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38화 (38/149)

〈 38화 〉 항구도시 (14)

* * *

쏴아아아…!!

거센 빗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항구도시를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던 로덴은 시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길거리 상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품들을 정리하거나 보따리로 급히 감싸면서 갑작스럽게 비를 쏟아붓고 있는 하늘을 마구 욕하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내내 피비린내 나는 비일상만 보게 됐던 로덴은 다시 보게 된 일상적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시장을 지나쳤다.

처음에는 분명 시장의 동쪽 방향 지나쳐서 육각형 모양의 나무판자가 세워진 길로 진입하라고 했고, 그다음은….

감시자를 심문하면서 얻었던 정보를 되짚으며 길을 나아간 로덴은 어렵지 않게 홍등가로, 더 나아가 골목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쏟아지고 있는 폭우에서 나는 비 냄새 덕분에 뒷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악취는 아주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비가 내리고 있는 영향으로 안 그래도 거리에서 보기 드물었던 인적은 더욱 드물어졌다.

이런 뒷골목에서도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존재하는 법.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를 막으면서 비를 피하기 위해 벽에 기대며 앉아 있는 노숙자들은 외부인인 로덴을 빤히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군수군 거린다.

다만, 그가 흰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특이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이런 곳에 떳떳지 못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일상다반사니까. 마약에 찌들어 있는 노숙자들 본인들도 그렇다.

…더욱 깊은 구역으로 진입하자, 슬슬 노숙자들 보다는 험악해 보이는 인상의 무리들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대부분은 뒷세계에 본격적으로 몸담고 있는 조직원들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 로덴의 모습을 보자 확신에 찬 얼굴로 다가간 조직원 두 놈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품속에 꺼내 든 어떤 물건을 은밀하게 보여줬다.

"형씨, 이게 필요해서 여기까지 온 거지? 이 주변에서는 우리 페트로그파에서 만들고 있는 물건이 가장 죽여주는데 말이야…."

초심자 기준으로 약 10회 분량의 마약이 들어있는 자그마한 주머니였다.

당연히 마약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로덴은 조직원이 꺼내 든 주머니보단,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조직 명칭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뒷골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놈의 똘마니랑 마주치다니… 이 도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장사하고 있는 일당이라 들었는데, 사실이었군.

"약도 좋지만 오늘처럼 비가 지랄 맞게 내리는 날은 거칠게 놀고 싶어서 말이야. 당신네들이 운영하는 '특별한 놀이터'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거든."

"아아, 그래서 가면을 쓰고 있었군. 놀이터에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야 당연하지."

"그래, 가서 재미 좀 보라고. 손님. …아, 이 주변에서 가끔 헛수작 부리는 놈들이 있을 텐데, 우리가 따라가 줄까? 돈만 조금 쥐어주면 되는데."

"필요 없어."

조직원들을 지나친 로덴은 다시 골목길을 걸었고, 몇 십분 뒤에 그는 다른 종류의 무리와 마주하게 됐다.

그들은 조금 전에 품속에서 마약을 꺼내 들었던 조직원들과 달리, 품속에서 자그마한 단검을 꺼내 들면서 로덴에게 금전을 요구했다. 흔히들 말하는 잡배들이다.

이런 뒷골목에 겁대가리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얼간이의 모습을 보며 털어먹기 딱 좋은 호구라고 생각했겠지.

물론 로덴은 적당히 잡배들을 어루만지며 한 두 군데씩 관절을 꺾은 뒤, 반대로 놈들의 지갑을 뜯어내고는 유유히 길을 나아갔다.

…잠시 후.

겉보기에는 허름한 술집처럼 꾸며진 건물에 도착하니 공기가 유난히 살벌해졌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고, 대충 치워냈으나 최근에 이 주변에서 무리 간의 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드문드문 눈에 밟혔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자 싸구려 술 냄새가 로덴의 후각을 괴롭혔다. 하나같이 험상 굳은 인상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다 마신 술병을 바깥에 던지면서 시끌벅쩍하게 즐기고 있는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쨍그랑! 우당탕!

"꺼어억!"

"으히, 으히히끼끼!"

여기 있는 대부분의 녀석들은 항구도시를 잠식한 범죄 조직들 중, 마약의 제조와 유통을 통해 세를 넓히고 있는 조직인 페트로그파의 일원들이다.

여담으로 녀석들의 주요 고객은 관광객들과 주변 일대의 마약 중독자들이다.

조직원들은 건물 안에 들어온 로덴을 흘끔거리기만 할 뿐, 딱히 경계는 하지 않았다. 맨몸으로 이 건물에 들어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손님이라는 뜻이니까.

그냥 여기서부터 시작할까….

계속해서 후각과 청각을 괴롭히는 이 주변의 환경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금부터 청소를 시작해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도 조금만 더 인내를 발휘하기로 했다.

범죄 조직의 아지트는 보스나 주요 간부들만이 아는 비밀통로를 만들어 놓는 경우가 제법 많았기에 괜히 지금부터 소란을 피우다가 목표물을 허망하게 놓치는 경우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그나마 덜 지저분한 자리에 앉은 로덴은 맞은편에서 조직원들에게 술을 건네주고 있던 부주방장을 불렀다. 이 양반도 패거리 중 하나겠지.

"주문은 뭘로 할 거지?"

"보드카. 이 가게에서 가장 독한 녀석으로, 최대한 화려한 잔에 담아서 다섯."

로덴은 부주방장에게 1주일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암호를 말하면서 은화 주머니를 건네줬다.

맨 처음으로 창관에 입장하는 손님이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소개비다. 어차피 나오는 길에 다시 돌려받을 예정이니까 지금은 당장은 조직원들에게 얼마를 내어주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손님."

곧장 로덴에게 존칭을 사용한 부주방장은 창관을 겸하는 아지트가 감춰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슥슥.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조용히 무기들을 손질하고 있던 샤흐바트는 지상에서부터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는 어느 인물이 희미하게 내뿜고 있는 살의를 감지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 벼려진 칼이라는 진부한 표현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로 굉장히 날카롭고도 차가운 느낌이었다.

샤흐바트는 곧장 복도에서 창관의 로비로 뛰쳐나왔다. 그는 멀찍이서 조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통로에서 태연히 걸어오고 있던 로덴의 모습을 포착했고, 조직원들을 삿대질하며 꾸짖었다.

"상대방의 살기도 느끼지 못하는 머저리 새끼들! 눈앞의 적도 못 알아보나?!"

"???"

"적이다! 지금 당장 가면 쓴 남자를 공격하라고!!"

"예에…?"

너무나도 뜬금없는 샤흐바트의 공격 명령을 들은 조직원들이 어버버 거리는 사이, 인벤토리에서 재빠르게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든 로덴이 자세를 잡고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을 휘두른 궤적에서 일렁거리는 파문이 퍼지더니, 초승달 모양의 검풍이 쑥 뽑혀 나와 뒤늦게 무기를 꺼내 들고 있는 조직원들을 노렸다.

"죽기 싫으면 엎드려!!!!!"

촤아악!

샤흐바트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자신들의 몸을 찢으려는 검풍을 피하지 못한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그대로 허리가 양단되어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버렸다.

검풍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 로비에서 종업원의 역할을 수행하던 조직원까지 한꺼번에 베어냈다.

실로 무시무시한 절삭력이다. 높이 도약해서 회피한 샤흐바트와 그의 말대로 넙죽 엎드린 단 한 명, 애꾸눈의 조직원만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간신히 생존한 녀석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돼버린 주변을 상황을 둘러보며 감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와들와들 떨고 있다.

"으히이이익?!!"

쉬이이이…!

극심한 공포에 빠진 애꾸눈의 바지가 눅눅해지며 주변의 피 냄새와 암모니아 냄새가 뒤섞였다.

"더럽게 시리."

로덴은 곧장 그 녀석의 목도 댕겅 베어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지만 하나같이 쓸모없는 녀석들 같으니…!"

시체가 돼버린 조직원들을 비난하며 바닥에 착지한 샤흐바트는 경갑의 틈새에서 두 개의 챠크람을 꺼내 들어 양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로덴은 휘파람을 불었다.

"오… 깡패 소굴에서 이만한 실력을 가진 용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 링은 분명히 챠크람이었지….

"…피차일반이다. 조금 전의 날카로운 검격은 실로 감탄스러울 정도더군. 내 이름은 샤흐바트라고 한다. 네놈의 이름은?"

로덴은 대답 대신 쓰고 있던 가면은 툭툭 건드렸다.

"흠…. 그런가. 이제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될 상대방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되니 무인으로서 상당히 아쉽군. 그렇다면 이름 모를 용병으로서 죽어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던 샤흐바트는 내내 손가락에서 빙빙 돌리고 있던 두 개의 챠크람을 동시에 던졌다.

위이이이잉!

다소 높은 각도로 던졌지만 던지는 순간에 원심력과 오러를 부여받아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챠크람은 궤도를 자유자재로 바꾸며 서로 반대된 방향에서 정확하게 로덴의 머리를 향했다.

하지만, 동시에 날아오는 챠크람의 궤도를 읽어낸 로덴은 앞 뒤로 검을 휘둘러 정확히 낚아챈 두 개의 챠크람을 훌라후프 마냥 검으로 빙빙 돌리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휴우…, 둘 다 상당히 날카롭게 노려와서 제법 위험했는데?"

로덴은 나름대로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네봤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검으로 빙빙 돌아가고 있는 챠크람을 바라보던 샤흐바트는 똥 씹은 표정이 됐다.

"…어차피 이런 잔재주로는 못 쓰러뜨릴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

냉정을 유지하며 허리춤에 있는 자마다르를 양손에 장착한 용병은 각오를 굳힌 무인의 눈빛을 한 채, 로덴에게 덤벼들었다.

쉬쉬쉬쉭­!

샤흐바트는 침입자의 심장이나 머리, 목 등의 급소만을 노리며 날카로운 공세를 펼쳐나갔지만, 로덴은 그 모든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옛날에 봤던 어느 이미지를 떠올렸다.

양손으로 저런 무기를 사용하니까 무슨 질럿을 보는 거 같군….

"크읏!"

이것만으로는 적을 쓰러뜨릴 수 없다 판단한 샤흐바트는 신발에 숨겨둔 검을 드러내며 재빠르게 발차기를 날려봤으나 역으로 로덴에게 발목을 붙잡혀 버린 그는 반대편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콰당탕! 소리를 내며 지면을 화려하게 구르게 된 샤흐바트는 곧바로 일어나 다시 덤벼드려 했으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로덴이 휘두른 검의 뭉툭한 부분에 머리를 적중당하고 쓰러져 버렸다.

완전히 여기 소속은 아니기도 하니, 이놈은 그냥 기절만 시키는 게 적당하겠어.

원래라면 이 건물 안에 있는 조직원들과 용병들을 모두 죽여버릴 생각으로 침입했던 로덴이지만, 지금 막 제압한 샤흐바트만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종류의 마치 소년만화에서나 나올법한 같잖은 이유가 아니라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로덴은 조금 전에 확인한 샤흐바트의 정보를 다시 펼쳐봤다.

[이름 : 샤흐바트 마르마흐]

[종족 : 인간]

[직업 : 용병, 암살자(제4 황자)]

[기능 : 암기 LV4, 투척 LV2, 격투 LV2]

[레벨 : 55 / 81]

[나이 : 28]

……

……

이놈한테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건너편 나라의 왕족을 건드리면 귀찮아 질지도 모르니….

기절한 샤흐바트를 구석자리에 적당히 치워둔 로덴은 창관의 복도로 저벅저벅 걸어가 페트로그를 찾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을 먼저 열어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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