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스승과 제자 (3)
* * *
마왕 토벌을 위해 구성된 7인의 토벌 대원은 알트마 왕국에서 엄선한 인재들 답게, 하나하나 손꼽히는 실력자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촤아악!
"커어억?!"
"갑자기 이게 무슨!!"
그 일곱 명과 비교하면 가히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검성이자 용사가 최종 목적지 앞에서 돌변하며 토벌대에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토벌대는 뒤늦게나마 오러가 깃든 철퇴와 검과 창, 그리고 막강한 마력을 쏟아낸 주문들로 반격해 봤으나 미약한 저항에 불과했다.
전성기의 용사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검으로 받아치면서 대원들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쓰러뜨렸다.
"으읏…! 그 와중에 몇 군데 부러져 버렸네? 씨발놈들이… 곱게 좀 뒤질 것이지."
그나마 힐러년을 먼저 죽이고 시작해서 수월하게 끝난 건가.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지금까지 동료라고 믿어왔던 자들의 시체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미리 구비해둔 포션을 쭉 들이켠다.
이 모든 행위는 용사가 미쳐버리거나 동료들을 배신한 결과가 아닌, 자신의 생존과 저번 회차의 복수를 위해서다. 용사는 후련함을 느끼면서도 의아함도 같이 느꼈다.
지금까지는 예외 없이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었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꼴랑 하루 전으로 돌아갔던 거지? 마지막 루프라서 다른 건가? 덕분에 곧바로 복수할 수 있어서 편하긴 했지만…
용사는 한동안 고민해 봤지만 결국 이렇다 할 명확한 답은 찾지 못한 채 토벌대의 시체에서 쓸만한 물건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모든 작업을 끝낸 용사는 마왕 토벌대의 유일한 생존자로 만들, 기절해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신감에 몸을 맡기고 동료라 생각했던 대원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와중에도 차마 죽이지 못한 여자다.
용사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밧줄로 그녀를 꽁꽁 묶어서 둘러업은 뒤, 마왕이 기다리고 있을 알현실로 향했다.
"……."
옛날 꿈 때문에 새벽시간에 눈을 떠버린 로덴은 오랜만에 생각난, 거짓된 옛 연인의 가짜 이름을 무심코 중얼거렸다.
"필리아…."
* * *
보름 만에 집에서 아침을 맞이한 로덴과 록시아는 전날에 널어둔 옷과 집을 비운 사이에 쌓여버린 먼지들을 치워내며 시간을 보냈고, 점심시간 때가 한참은 지나고 나서야 가게를 방문한 상단의 직원들에게 재료를 건네받았다.
"후우…! 저희 상단만이 아니라 인근 시장과 상인들을 통해 물건들을 최대한 긁어모으느라 조금 늦었네요. 일단 당장 전해줄 수 있는 재료들은 이게 전부입니다."
"어제 막 주문을 넣었으니 이만큼 구해와 주신 것도 감지덕지죠. 이 정도면 대략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다시 배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새로이 추가 주문을 넣으면서 돈주머니를 건네준 로덴은 직원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때는 유리병들도 같이 구해줬으면 합니다."
"예! 저희 홀름 상단만 믿어 주십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직원들이 떠난 뒤, 재료들을 챙긴 두 사람은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 약초들과 약품을 섞어내는 작업을 하고 나서 얻어낸 결과물들을 자동 배합기에 순서대로 부어 넣었다.
"다시 일할 시간이다."
3류 악당 같은 느낌의 대사를 내뱉은 로덴은 레버를 붙들고 있는 록시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끄으읏~!"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레버를 당기자, 자동 배합기가 서서히 움직였다. 거의 보름 만에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제 절반 이상은 했네. 다음날 아침에 솥만 끓여주고 마무리 작업만 해주면 예정대로 내일 오후에 다시 가게를 열 수 있겠어."
"내일은 손님들이 많이 오겠죠?"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오늘 아침만 해도 모험가들 몇몇이 가게 주변을 기웃거렸잖아."
두 사람은 계속 떠들면서도 작업하는데 쓰인 비커들을 간단히 세척하여 대강 마무리를 지었고, 곧장 올라가서 저녁 식사를 만들기로 했다.
메뉴는 볶음밥. 메인은 계란이다.
항구도시에서 오래간만에 다시 밥을 먹게 된 로덴이 기어이 미련을 못 버리고 그곳의 시장에서 쌀을 제법 많이 챙겨 왔었다.
맨 처음에는 항아리에 보관하고 있는 쌀, 3인분을 푸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선 로덴이 밥을 먼저 하고 나서 잠시 기다린 뒤, 록시아가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적절량의 식용유를 부었다.
"주인님, 지금 파를 넣어주세요."
"응."
로덴이 잘게 썬 대파를 집어넣은 뒤, 록시아가 그것을 달달 볶아주면서 파기름을 만들어냈다.
휘릭 휘릭!
그녀는 이어서 달걀물을 쏟아부어 주걱으로 휘저어서 스크램블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대파와 섞이게 해서 노릇하게 볶아준 뒤에 구석에 몰아넣고서 주인을 올려다봤다.
"주인님, 간장은 어디 두셨죠?"
"여기."
"고마워요."
치이이익!
로덴에게 간장을 건네받은 소녀는 반대쪽에 졸여낸 간장을 스크램들에 섞어주며 약간의 소금도 같이 넣어줬다.
"주인님, 이제 밥을 올려주세요."
"흣차!"
로덴이 갓 지어낸 3인분의 밥을 집어넣자, 록시아는 곧장 주걱을 세워서 모든 재료와 양념이 잘 섞일 수 있게끔 골고루 섞어주며 불향이 살짝 입혀질 만큼 절묘한 솜씨로 볶음밥을 만들어냈다.
"볶음밥은 휴가 때 한 번만 알려준 건데 벌써 능숙하게 조리하네…."
"어디까지나 주인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런 걸요. 이제 다 됐으니까 자리에 앉아 계세요. 금방 떠올게요."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최근에 록시아의 요리에 관한 재능이 뒤늦게 꽃을 피우게 됐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아예 처음 만들어보는 종류의 메뉴가 아닌 이상 요리를 할 때마다 지금처럼 로덴이 그녀를 옆에서 보조하고 있는 신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기가 조금 많이 차이나는, 샛노란 볶음밥 두 그릇이 테이블 위에 놓이게 됐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식기를 들었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을게."
불맛이 딱 알맞게 스며들어간, 고소한 계란 볶음밥은 씹으면 씹을수록 식욕을 돋워낸다.
단적으로 말해서 굉장히 맛있다. 예를 들어 로덴이 만든 작품보다 훨씬 더 말이다. 그는 입이 즐거워지는 정도에 비례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냄새부터 남다르다 싶더니… 가르쳐주는 데로 잘 배워줘서 기쁘긴 한데 뭔가 분한 기분이 드는 걸 멈출 수가 없네.
"주인님, 표정이 안 좋으신데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맞은편에서 주인의 미묘한 표정을 귀신같이 포착한 소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라며 걱정하고 있는 기색이 영력 하다.
"아니, 아니. 록시아가 지금 해준 볶음밥은 맛있어. 진심이야. 그냥 내가 했던 거랑 비교하다 보니까 표정이 이렇게 됐던 거지.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해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요리는 나름 자신 있었는데, 단번에 추월당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뭔가 면목 없네요."
"면목 없긴, 단순히 내가 아직 속이 좁아서 이렇게 된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로덴은 자신의 옹졸함을 반성하며 밥을 마저 먹어치웠다.
음, 역시 맛있네. 나중에 커서 번듯한 식당을 차리면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는데.
그는 록시아의 요리실력에 다시금 감탄하며 금방 식사를 마무리, 뒷정리를 시작했다. 당연히 록시아는 주인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쉬게끔 반강제로 앉혀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덴은 다 닦은 접시들을 나란히 뒤집어 놓으며 앉아있는 소녀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이번에도 잘 먹었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도 지금처럼 같이 요리해요. 주인님."
"그러자."
다가오는 주인의 품에 강아지처럼 가볍게 안겨든 록시아는 머리를 살며시 내밀었다. 칭찬을 바라는 모양이다.
로덴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손은 이미 소녀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었다.
사과가 중력에 의해 떨어져서 나무 아래에 있는 인간의 머리 위에 올려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여담으로 지금의 록시아는 마족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그녀는 은근슬쩍 머리를 기울여서 로덴의 손을 자신의 뿔에 닿게끔 유도했다.
"뿔을 또 만져도 괜찮은 거야? 어제는 반응이 뭐랄까…."
야리꾸리했지.
"아하하… 어제는 다른 사람이 제 뿔을 그렇게 만지작거린 경험을 처음 해봐서 조금 놀랐었는데, 뿔이 살살 긁히는 감각이 은근히 시원하더라고요."
얼굴을 붉히며 자기 손으로 뿔을 살살 매만진 록시아는 번뜩였다는 얼굴로 한 가지 알기 쉬운 예시를 들었다.
"뭐라고나 할까 인간인 주인님이 이해하기 쉽게끔 비유하자면 귀이개로 살살 긁는 느낌하고 비슷해요.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요."
"가슴에 확 와닿는 표현이네."
"그렇죠? 그러니까… 이번에도 한 번만 더… 어떠세요?"
본인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원한다고 하면 로덴이 거리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참, 어제처럼 너무 정신없이 만지지는 마시고 천천히 맨 끝에서 반대쪽까지 긁어주시면 더 기분 좋을 거 같아요."
"크흠! 흠. 조심할게."
록시아의 입에서 '정신없이'라는 단어를 들은 로덴은 무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한 손으로만 그녀의 뿔을 만지기 시작했다.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록시아의 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은근히 매끈매끈한 느낌과 손톱으로 살살 긁을 때의 울림은 각별했다.
"흐으응…."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한 록시아가 무심결에 신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었다.
옛날에 썩둑 잘라뒀던 마왕 아저씨 뿔은 그냥 쇠몽둥이 같았는데. 마족의 뿔은 나이나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건가.
로덴은 인벤토리 구석자리에 처박혀 있는 전대 마왕의 뿔을 떠올려보면서도 록시아의 뿔을 천천히 매만졌다.
세상만사가 늘 그렇듯이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가 소녀와 천천히 거리를 벌렸을 때, 전날과 달리 적당히 조절한 덕분에 록시아는 얼굴을 살며시 붉히기만 했을 뿐이다.
"후우우… 뭐랄까 너무 개운한 느낌이에요. 주인님, 이렇게나 좋은걸 여태까지 몰랐다니… 인생 절반 손해 봤어요."
"기분 좋았다면 다행이네. 다음에도 해줄까?"
"네, 언젠가 또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 제 뿔을 만져주시면 기쁠 거 같아요."
뿔에 관한 이야기는 그쯤에서 마무리한 두 사람은 화제를 돌려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두워진 외곽 구역을 산책하면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은 예정대로 오후부터 포션 가게가 다시 열리게 되자, 미리 대기하고 몇몇의 모험가들과 임무를 끝마치자마자 가게에 방문한 모험가들을 상대하느라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또 다음날. 평소보다 많은 손님들이 방문해서 제법 바빴지만 전날보다는 비교적 여유로웠다.
가게를 닫을 시간이 점차 다가올 때쯤.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는 쌍둥이 자매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옆에 같이 동행하고 있는 수인이다.
"흐음, 여태까지 포션 가게는 딱히 방문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있구나… 그쪽이 로덴 씨 맞죠? 만나서 반가워요."
중얼거리면서 가게를 구경한 고양잇과 계열 수인의 시선은 로덴에게 향했다.
"저는 쥬노아라고 해요. 얼마 전부터 얘네들이랑 파티를 하고 있는 사이죠."
자신을 쥬노아라고 소개한 수인은 북실북실한 털로 뒤덮인 손을 내밀었고, 로덴은 흔쾌히 상대방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다시 한번 설명하지만 털이 북슬북슬한 손이다.
이쪽 세계의 순혈 수인들은 혼혈과 달리 사람의 모습에 동물귀와 꼬리만 달려있는 외형이 아니다.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골격은 인간하고 유사하나 기본적으로 동물에 매우 가까운 외형을 하고 있는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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