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항구도시 (13)
* * *
심문을 끝마치고 대강 필요한 정보를 모은 로덴은 감시자들의 시체를 숲 속에서 깔끔히 처분한 뒤, 간단히 몸을 씻고 나서 불이 꺼져있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방 안에 비치는 인영은 셋, 오늘 겪었다는 사고 때문에 메림은 동생인 마릴의 옆에 꼭 붙은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살짝 떨어진 위치에서 얌전히 누워있는 록시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상시에 로덴이 잠드는 구석 자리에는 이불이 깔려있었다. 정황상 메림과 록시아가 미리 준비해줬을 듯.
방으로 보내기 전에 부탁하는 걸 깜빡했었는데 이거 고맙게 됐네.
마침 내일은 비도 내릴 예정이니 더러운 일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이다. 로덴은 곧장 이부자리 위에 풀썩 드러누워 다음날 실행할 청소를 위해 일찍 잠들고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금 전까지 심문하면서 들었던 비명소리와 보게 됐던 피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맴돌고 있는 탓에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있을 때,
어둠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 록시아가 주인의 곁으로 살며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일어나 있었어?"
"네… 잠이 너무 오지 않아서요."
무리도 아니었다. 조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생포를 목적으로 전투를 벌였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숨이 걸린 전투를 행했던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지금까지의 일상과 행복이 무참이 짓밟힐까 봐 상당히 두려웠다.
"…사실은 주인님이 다시 돌아오시기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은 주인님의 옆자리에서 같이 자도 될까요?"
붉게 빛나고 있는 달을 떠올리게 하는 록시아의 눈동자가 주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로덴은 자신의 몸에 피비린내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상당히 걱정스러웠지만 드물게도 적극적으로 부탁을 해오는 소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매몰차게 거절한다는 선택은 차마 못했다.
결국에는 조금 더 구석자리로 몸을 빼주면서 록시아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줬다.
"좁은 자리라도 괜찮다면 이리 와."
"감사합니다. 주인님."
방긋 웃은 록시아는 좋은 상자를 발견한 아기 고양이처럼 주인이 만들어준 자리에 쏙 들어갔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감을 가진 라벤더 향이 물씬 풍기는 느낌이 들었다.
로덴은 손이 닿는 거리에 록시아가 자리를 잡게 되니 습관적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도 조금 전에 이 손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며 다시 거두었다.
"다친 곳은 좀 어때?"
"주인님이 주신 약 덕분에 다 나았어요. 보세요."
스르륵.
대답과 동시에 몸에 걸치고 있던 잠옷을 살며시 아래로 내린 소녀는 이제 완전히 아문 어깨를 주인에게 보여줬다. 상처가 다 나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지만 뭔가 포즈가 요염했다.
어깨를 살살 매만지던 록시아는 다시 한번 주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상처는 다 나았지만… 얼음덩어리에 찔려있어서 그런지, 어깨가 아직도 차갑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 주인님의 온기를 나눠 받고 싶어요. 잠시 실례를…"
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주인의 손을 붙잡은 소녀는 얼음에 찔려있던, 가녀린 어깨에 손을 닿게 했다. 상당히 대담하고도 적극적인 행동력이다.
"아… 주인님의 손이 닿으니까 너무 따뜻하네요."
따스한 손의 온기가 어깨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니 록시아는 한결 더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덴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섭지는 않아?"
"조금 전에는 피난길에 용병단한테 붙잡혔을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서 많이 무섭긴 했어요. 그 사람들이랑 눈빛이 비슷했거든요."
"아니, 그놈들 말고 나말이야. 너희가 보는 앞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베어버렸잖아. 지금 네 어깨에 닿고 있는 이 손으로."
생각해보면 내 손에 사람들의 피를 묻힌 건 대략 5년쯤 전의 여행길에서 마주한 해적단을 쓸어버렸던 게 마지막이었지….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법치 사회 속에서 살았던 로덴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게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점차 사람에서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모험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순간에는 불필요한 살생도 멀리하면서 자신의 특기도 살릴 겸, 살벌한 싸움과 거리가 먼 연금술사로서 유유자적하게 생활하기로 결정했었다.
한편, 어깨에 닿고 있는 손의 온기를 느끼며 만지작거리던 록시아는 발그레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보다도 저를 상냥하게 대해주신 주인님의 손을 제가 무서워할 리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오늘 주인님은 저랑 마릴 언니를 지켜주셨는걸요. "
나를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으로 취급해도 좀 부끄러운데….
소녀의 말을 들은 로덴은 살짝 낯부끄러워지면서도 마음속을 희미하게 짓누르고 있던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사르르 녹은듯한 느낌을 받게 됐다.
"…고마워."
말재주가 없어서 고맙다는 말로만 감정을 표현한 주인을 향해 방긋 웃은 소녀는 로덴을 커다란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두 사람 모두 얇은 옷만을 걸치고 있어서 서로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주인님."
"응?"
"이대로 안긴 채로 자도 되나요?"
"응, 이대로 자자."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주인의 품에 안긴 채로 잠들 수 있게 된 소녀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한번 용기를 내봤다.
"주인님."
"응?"
"…사랑해요."
"…응, 나도 널 사랑하고 있어."
다만, 지금의 로덴은 소녀가 용기를 내서 꺼낸 고백을 아이가 부모님에게 건네는 '사랑해요'라는 의미로 해석했고, 그도 같은 심정으로 록시아를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지켜야만 하는 존재이며, 아직 어린 소녀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록시아의 입에서 나온 말인 만큼 로덴이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쪽에서 눈치가 빠른 소녀는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대답했는지 곧장 이해하고는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지금 당장은 주인의 품에 안긴 채 잠들 수 있는 것과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들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남녀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나란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쏴아아아아아…
평소처럼 맑았던 항구도시의 하늘에서 난데없이 물방울이 한 두 방울씩 툭툭 떨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굵직한 빗줄기가 쏟아지게 됐다.
아침시간에 곧장 해변을 즐기러 나갔던 투숙객들은 양손으로 머리를 가리면서 허둥지둥 숙소로 돌아오기 바빴다.
창문 너머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메림은 양 옆에 앉아있는 동생들을 장난스럽게 껴안으며 히죽거렸다.
"흐흐흐, 이거 보라고 지지배들아. 내가 오늘은 비가 내릴 거 같다고 했어? 안 했어?"
메림은 동생들에게 자신의 예감으로 비가 내리는 미래를 맞춘 것 마냥 화려하게 포장해서 한껏 잘난 체하기 바빴다.
"허… 진짜로 비가 쏟아지고 있네.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나 좋은 날씨였는데."
사실은 전날에 로덴에게 미리 들었던 것뿐이지만.
"아하하… 족집게네요 메림 언니."
"우후후훗~!"
신기해하고 있는 마릴과 달리 진실을 알고 있는 록시아는 다소 어설프게 웃었다.
세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던 로덴은 우의로 사용할 칙칙한 색상의 전신 망토를 걸치며 문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변은 남작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구역이라 상대적으로 안전할지라도… 혹시 모르니 내가 없는 동안은 너희 셋이서 떨어지지 말고 같이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잘 갔다 와. 로덴 아저씨."
"어제는 꼴사납게 독에 당했었지만 여기서라도 록시아는 저희가 지키고 있을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무사히 돌아오세요. 삼촌."
"그래."
로덴은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에게 이제부터 무엇을 하러 나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로덴에게 어째서 지금 같은 위기 상황, 더군다나 비가 오고 있을 때 무엇을 목적으로 외출하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굳이 직접적인 이야기로 않아도, 로덴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가 이번 외출의 목적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옆에 있어봐야 방해만 될게 뻔했으니 자기들도 따라가겠다는 말 대신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만을 전했다.
"아참, 메림."
숙소에서 나가기 직전, 돌연 메림을 부른 로덴은 가면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야시장에서 메림이 기념품으로 구매했던 새하얀 가면이다.
"이것 좀 빌려갈게."
"아아, 알았어. 나중에 꼭 돌려줘."
저걸로 외출의 목적은 확실해졌네. 뭐, 로덴 오빠가 보여줬던 실력이면 깡패 소굴 하나 털어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메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흰가면을 쓴 로덴은 그대로 망토를 완전히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가, 비가 내리고 있는 항구 도시의 홍등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모처럼 기분 좋은 휴가를 망치고, 감히 자신이 지키고 있는 소녀를 노리고 있는 놈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 * *
언제나처럼 양 옆에 약에 취한 창녀를 끼고 있는 상태로 허기를 채우다가 애꾸눈 조직원의 보고를 듣게 된 페트로그는 여자들을 잡아왔다는 희소식을 기대했으나…, 애꾸눈이 전해준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자들을 잡기 위해 내보낸, 자기의 오른팔 되는 격인 부하랑 조직 내에서 유일한 마법사가 포함된 주요 전력이 골목에서 처참히 토막 난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와장창!!
그것도 모자라 로덴 일행을 감시하고 있던 연락책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까지 추가타로 들으니 돼지는 끝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테이블에 널린 음식들을 엎었다.
"으아아아!!! 도대체 어떤 조직 놈들이 한 짓이야?!!!"
페트로그는 순간적으로 목표물인 4인방이 역으로 부하들을 모두 처리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품어봤지만…
고작해야 동 등급의 모험가 둘과 어린 마법사, 덤으로 연금술사 나부랭이가 그만한 전력을 참살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조직이 기습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 그게 현장에는 저희 쪽 조직원들의 시체밖에 없어서 어느 조직에서 보낸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조직이 한 짓거리일까 고민해봐도 이래저래 짚이는 게 너무 많으니 역으로 어디서 수작을 부렸을지 추정하지 못하겠다.
자기처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왜 이런 불행한 일을 겪어야만 하는지 애새끼처럼 떽떽거리던 페트로그는 손을 거칠게 휘둘러 애꾸눈의 뺨…
짜악!
"꺄악!!"
…이 아닌 옆자리에 있던 창녀의 뺨을 때렸다.
남자 새끼의 뺨은 때려봤자 감촉도 별로고, 듣기 좋은 비명이 들리지 않으니까.
아무튼, 여자의 몸에 손찌검을 하면서 약간이나마 머리를 식힌 페트로그는 금방 생각을 정리하고서 애꾸눈한테 명령했다.
"씨발! 하나같이 쓸모없는 놈들…! 한시라도 빨리 어떤 새끼들이 한 짓거리인지 알아내! 특히 용병! 다른 조직에서도 실력 있는 용병을 고용하고 이런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 용병을 고용한 조직이 있는지 조사하라고!"
"예, 옛! 알겠습니다."
내내 고개를 굽신거린 애꾸눈이 다시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샤흐바트는 양쪽 귀를 틀어막고 있던 두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후우… 평소에도 듣기 싫은 울음소리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러우니 귀가 다 아플 지경이군.
그나저나, 저 돼지의 말대로 실력 있는 용병이 등장한 상황이면 좋겠는데… 그래야 싸울 맛이 나지.
한참 동안 혼자서 씩씩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트로그는 맞았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창녀의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끌고 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 창녀는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자… 잠시만요! 페트로그 님…! 오늘은 분명 제 차례가 아닌…"
"닥쳐! 오늘은 네년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란 말이다!!"
짜아아악!!
입가에 피가 나올 정도로 뺨을 세게 후려 맞은 창녀는 얼굴을 어루만질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여자의 뺨을 때리면서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발산한 페트로그는 별말 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샤흐바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이제부터 이년이랑 즐기고 있을 테니, 너는 방앞에서 대기하고 있어! 특히 오늘은 어지간히 급한일이 아니면 어느 놈도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막아! 알았나?!"
"그래, 그래. 분부대로 하지."
이 순간, 페트로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가 창녀와 즐기는 시간이 생에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이란 사실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