가세요."
수인이 떠나가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포션 가게의 [영업중] 간판은 완전히 뒤집어지게 됐다. 로덴은 곧바로 기본기 수업을 시작할까 하다가도 잠시 수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보아하니 너희의 새 동료인 수인은 무투가인 모양이더군."
"바로 알아보네. 아저씨, 쟤 복장이 무투가 티가 많이 나긴 하지."
"삼촌, 무투가는 무기 없이 맨주먹만으로 싸우는 사람들이죠? 처음 봤어요."
"응. 제법 희귀한 편이야."
순수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적들을 상대하는 고행자를 칭하는 무투가를 제법 오랜만에 보게 된 로덴은 내심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무기가 없는 인간보다 과도 한 자루라도 쥐고 있는 인간이 훨씬 유리한 건 아이도 알만한 상식이다. 기본적인 데미지와 리치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니까.
그런 이점을 굳이 포기하고 무기 없는 맨손 격투를 고집하는 게 다소 병신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쪽 세상에 마나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이상 완전히 바보짓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물리 계통의 마나나 오러는 무기보다는 본인의 육체에 훨씬 더 잘 흐르게 돼있어서 맨주먹의 공격력이 날카로운 무기보다 더 높아지는 모순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쥬노아가 실력은 확실한데 아직은 실적이 부족해서 강철 등급인 상황이에요."
"무리도 아니지. 아무래도 무투가는 맨손으로 싸우는 만큼 마나를 몸, 특히 양손에 자유자재로 두를 수 있을 수준이 될 때까지 주구장창 수행만 하는 독종들이니까… 아, 수인들은 한번 친구라고 생각한 이들에게는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종족이니까 최대한 좋은 동료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만난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미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나란히 대답하는 쌍둥이 자매를 보며 수인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로 한 로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릴을 바라봤다.
"일단 평상시에 무기를 어떻게 쥐고 있는지 뒷마당에서 확인해 보자. 뭐가 됐든 기본자세가 가장 중요하거든."
"최선을 다 할게요. 로덴 씨."
메림과 록시아를 가게에 남겨둔 상태로 뒷마당으로 걸어간 마릴은 아밍 소드와 버클러를 꺼내 들어서 평소의 자세를 잡았다.
"어느 정도 무기를 다뤄본 티는 나네. 그대로 가만히 있어봐."
마릴의 주위를 바다의 상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모든 각도로 면밀히 관찰한 로덴은 그녀에게 다가가 눈 앞에 섰다.
서서히 팔을 올린 로덴의 손가락 끝이 향한 것은 마릴의 왼손에 쥐어진 아밍 소드다.
"저번에 봤을 때도 생각했던 건데, 마릴은 왼손잡이야?"
인간의 주요 급소 중 하나인 심장부를 조금이라도 빠르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왼손에 방패를 드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로덴이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오른손잡이긴 한데요. 그게 있죠…"
주로 상대하는 게 같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왼손에 방패를 들었겠지만 모험가의 가장 주된 적은 마물. 심장을 정확히 노리는 경우는 드물다.
마물의 강렬한 공격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가드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완력이 강하면서 움직임이 좋은 오른손에 방패를 들고 있다. 라는 게 마릴의 주장이다.
"아… 듣고 보니 야생 동물에 가까운 마물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입장이라면 그게 더 좋긴 하겠어."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걸 가정하고 검술을 익혔었는데 이런 게 관점의 차이라는 건가.
"물론, 왼손으로 검을 다루는 역할도 확실히 할 수 있게끔 계속 노력했어요."
"그거 믿음직하네."
어째서 마릴이 오른손에 방패를 들고 왼손에 검을 들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해결한 로덴은 그녀의 자세를 하나하나 고치기로 했다.
처음은 하반신부터.
"일단, 다리 간격을 조금 더 벌리면서 왼다리를 뒤로 살짝 빼."
"이렇게 말이죠?"
"그래. 지금 뒤로 물린 왼발의 각도를 대각선 방향으로 해둬. 그래야 밸런스도 더 안정적이고 네가 왼손에 쥔 검을 휘두르기도 훨씬 자유롭거든."
"예."
"지금은 너무 치우쳐졌어 조금 더 안쪽으로 바꿔봐."
어째서 이래야 하는가에 관한 이유를 세세히 설명해주면서 마릴의 다리만이 아니라 뒤이어 골반과 허리의 자세도 고쳐줬다.
결과적으로 마릴의 하반신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게 몸을 지탱하게 됐다.
뒤이어 수정해야 하는 건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양 팔이다.
"흐음,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 왼쪽 손목은 조금 더 아래로 기울여."
"이렇게요?"
"조금 달라. 양쪽 다 과하게 움직였잖아."
"그,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될까요?"
말로만 하는 설명으로 충분했던 하반신과 달리 무기를 들고 있는 손목의 각도도 정교하게 신경 써야 하는 만큼 팔의 자세를 고치는 것은 영 쉽지 않았다.
여러 번 수정해주면서 처음보다 훨씬 나아지긴 했으나, 로덴의 기준에서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번에도 아냐…. 차라리 직접 고쳐주는 게 훨씬 빠르겠어."
"햣?!"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리면서 마릴의 옆자리에 바짝 다가온 로덴은 살짝 손을 봐야 한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직접 위치와 각도를 정확하게 조정해 주었다.
마릴은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손목을, 팔을 만지고 있는 두 손과 상대방의 눈을 번갈아 봤지만… 로덴의 얼굴은 사심 한 조각 없이 순수하게 검을 가르치는 자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혼자 부끄러워져서 체온이 살며시 올라가면서도 심장의 두근거리는 느낌이 몸에서 머리로, 이성으로 전해졌다.
"좋았어. 느낌은 좀 어때?"
"굉장해요. 자세를 살짝 고쳤을 뿐인데, 훨씬 안정적이면서도 지금 상태면 얼마든지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솟아요."
"그거 다행이네. 일단 지금의 자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공격도 방어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자세니까 습관적으로 이 자세가 나올 수 있게끔 연습해두자."
"지금 당장이라도 검이든 방패든 한번 휘둘러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호전적인 성격은 아닌 마릴이 이토록 무기를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전혀 달랐다. 마치 새로운 장비를 마련했을 때의 두근거리는 감각과 비슷했다.
로덴은 그녀가 무슨 기분인지는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기를 뽑을 때 지금의 자세가 저절로 나오기 전까지는 안 돼. 조금만 참아봐."
"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을 듣게 된 마릴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으나 로덴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르기로 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결심했을 때 지도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기로 했으니까.
이후로 무기를 집어넣을 때는 정자세로 바꾸다가 뽑는 순간에 로덴이 교정해준 자세를 취하는 것을 해내기 위해 같은 동작만을 반복했다.
물론 중간에 자세가 영 신통치 못하면 로덴이 마릴의 손목이나 팔, 가끔씩은 다리나 허리도 직접 교정해준다. 그녀는 로덴과 몸이 닿게 되는 순간마다 동공이 마구 흔들리고, 호흡이 가빠지려 하는 것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그렇게 해서 마릴이 로덴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첫날은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자세를 교정하는 것만을 끝없이 반복했다.
"벌써 이런 시간이 됐네.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도 여유가 되면 오늘 같은 시간대에 언제든지 다시 찾아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덴 씨."
"자세가 어느 정도는 나오게 됐으니까 실전에서 바로 응용해도 괜찮을 거야. 아직 완전한 건 아니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을걸. 오늘 배우느라 수고했어."
"네! 로덴 씨도 고생하셨어요."
밝은 표정으로 미소 지은 마릴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그녀의 언니인 메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은 끝났어?"
"응."
메림은 가게 뒤편에 있는 창문 활짝 열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태였는데, 조금 전까지 이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록시아와 함께.
가게 문 앞으로 모인 네 사람은 헤어지기 전에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었다.
"로덴 씨, 다시 말하지만 오늘 가르쳐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일어난 마릴은 배낭을 뒤적거려 자그마한 보따리를 건네줬다. 안에는 한입에 쏙 들어올만한 쿠키가 여러 개 들어있었다.
"약소한 답례지만 도심지에 있는 제과점에서 사 온 과자예요. 이따가 록시아 하고 천천히 드셔 보세요."
"고마워. 다음에 또 보자."
그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메림과 록시아는 평소보다 밝으면서도 살짝 발그레진 마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
"……."
메림과 록시아의 눈매가 유독 날카로웠다.
두 여자가 마릴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생이나 친한 언니를 바라보는 평소의 시선이 아닌… 미래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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