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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36화 (36/149)

〈 36화 〉 항구도시 (12)

* * *

"이, 이게 갑자기 무슨…?!!"

들창코는 험한 뒷세계에 제법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만큼 폭력에는 익숙했지만 식칼을 허공에 휘두른 것 만으로 인간의 몸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는 비현실적인 광경은 그의 상식에서 한참은 어긋나 있다.

"으으읍! 읍읍!! 읍!"

"한창 요리하던 중에 소환당해서 뭔가 했더니만, 인신매매였냐.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입이 쩍 벌어진 들창코의 옆에서 밧줄에 꽁꽁 묶여있는 채 입까지 천으로 틀어박혀 있는 마릴의 모습까지 보게 되자 대강 상황을 파악한 로덴은 녀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상대방에서 느껴지는 얼음장 같은 살의를 감지한 들창코가 살기 위해서 취한 행동은 선제공격이다.

"뒈져라!!"

들창코는 재빨리 꺼내 든 묵직한 도끼를 양손으로 휘둘렀다. 경쟁 조직의 똘마니 놈들을 수 없이 장사지낸 요령이 담겨있는 강렬한 일격이다.

찰나의 순간, 두툼한 도끼를 막기 위해 얇은 식칼을 휘두르고 있던 로덴의 모습을 보게 된 들창코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식칼과 함께 로덴의 머리통이 쪼개지는 장면을 상상했지만,

스걱!

쪼개진 건 자신의 무기다. 로덴이 한 손으로 대충 휘두른 오러를 두른 식칼이 들창코의 도끼를 두부 가르듯이 갈라낸 것이다.

"어…."

허망하게 잘려나간 도끼를 바라보며 멍청하게 눈을 껌뻑껌뻑 거린 들창코는 상식 밖의 일을 연달아 겪으니 머릿속이 새하얘질 수밖에 없었다. 재차 공격하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로덴은 전의를 잃어버린 상대방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서 안 그래도 들창코인 녀석의 콧대를 완전히 평평해지게 만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을 지나친 로덴은 마릴에게 바짝 다가가 순식간에 밧줄을 잘라내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천을 벗겨냈다.

"후우우…! 가, 감사합니다. 로덴 씨."

"크게 다친 게 아니라면 록시아의 상처를 먼저 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네, 전 괜찮아요. 록시아를 먼저 챙겨주세요."

조금 전에 분명 금 등급 이상의 실력자만 사용할 수 있는 검풍을 날렸던 거 같은데, 도대체 로덴 씨는 뭐하는 분이시지….

마릴은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록시아의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로덴은 그녀의 어깨에 박혀있는 얼음덩이를 조심스럽게 뽑아내며 상처를 확인해 봤다. 다행히도 뼈까지 다치진 않았다.

부상의 정도와는 별게로 딸처럼 아끼고 있는 소녀의 몸에서 나버린 상처와 피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록시아는 최대한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우는소리 하나 내지 않으면서도 주인에게만 들릴만한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주인님… 죄송해요. 모처럼 주인님이 주신 선물을 사용해 버렸어요. 귀중한 물건 같았는데…."

"사과할 필요 없어. 이럴 때 사용하라고 준 물건이잖아. 오히려 칭찬받아야지."

록시아를 살며시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인벤토리를 뒤적거린 로덴은 꺼내 든 포션을 그녀의 상처에 살짝 뿌린 뒤에, 병에 남은 것을 소녀의 자그마한 입에 넘기게 했다.

당연스럽게도 록시아는 신뢰하는 주인이 주는 약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고, 그녀의 어깨에 새겨진 상처는 자연스럽게 아물게 됐다.

한편, 조금 전에 들창코가 내보냈던 도적풍의 조직원은 주변에 있던 다른 조직원들과 함께 골목 안의 풍경을 목격하게 됐다.

조직원들은 들창코가 쓰러진 모습과 깔끔하게 두 동강 난 마법사의 모습, 조금 전까지는 이 자리에 없던 인물인 로덴을 정신없이 번갈아봤다.

"저, 저놈은 분명… 보스가 말했던 연금술사…."

여자들을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당시 로덴의 인상착의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도 미리 들었기에 저놈이 어느 틈에 여기로 왔나 잠시 의아해했지만,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당장 처리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면상들이군. 그나저나, 요리하는데 사용하는 식칼을 계속 엄한데 쓰면 천벌 받을지도 모르겠어.

끌어안고 있던 록시아를 마릴의 옆자리에 내려놓은 로덴은 식칼을 인벤토리 속에 집어넣은 뒤, 반년 전에 쌍둥이 자매랑 같이 갔던 대장간에서 구매한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쓸만해 보여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뒤로 남는 시간마다 허공에만 휘두르기만 했던 쇳덩어리가 드디어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순간이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검을 꺼내는 상대방의 모습에 허둥지둥 무기를 꺼내 든 조직원들이 일제히 달려들려 했으나, 로덴은 손을 뻗어서 그들을 제지했다.

"이렇게 좁은 데서 싸우기엔 불편할 거 같은데, 차라리 내쪽에서 가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선 기습적으로 뛰어든 그는 좁은 골목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지형의 이점을 포기하고 적들에게 둘러싸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다.

조직원들의 눈에는 그렇게만 비쳤을 것이다.

"얘들아 족쳐!!"

제 발로 다가온 로덴을 사방으로 포위한 조직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숭숭숭­!

본격적인 자세를 잡은 로덴의 검격이 여럿으로 나뉘며 날카로운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자, 그에게 덤벼든 조직원들은 휘둘렀던 무기째로 팔과 머리가 일제히 잘려 나가게 됐다.

조직원들의 몸뚱이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일제히 바닥에 널브러졌고, 머리와 팔이 떨어져 나간 절단면에서 뒤늦게나마 요란하게 피가 뿜어져 나왔다.

비명소리 하나 새어 나올 틈 없이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듣기 좋게 말해서 싸움이지, 실제로는 일방적인 학살이다.

더군다나 로덴의 몸과 그가 휘두른 검에는 피 한 방울 조차 묻어 나오지 않았다.

"후우……."

스크롤에 의해 소환되기 직전까지 로덴이 손질하고 있는 오징어처럼 잘게 썰린 조직원들의 시체와 피가 골목에 흩뿌려지니 상당히 흉흉한 풍경이 그려지게 됐다.

로덴은 실로 오래간만에 자신의 손으로 수많은 인간들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지만 딱히 이렇다 할 죄악감이나 후회의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그가 싸우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 마릴의 모습을 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결국에 동생한테까지 연달아서 들켜버린 건가.

"그나저나, 마릴. 계속 누워있는 거 같은데… 마비독 같은 거에 당한 모양이네."

"면목 없게도요…. 상반신은 움직일 수 있긴 한데, 당장 일어나기는 힘드네요."

"혹시 이놈들이 누구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 녀석들인지 들어봤어?"

마릴과 록시아는 싸우기 전에 들창코가 들먹인 보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분명히… 페트로그라는 이름을 꺼냈어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페트로그…."

두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조용히 곱씹은 로덴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인 조직원 세 놈을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상황이 여유롭다면 심문도 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언제 여기로 올지 모르니 빨리 처리하고 여기서 떠나는 게 덜 귀찮겠지."

더군다나 얘들 앞에서 고문하는 장면까지는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로덴 씨… 그 사람들을…."

로덴의 이름을 부르며 올려다보고 있는 마릴의 눈빛에는 이미 제압당한 사람들까지 꼭 죽여야만 하는지 재차 확인하고자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동자를 잠시 동안 바라보던 로덴은 쓰러져 있는 조직원들의 목을 향해 칼을 조준한 자세로 질문을 건넸다.

"마릴,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잘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

말을 이어가면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칼을 내리친 로덴은 순식간에 조직원들의 목을 댕겅댕겅 베어냈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것과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것.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후환은 일찌감치 없애는 게 좋은 법이야. 너도 모험가면 잘 알잖아."

"…맞는 말씀이에요.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해서 죄송해요."

"미안해 할 건 없고, 내 말을 잘 이해했다면 그걸로 됐어. 록시아, 혼자서 일어설 수 있겠니?"

"네, 괜찮아요. 삼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는 록시아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로덴은 마릴에게도 포션을 처방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네 몸에 남아있는 마비독에 대응할 해독제는 준비하지 못해서, 숙소에 돌아갈 때까지 이대로 실례 좀 할게. 불쾌하진 않지?"

"아…,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무겁거나 하시진… 않죠?"

누가 여자 아니랄까 봐 이런 상황에서 조차도 무게에 관한 게 신경 쓰인 모양이다.

"가볍기만 하고만 뭘. 이제 돌아가자."

"네… 로덴 씨,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외의 남자의 품에 이렇게 안긴 건 태어나서 처음이네. 무척이나 안심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뭐랄까… 그리운 느낌도 들고, 가슴도 두근거려….

마릴이 남자의 품에, 정확히는 로덴에게 안기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두 번째다.

어비스에서 기절했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로덴에게 안기게 되자, 마릴의 몸이 그때의 느낌을 기억하게 되면서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공주님 안기 자세로 로덴에게 몸을 맡기게 된 마릴은 무의식 중에 그의 몸을 붙들고 있던 팔에 슬며시 힘이 들어가 버린다.

"우으읏…."

그 모습을 옆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록시아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다가도 주인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볼을 잔뜩 부풀리며 두 사람을 뽈뽈 따라갔다.

때마침 지금은 야심한 밤이고, 조금 전까지 조직원들이 주변의 행인들을 내쫓은 덕분에 세 사람은 조직원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 골목을 은밀하게 빠져나갔다.

* * *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로덴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림의 도움을 받아 이부자리에 마릴을 눕히면서 그녀의 몸상태를 간단히 진단했다.

"마비 이외의 효과는 딱히 없는 종류의 독이라서 하룻밤 푹 쉬게 하면 문제없을 거야. 마침 잘 시간이니까 이대로 누워있어."

"로덴 씨, 오늘은 정말 여러 가지로 감사하고… 미안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밖에 나간 바람에 록시아까지 그런 일을…."

마릴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저은 록시아가 서둘러 그녀를 변호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마릴 언니. 저도 멋대로 따라갔잖아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걸로 따지면 애초에 내가 채소가 어쩌느니 중얼거린 게 이번 일의 시작이지. 일단 지금은 신경 쓰지 말고 푹 쉬기나 해."

"…네."

조금 전에 벌어졌던 전투와 몸에 남아 있는 독 기운 때문에 나른함이 밀려온 마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후우… 조금 전에는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아저씨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깜짝 놀랐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었다니…."

얌전히 누워있는 동생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한숨 돌린 메림은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재차 확인해봤다.

"페트로그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얘네들을 노리고 있었다고?"

"똘마니 중 한놈이 나를 보면서 연금술사라고 말한 걸 보면, 우리 모두가 표적인 모양이야. 그러다가 저 두 사람만 떨어졌던 순간을 노린 거지."

그렇다면… 지금도 이 주변에 감시자들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겠어.

거기까지 생각한 로덴은 다시 방에서 나가기로 했다.

"시간도 충분히 늦었으니 앞으로의 일은 내일 생각하자고. 일단, 뒷마당 좀 정리하고 올게."

"나도 같이 가. 참고로, 혼자서 기다리는 동안 음식들은 대강 치워뒀어. 식기들만 좀 정리하면 돼."

"저도 같이 할게요."

잠시 후. 셋이서 함께 뒷마당을 정리한 뒤, 로덴은 잠시 혼자서 생각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하면서 두 여자를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는 눈을 감은채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에 느껴지는 모든 생물들을 탐지했다.

당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다른 투숙객들과 일행의 기척은 배제했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지나다니는 몇몇 행인들과 동물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예의주시 하고 있는 기척이 감지됐다.

"한놈은 자고 있나… 이쪽 방향이군."

감시자가 있는 위치를 대강 가늠한 로덴의 몸이 희미한 잔상만을 남기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

단망경으로 그의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감시자가 화들짝 놀라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료를 깨우려 했지만,

콰직!

눈 깜짝할 사이에 감시자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로덴이 안면에 날린 장타가 단망경을 눈에 쑤셔 넣고, 감시자의 머릿속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녀석은 순식간에 절명해버렸다.

심문하는 건, 한 놈이면 충분하지.

"그만 졸고 일어나."

짜아악!

로덴은 남은 감시자의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세게 뺨을 후려치면서 녀석을 깨웠다.

"으으응?!… 엇…."

잘만 자고 있다가 난데없이 뺨을 후려 맞아서 어벙한 표정을 지었던 감시자는 옆자리에 죽어있는 동료의 시체와 로덴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간신히 상황 파악을 했다.

"내가 이제부터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순순히 대답하는 게 서로 편할 거야."

감시자의 뺨을 툭툭 건드린 로덴은 품속에서 반짝거리는 손톱깎이를 꺼내 들었다.

딱딱딱딱딱딱딱!

로덴의 손에서 규칙적으로 딱딱 거리는 소리를 낸 손톱깎이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될 거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해주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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