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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42화 (42/149)

〈 42화 〉 스승과 제자 (2)

* * *

마릴에게 몇 가지 전투술을 알려주겠다는 로덴의 이야기를 들은 쌍둥이 자매는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다가도 언니인 메림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로덴 아저씨. 설마 내 동생한테 작업 거는 거?"

"사람을 뭘로 보고… 조금 전에 마차에서 얘한테 계속 지적질만 했으니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직접 알려주려는 거지. 말뿐이면 누구나 할 수 있잖아."

"흐응…."

메림은 어째 영 못 미더워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편, 마릴은 우물쭈물해하는 몸짓으로 로덴을 올려다봤다.

"로덴 씨 같은 경지의 검사분에게 배울 수만 있다면 저야 무조건 좋긴 한데 그… 뭘로 답례를 해야 할지 솔직히 짐작도 안가네요."

그녀는 로덴의 실력을 알게 된 이후로 그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었지만, 막상 지금처럼 제안을 받아보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술은 곧 재산이나 다름없고, 세상만사 어느 것이 되든 간에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에게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차이는 교양과 상식만이 아닌, 전투력에도 적용되는 법.

끽해야 길거리에서 막싸움이나 하던 뒷골목 잡배들은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 칼잡이를 절대로 당해낼 수 없다.

여행들에 각종 마물들과 경우에 따라서 괴물보다 더 위험한 인간들까지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 험한 세상에서 검술과 마법은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배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록시아에게 주기적으로 마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메림만 해도 록시아의 보호자인 로덴에게서 상당히 쏠쏠한 과외비를 꾸준히 받고 있다.

더군다나 가르쳐주는 사람의 실력에 비례해 대가가 더욱 커지는 게 당연한 만큼 마릴은 로덴 정도의 실력자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나오기 전의 시절이었으면 또 몰라도… 동 등급의 모험가인 지금으로서는 그만한 돈은 지불할 수 없을 거 같은데.

그런 고민에 빠져있던 마릴의 표정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로덴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답례는 됐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고 서로 여유로운 시간에 기본기 정도만 알려주는 거니까. 그래서, 대답은?"

"그러면…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 기본기라도 좋으니 로덴 씨에게 꼭 배우고 싶어요."

"좋아, 내일모레까지는 우리도 좀 바쁘니까. 삼일 뒤부터 가게를 닫는 시간이랑 밤이 되기 전까지의 시간 사이에 방문하면 그때 시작하는 걸로 하자."

"네! 그 시간이면 저도 부담 없을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메림은 다음에 다시 만날 때 로덴에게 기본기를 배우기로 결정했다. 쌍둥이 자매가 가게에서 떠나가기 직전, 로덴은 그녀들을 한번 더 불러 세웠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바로 모험가 길드로 가는 거지?"

"한동안 실컷 놀았으니까 다시 거기서 벌어야지."

"돈도 돈이지만 승급을 위해서 꼭 필요한 실적도 꾸준히 쌓아줘야 하니까요."

"그러면 마주치는 길드 사람들한테 간간히 이야기나 전해줘. 내일모레의 오후부터 포션 가게가 다시 열릴 거라고."

"알았어."

"네."

동시에 대답하며 나란히 고개를 끄덕인 쌍둥이 자매는 평소에 가게에서 떠날 때처럼 손을 흔들거리면서 도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일단은 짐들 먼저 정리하고 그간 입었던 옷들도 제대로 빨아서 밖에 널어두자."

"네, 주인님. 그런데… 짐 정리는 그렇다 쳐도, 옷은 굳이 빨지 말고 제가 클린을 몇 번 사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사고방식이 제법 마법사다워진 록시아의 눈높이에 맞게끔 자세를 낮춘 로덴은 그녀에게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수고를 들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록시아의 말대로 마법을 쓰면 훨씬 간편하면서 효과도 좋겠지만, 사람은 너무 편리한 것에 의존하면 점차 게을러지게 돼있어. 가끔씩은 자기 손으로 빨고, 밖에 널어서 햇빛과 바람으로 자연스럽게 말리기도 해야지."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그렇게 대단하게 포장할 만한 건 아니고 단순한 고집 같은 거야. 오늘 피곤하다면 네가 말한 대로 마법으로 빨리 끝내도 괜찮아."

"아니에요. 이대로 같이 정리해요. 주인님."

록시아는 그대로 주인과 함께 배낭을 정리하고, 휴가를 즐기는 동안 입었던 옷과 수영복을 천천히 빨기 시작했다. 겨우 두 명분의 짐과 옷이라서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가게 옆에 세워진 건조대의 줄을 팽팽히 당겨서 빨랫감을 깔끔하게 널어둔 두 사람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당장 할 일을 마무리지었다.

"이제 도시에 볼일이 좀 있는데… 너는 집에 있을래? 아니면 같이…."

"주인님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그래."

곧장 가게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중간중간에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도심지를, 시장을 지나가 홀름 상단을 방문했다.

"오,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여행은 잘 갔다 오셨습니까? 로덴 씨."

"저도 반갑습니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요."

상단의 간부는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맞이해줬고, 록시아를 내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옆에 귀여운 조카 분도 데려오셨군요. 여기 앉으세요."

이후로 그와 안부를 주고받은 로덴은 내일까지 구해다 줄 수 있는 만큼의 약초들과 기타 재료를 배달해 달라고 주문하면서도 소소한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던 록시아는 상단 사람이 건네준 다과를 오물거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창때의 나이라 그런지 다시 만나게 될 때마다 어엿한 레이디가 되어가고 있군요. 같이 지내는 입장에서 참 뿌듯하시겠어요."

"하하. 늘 같이 지내서 그런지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자랐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긴 합니다."

듣고 보면 확실히 무럭무럭 자라긴 했지. 시간이 빠르게 가는 건지, 이 아이가 빠르게 자라는 건지… 영 구별이 안가.

록시아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본 로덴은 이 소녀를 너무 애 취급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는 간부와 나누고 있던 잡담을 마무리하고 건물에서 나왔고, 맞은편에 위치한 모험가 길드에서 일하고 있던 접수원에게 미리 준비해둔 재료 수집 의뢰서와 의뢰금을 내밀었다.

이걸로 당장 필요한 재료 주문은 다 했다.

"후우… 상단에 의뢰한 재료는 내일 도착할 예정이니까,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

"고생하셨어요. 오늘은 도시에서 먹고 돌아가는 건가요?"

"응. 요리까지 하기에는 우리 둘 다 은근히 지쳐있잖아. 집밥은 내일 먹자."

"네, 주인님."

그렇게 시장을 조금 더 둘러보다가 적당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져 있었다.

로덴과 록시아는 곧장 문을 걸어 잠그고서 창문 커튼도 닫아두었다. 그런 다음에야 록시아는 늘 끼고 있던 반지를 쏙 빼냈다.

"후아아~! 이제야 한결 편해졌어요. 막 불편한 건 아닌데 이 해방감에 빠져든다고나 할까요."

소녀는 오래간만에 마족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됐다.

"옛날 생각나네. 그 반지를 끼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해방감이 뭔지 잘 알지."

"그러고 보면 주인님은 이 반지를 사용해서 어떤 종족으로 변하셨던 거예요?"

"너하고 같은 마족. 예전에 여행하다가 마계국에서도 몇 달 지냈던 적이 좀 있었거든."

"아, 그래서 주인님이 마족어를 구사하실 수 있었군요."

저랑 같은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주인님은 어떤 모습일지….

록시아는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로덴과 나란히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본다.

마족 남녀가 사이좋게 손잡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얼굴이 저절로 헤실헤실 해졌다. 주인에게 그것을 애써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수그렸다.

로덴은 그녀의 행동을 피로함의 표현으로 이해하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온 날에 이거 저거 정리하고, 도시도 좀 돌아다니느라 피곤하지? 오늘은 일찍 자자".

"네."

스윽스윽.

진짜 훌쩍 자라긴 했네. 맨 처음에 쓰다듬었을 때 손 높이도 지금보다 훨씬 낮았는데.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녀의 성장을 다시금 체감한 로덴의 시선은 마족의 혈통을 상징하는 뿔을 향하고 있다.

가만 보면 뿔도 미묘하게 커졌다는 느낌이 들고 뭐랄까 굉장히….

짙은 검은색을 띠면서 일정한 주름이 새겨져 있는 록시아의 뿔은 한 손으로 잡기 딱 좋아 보이게 휘어진 형태다. 저걸 만지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머리에 뿔이 돋아나 있는 종족은 굉장히 높은 확률로 그 뿔을 일종의 자존심이나 명예로 상징으로서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기에 로덴은 지금껏 록시아의 뿔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로덴은 록시아의 뿔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고, 순간적인 충동을 주체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록시아, 조금 만져봐도 괜찮을까?"

"쥬, 쥬인님?! 어딜요?"

순간적으로 엄한 상상을 해버린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혀를 살짝 깨물어 버렸다. 로덴은 뒤늦게나마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발언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부족한 설명을 보충했다.

"이상한 뜻은 아니고 뿔을 좀 만져봐도 될까 해서."

"아… 뿔을 만지고 싶으세요?"

주인의 보충 설명을 듣자, 록시아는 긴장이 단번에 풀리면서도 무언가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잡념을 떨쳐내고서 아주 짧게 고민한 소녀는 주인을 향해 머리를 쑥 내밀었다.

허가의 의미다. 로덴은 록시아의 뿔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혹시라도 기분이 안 좋으면 얼마든지 사양 말고 말하렴."

로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록시아의 뿔을 천천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응."

록시아는 주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뿔을 만지게 하니 상당히 긴장됐다.

마족의 뿔은 겉보기엔 딱딱한 외견을 하고 있으나 혈관도 신경도 있는 엄연한 기관이다. 커다란 손상을 입으면 손발을 상처 입는 것과 다름없는 통증과 출혈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로덴의 손길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만져보니까 기본적으로 딱딱하긴 하지만 더듬거릴 때마다 록시아의 몸도 따라서 흠칫흠칫거렸다. 뿔을 만지는 느낌이 확실히 전달되는 모양이다.

"하으… 으으읏…!"

엄지손톱을 세우고는 오돌토돌한 뿔 주름을 만지면서 위아래로 살살 긁어보니 굉장히 기분 좋은 울림이 느껴졌다.

"응아앗… 아아앙… 아아… 주인니임…."

어느새인가 양손으로 정신없이 양쪽 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로덴은 뒤늦게 록시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소녀의 얼굴은 홍조가 확 피어올라 있으면서도 눈동자가 요염하게 풀려있다. 입가에 살며시 세어버린 침자국까지 있었다. 하아하아 거리고 있는 거친 숨결이 로덴의 콧등을 간지럽혔다.

그런 록시아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로덴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미묘하게 두근거렸다.

…?! 내가 미쳤지, 지금 애한테 무슨 생각을….

짝! 짝! 짝!

서둘러 자신의 뺨을 찰싹거리며 진정을 되찾은 로덴은 소녀의 입가에 묻은 침을 살며시 닦아줬다.

"미안해. 내가 중간부터 너무 정신없이 뿔을 만져댔지? 이제 간단히 씻고 자자. 내일부터 작업도 해야 하니까."

"…네. 주인님."

……그날 밤. 몸이 달아올라버린 록시아는 자위를 몇 번 하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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