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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35화 (35/149)

〈 35화 〉 항구도시 (11)

* * *

채소를 구하기 위해 밤의 시장으로 향했던 마릴과 록시아는 민박촌에서 떠난 이후부터 그녀들을 따라 다니고 있는 어느 무리들에 의해 추적당하고 있었다.

어느새인가 뒤를 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챈 마릴은 추적자들을 따돌리면서도 사람이 많은 길로 향하려 했지만, 그녀들이 가려는 길목에 있는 행인들은 다른 조직원들에 의해 멀찍이 쫓겨난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은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게 록시아의 눈에도 체감이 될 만큼 상황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마릴 언니…."

"괜찮아, 괜찮아. 이번엔 저쪽 길목으로 가자. 저기서 쭉 지나가기만 하면 사람이 잔뜩 있는 시장에 도착하니까 괜찮을 거야."

표정과 몸짓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록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마릴은 길목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을 보게 된 순간, 더 이상 미소를 유지할 수 없었다.

빈말로라도 좋은 인상이라고는 하지 못할 부리부리한 눈매의 험악한 남자들이 둘.

"……."

목적을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진작에 칼집에서 시퍼런 날붙이를 빼들고 있는 두 남자의 눈빛은 명백한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두 여자는 왔던 길목으로 되돌아가려 해 봤으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녀석들이랑 비슷한 느낌으로 건들거리는 남자 셋이 각자의 무기를 든 상태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든지 좋으니까, 시간을 끄는 동안 공격 마법을 준비해둬."

"…네."

허리춤에 있는 검과 방패를 빼들면서 옆에 있는 록시아에게 작게 속닥거린 마릴은 양측에서 다가오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 대체 뭐죠?!"

그녀의 물음에 다가오고 있는 남자들 중, 멧돼지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우그러진 들창코 덕분에 유난히 험악한 얼굴을 소유하고 있는 녀석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보스인 페트로그님이 너희들을 정중히 모셔오라고 하셨거든. 순순히 따라와 주면 서로가 무척이나 편할 거야."

"정중하게 모시라는 말의 뜻이 대체 언제부터 무기를 빼들고 위협해서 억지로 데려오라는 뜻으로 변질됐는지 영 모르겠는데, 제가 상식이 부족한 걸까요?"

마릴의 비아냥 거림에 이죽거리는 웃음을 보인 들창코는 도끼날을 위협적으로 세우면서 대답해줬다.

"흐흐흐, 뒷세계의 상식은 부족한 거 같군. 아가씨, 지금 이 정도면 굉장히 정중하게 대하고 있는 거라고."

"정중히 거절한다면 당신들은 포기하실 건가요?"

"그러면 우리가 곤란해서 안되지. 조금 다치게 하더라도 끌고 올 수밖에."

미리 예상은 했지만 전투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확신한 마릴과 록시아는 슬금슬금, 그녀들의 바로 뒤에 있는 골목 쪽으로 뒷걸음질을 했다.

후퇴할 길을 제 발로 없애는 어리석은 행위라 비난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이대로 양측에서 합공을 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벽을 등지고 싸우는 게 훨씬 나을 것이란 생각으로 한 행동이다.

"뭐…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같긴 했어. 아그들아, 팔다리를 자르거나 얼굴만은 건드리면 안 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저년들 어디 한 군데 크게 상하게 하면 뒤진다."

"옛!"

조직원들은 곧장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기 위해 둘, 둘, 하나 씩 대열을 맞춰서 나란히 두 여자의 뒤를 쫓았다. 이 방향은 막다른 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 급할 것은 없었다.

…잠시 후, 골목의 끝에서 조직원들을 맞이하고 있던 건 완드를 치켜든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록시아와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던 마릴의 모습이다.

후우

사람을 공격하는 의도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록시아의 두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주인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는 마음가짐으로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고 미리 준비해둔 마법을 시전 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스승인 메림에게 맨 처음으로 전수받은 공격 마법이자, 가장 직관적인 효과를 가진…

"파이어볼!"

록시아의 완드 끝에서 작열하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덩어리는 사람의 머리 크기만큼 커지더니 선두에 있던 조직원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좁은 골목에서는 마땅히 피할 공간이 없으니 회피는 불가능.

치이이익…

허나, 조직원의 눈앞에 나타난 얼음 방패가 록시아가 쏘아 올린 화염구를 상쇄시켰다. 자세히 보니 조직원들의 맨 뒤에 있는 마른 조직원이 지팡이를 높이 들고 있었다.

"우리를 너무 등신 새끼들로 취급하고 있었나 본데… 너희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거랑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법에 관한 대비책을 준비해 뒀다고. 가!"

츠팟!

들창코가 소리치자, 선두에 있던 두 명이 일제히 뛰어들었다.

록시아는 곧장 다음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실전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마법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조금 더뎠다.

그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은 전사인 마릴의 몫, 그녀는 록시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머리를 회전시켰다.

평상시와 달리 방어구가 아닌,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상황이기에 들어오는 공격은 검과 방패로 막아내거나 반사신경으로 회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릴이 선택한 것은 평소보다도 훨씬 과감한 공격.

상대방이 자신들을 온전히 포획해야 하는 입장인 이상, 치명상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하아아압!!"

검을 한번 가볍게 휘둘러 뛰어오려는 두 놈을 주춤거리게 한 뒤, 가까운 녀석을 향해 너클처럼 쥐고 있는 버클러로 돌격했다. 방어를 완전히 포기한 육탄공격이다.

이만큼이나 저돌적으로 공격을 가할 것이라 예상은 못했는지 허를 찔린 놈의 반응은 한 박자 느렸다. 돌격은 훌륭히 적중했다.

그녀가 지금 끼고 있는 버클러는 일전에 사용했던 것과 비교해 급소만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지만, 그만큼 휴대성이 좋고, 통짜 강철로 만들어져 있어 더욱 견고하다.

단단한 방패는 우수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콰직!

"끄어어…."

혹처럼 튀어나와 있는 버클러의 중앙부가 조직원의 안면을 뭉개면서 강냉이 여려 개가 우수수 떨어지게 됐고, 놈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오버 그레비티!"

옆에 있던 조직원이 뒤늦게나마 마릴의 빈틈을 노리려 했으나 순간적으로 녀석의 몸이 주춤거렸다.

마릴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정을 되찾은 록시아가 완성한, 순간적으로 몸을 무거워지게 하는 대지 속성 마법 때문이다.

후위의 마법사가 뒤늦게나마 록시아를 향해 얼음송곳을 여럿 발사했지만, 이번엔 조금 전과 정반대로 록시아의 완드에서 연달아 내뿜은 화염과 바람으로 인해 녹아내리거나 날아가면서 완벽히 상쇄당했다.

생에 처음으로 겪게 된, 실전 중에 마법을 맞부딪히는 경험을 통해 전투 중에 상대방의 주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요령을 순식간에 터득한 것이다.

"이런 망할 계집에 같으니… 트리플이었냐?!"

얼음 속성 하나만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 조직원은 세 가지 속성을 다루고 있는 록시아를 보며 시기가 가득한 표정을 지어냈다.

록시아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살며시 미소 지은 마릴은 고개를 돌려,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는 조직원의 어깻죽지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실전으로 다져진 검술과 선천적인 근력이 조합된 상단 공격은 조직원의 살점을 가르고, 쇄골을 으스러뜨려 견갑골까지 으깨버렸다.

"……!!!"

극심한 부상을 입은 조직원은 지면에 나뒹굴며 침을 질질 흘렸다.

저 부상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체쳐두더라도, 당장 다시 싸울 수는 없겠지.

웬만하면 사람의 피를 보는 것을 꺼려하는 심성을 가진 마릴이지만, 지금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지켜야 할 아이도 같이 있는 위기상황. 손속에 어설픈 정을 둘 여유 따위는 없었다.

"으읏…!"

"괜찮으세요?!"

그 순간, 마릴이 검을 휘두른 순간의 빈틈을 노린 조직원이 날린 비도가 마릴의 허벅지에 날카롭게 꽂혀버렸다.

"난 괜찮아… 너는 주문에 집중해."

"네, 넷!"

전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깊은 상처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록시아를 진정시킨 뒤, 터프하게 비도를 뽑아내며 남은 적들을 바라봤다.

후우우… 도적이랑 전사, 그리고 마법사의 조합이네… 록시아도 기대 이상으로 잘 보조해주고 있고, 이 정도면 둘이서 충분히 상대할만해.

호흡을 가다듬은 마릴은 상대방이 다시 덤벼들면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게 자세를 잡았지만… 정작 앞에 있는 조직원들은 간간히 비도를 던지거나 얼음을 날려서 한참 동안 견제만 할 뿐, 달려들지 않았다.

더 이상 달려들 필요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금 전에 뽑았던 물건을 재차 확인한 마릴은 비도의 끝부분에 자신의 혈흔만이 아니라 수상하게 번들거리는 액체가 묻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됐다.

명백한 독이다. 생포가 목적이니 아마도 몸을 마비시키는 종류의 독.

뒤늦게나마 조직원들이게 달려들려고 했던 마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뻣뻣해진 다리 때문에 균형을 잃고 털썩 넘어져 버렸다.

"마, 마릴 언니…!!"

마릴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적의 마법을 견제하고 있던 록시아의 집중이 흐트러진 순간

푹!

"아아앗!!!"

미처 상쇄시키지 못한 얼음송곳 하나가 가녀린 어깨에 박혀 들어갔다.

쓰러진 마릴을 향해 잽싸게 다가간 조직원들이 몸을 움찔거리고 있는 그녀의 무장을 해제시키며 밧줄로 꽁꽁 묶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록시아는 그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전투 중에 견제를 막느라 대부분의 마나를 소모해 버렸다. 더구나 어깨를 파고들어간 얼음이 주는 고통 때문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다.

"후우… 생각보다 더 애먹었네. 너는 당장 주변에 있는 녀석들 불러서 저기 쓰러진 두 놈, 데려가라고 전해."

"예, 형님."

들창코의 지시를 들은 도적풍의 조직원이 골목에서 빠져나갔고, 마법사 조직원이 오만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록시아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재주는 있지만, 마나를 많이 못 쌓았군. 아직 애새끼일 뿐이지… 으응?"

마나를 거의 다 소모해서 무력해진 마법사 꼬맹이가 돌연 배낭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에 조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도 그녀가 꺼내 든 물건을 확인한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꼬맹이!! 당장 멈춰!!! 이 씨발년아 멈추라고!!!!"

록시아의 행동에 당황한 마법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급히 얼음 덩어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노리려는 건 팔도 다리도 아닌 머리다. 생포 같은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모습을 지켜본 들창코는 이놈이 갑자기 왜 호들갑을 떠나 싶었다.

"야, 저 종이 쪼가리가 뭐길래 갑자기 발작을 하냐?"

들창코의 말을 듣자 속이 뒤집힌 마법사는 상대방이 형님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무식한 새꺄! 저년이 들고 있는 저거, 마법이 저장된 스크롤이야! 저 스크롤에 뭔 마법이 적혀있는지 몰라도 당장 막아야 해!!"

부우우욱!

마법사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록시아는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찢어냈다. 깡패짓이나 하는 수준의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하는 것보다 종이를 찢는 게 훨씬 빠른 것은 당연했다.

…죄송해요. 주인님이 기껏 주신 선물이라 최대한 아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이걸 사용해야 하는 순간인 거 같아요.

주인을 향해 마음속으로 사과한 록시아는 로덴에게서 스크롤을 맨 처음 받았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봤다.

­록시아, 앞으로 살다 보면 내가 언제나 네 옆에 있을 수만은 없을 거란다. 이건 너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 닥치게 되는 순간,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보험이야.

­이건… 양피지? 어떻게 사용하면 되나요?

­단순해. 그냥 쫙 찢어내기만 하면 돼. 그러면 어떤 위험이 찾아오더라도 괜찮아.

이윽고 스크롤이 완전히 찢어졌다. 록시아의 눈 앞에 복잡한 형상의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사방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걷히자, 록시아의 시야에 잡히게 된 것은 식칼을 들고 있던 주인의 뒷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록시아를 발견한 로덴은 그녀의 어깨에 박혀있는 얼음송곳을 보자마자 흉신악살(????) 같은 얼굴로 돌변했다.

그리고는 유력한 용의자인 마법사를 바라봤다. 때마침 그의 주변에 얼음도 둥둥 떠다니고 있는 걸 보니 범인이 확실했다.

"……니들 뭐하는 새끼들인데?"

딱히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그는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들고 있던 식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는지,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다고 직감한 마법사는 주변에 모아둔 얼음을 뭉쳐서 얼음 방패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법사 조직원이 만들어낸 얼음 방패를 종잇장처럼 찢은 검풍은 그대로 녀석의 몸을 여름날의 수박처럼 반으로 쩍 갈라놓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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