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항구도시 (10)
* * *
자고로 회는 간장이랑 고추냉이에 찍어 먹어야 하는데…
로덴은 그럼 생각을 품으면서도 먹음직하게 썰어낸 오징어 회를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았다.
외관은 오징어랑 비슷했지만 맛까진 어떨지 몰라서 시험 삼아 딱 한 마리만 회를 떴기에 양이 상당히 적었다. 네 명이서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다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질 만큼.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사용해서 만든 젓가락으로 오징어회를 한 번에 세 겹 집은 로덴은 항구도시에서 판매하는 특제 소스에 찍은 뒤, 서서히 어금니로 이동시키고는 과감히 씹었다.
쫄깃쫄깃!
흠… 오징어 맞네.
직접 맛을 보니, 겉모습만이 아닌, 진짜배기 오징어가 맞았다.
그리고 소스의 맛은 로덴이 기대했던 것보다 미묘하게 시큼하면서도 매운맛이 돌긴 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괜찮았다.
로덴은 오징어회를 한번 더 맛보고 나서야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에게 오징어회를 권유했다.
"으음, 뭘 생으로 먹어본 적은 없어서 조금 망설여지네."
"로덴 씨도 잘만 드시는 걸 보면 문제는 없어 보이긴 하는데…."
대부분의 인간에게 있어 날 것으로 무언가를 먹는다는 개념은 흔치 않은 편이다.
쌍둥이 자매의 눈에 익히지도 않은 생물의 살을 먹고 있는 로덴의 모습이 상당히 생소하게 비친 모양이다.
"일단 제가 먼저 먹어볼게요!"
그 순간, 손을 번쩍 들은 사람은 록시아였다.
빈민가 생활을 했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비주얼이 좋지 않은 음식물 찌꺼기들도 여러 번 먹어봤기에 록시아는 의외로 와일드한 편이기도 했고,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다.
로덴의 코앞에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포크를 사용해 오징어회를 한 움큼 집은 뒤, 주인의 행동을 따라 하듯 소스에 찍어 입안에 들이밀었다.
조신하게 입을 우물거리던 록시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으으음…! 쫄깃쫄깃해요! 더군다나 여태껏 먹었던 고기들에 비해서 굉장히 신선한 맛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요. 언니들도 한번 드셔 보세요."
"그, 그러면 우리도 한입만…"
너무나도 복스럽게 먹고 있는 록시아의 모습을 지켜본 쌍둥이 자매는 그제야 각각 한 접씩 집어서 조심스럽게 맛을 봤다.
"오오오옷?!!"
"맛있어…."
처음에는 생으로 먹는 음식이라서 상당한 거부감이 있어 보였지만, 막상 먹어보니 그녀들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는 말끔하게 비워지게 됐고, 로덴은 오징어들을 도마 위에 올렸다. 맛이 멀쩡하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 남은걸 모조리 회로 만들 생각이다.
이상하다… 분명 오징어도 맛있고, 소스도 괜찮은데, 뭔가 부족해… 뭐지? 술도 따로 챙겨두긴 했는데….
조금 전의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부족한지 한참 고민하던 로덴은 고개를 퍼뜩 들면서 중얼거렸다.
"아… 쌈 싸 먹을 채소가 없네."
로덴은 뒤늦게나마 오징어회랑 싸 먹을 채소를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때마침 그가 손질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릴이 로덴이 중얼거리던 말을 따라 했다.
"채소가 필요하세요?"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회랑 같이 싸 먹을 채소가 있으면 먹는 느낌이 훨씬 더 좋거든."
"그러면 제가 사 올게요. 필요한 채소가 뭔지 말해주세요."
"아니, 그런 뜻으로 했던 말은 아니니까 괜찮아."
"다른 애들은 마법으로 요리를 도와줬었는데, 저만 한 게 별로 없어서 은근히 신경 쓰였거든요. 금방 돌아올게요."
저렇게 까지 말하니 다시 거절하기도 뭐했던 로덴은 마릴에게 사 와야 하는 채소들이 무엇이고, 얼만큼 필요한지 간단히 말해줬다.
밤중의 항구도시를 혼자서 돌아다니기엔 다소 위험한 관계로 평소처럼 메림이 그녀와 동행하려 했지만, 이번만은 록시아가 마릴을 따라가고 싶다며 드물게도 고집을 부렸다.
"마릴 언니랑 같이 가는 길에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래? 알았어. 가는 중간에 마릴이랑 떨어지지 말고, 되도록이면 손을 꼭 잡으면서 가려무나."
"네!"
후후, 이렇게 저희만 없다면 주인님과 메림 언니만 남겠죠?
주인과 스승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던 록시아는 짧은 시간이나마 두 사람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마릴의 뒤를 따라 가까운 시장에 들렸다오기로 했다.
민박촌에서 내려가기 직전, 마릴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록시아는 잠시 숙소에 들어가서 자그마한 배낭을 챙겨 왔다.
"록시아, 그 안에 뭐가 들었니?"
"삼촌이 따로 움직일 때마다 늘 챙기라고 말씀하신 부적이 들어있어요."
"어머, 로덴 씨가 록시아를 굉장히 아끼시나 보네."
"에헤헤…."
마릴의 말을 듣고 헤실헤실한 얼굴이 된 록시아는 풀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스승에게 선물 받은 고깔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래 봐야 귀여울 뿐이지만.
"삼촌한테 걱정 끼치지 않게. 얼른 다녀오자."
"네, 마릴 언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각자 검과 방패, 완드를 챙긴 마릴과 록시아는 사이좋게 손을 잡으며 시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조심히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거린 로덴과 메림은 그녀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오징어회를 다시 만들어두기로 했다.
"아참, 내일은 아침시간이 조금 지날 때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비가 내릴 예정이더군. 그것도 제법 많이."
오징어를 손질하고 있던 로덴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제법 자세히 아는 걸 보니, 그 나침반으로 확인했나 보네?"
호기심 많은 마법사인 메림은 로덴에게 도움받았던 날에 얻었던 아티팩트가 대체 뭐였는지 몇 달 전에 물어봤었고, 그는 어렵지 않게 나침반을 보여주면서 그게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간단히 설명해준 상황이었다.
"응. 내일은 숙소에만 있어야 하니까 마릴은 네가 설득해줘."
"알았어. 오빠. 그나저나, 아까 전에 매운탕이랑 회를 먹다 보니까 이상하리만치 술이 땡기던데… 이거 정상인가?"
"지극히 정상. 말나 온 김에, 쟤들 돌아오면 같이 마실 수 있게끔 술이랑 주스도 미리 꺼내 둬."
"흐흐… 이거 이거, 록시아만 주스로 때워야겠네? 그냥 얘도 마시게 하지. 나는 고만할 때부터 몰래몰래 마셔봤는데.
"…자랑이다."
로덴과 메림은 시장에 간 두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요리를 준비하면서도 간간히 떠들거나, 가벼운 키스를 나누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 * *
쾅!
"보스!!!"
그 시각, 평상시처럼 약에 절여져서 저항하지 못하는 창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가학적인 욕망을 해소하고 있던 페트로그의 방문을 허락도 받지 않고 벌컥 열은 애꾸눈 조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평상시에 자기만의 시간을 방해하면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라 조직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기에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한 돼지는 주먹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다.
"습격입니다! 버트파 놈들뿐만 아니라 구르도파 녀석들까지 연합해서 여기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에라이 씨발!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이 새끼들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거야?!"
"그게 있죠…."
댁이 최소한의 상도덕도 없이 항구도시의 여기저기서 약장사를 벌이고 있으니까 다른 조직들이 네 멱살을 따버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겠지. 이 탐욕스러운 돼지새꺄!
애꾸눈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미치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간 순식간에 물고기 밥이 돼버릴게 뻔했으니 다른 말을 꺼냈다.
"…조금 전에 실력 있는 인원들을 선출해서 따로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놈들이 벼르고 있을 때 그 정보까지 새버린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쳐들어 오고 있는 거죠."
"깜… 아니, 샤흐바트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겠지?"
"예!"
"그러면 어떤 놈이 쳐들어 오든 아무 문제없어. 밖에서 막고 있는 우리 애들한테 기어코 여기로 들어오려는 놈들은 굳이 막지 말라고 전해."
지시를 받은 즉시 애꾸눈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옷을 대충 걸쳐 입은 페트로그는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에서 빠져나와 문 앞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샤흐바트를 바라봤다.
"거기서 이야기는 다 들었겠지? 일할 시간이야."
"계약의 내용대로, 이 건물 안에 들어온 침입자들은 모조리 없애주지."
…잠시 후 창관까지 쳐들어온 경쟁자 조직 연합 패거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페트로그를 불렀다.
"이 씨발, 상도덕도 모르는 탐욕스러운 돼지새끼! 당장 튀어나와!"
"오늘이야 말로 네놈의 배때기에 양초를 꼽아주마!!"
그들의 수는 일곱 명. 상대방의 아지트에 쳐들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은 숫자라 생각될 수 있지만… 좁은 건물에서 싸우기에는 딱 적당한 인원이며,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정예다.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거칠게 휘둘러서 눈 앞에 보이는 물건들을 때려 부수던 그들은 본진까지 쳐들어온 침입자를 막으러 오는 페트로그파 일당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까 전에도 똘마니 놈들이 그냥 통과시켜준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그 돼지 놈이 기이한 복장을 하고 있던 호위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하, 아무리 날고 기는 용병이래 봤자.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쌔애애애앵.
그 순간, 어두컴컴한 공간에서부터 은밀하게 날아온 원반 두 개가 양쪽 자리에 서있던 침입자의 머리통에 절반 이상 박혀 들어갔고,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절명했다.
"이 새끼들… 갑자기 왜 넘어지고 지랄… 어?"
"둘 다 머리에 이상한 원반이 꽂혀있어! 그 돼지가 고용한 용병이 한 짓이야!"
수수께끼의 투척 무기에 의해 순식간에 두 명이 당하자 남은 침입자들은 무기를 바짝 들어 서로 등을 기대며 경계태세를 더욱 굳혔다.
"…그건 원반이 아니라 차크람이라 불리는 무기다."
쉬이익!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망치를 들고 있는 침입자의 머리 위, 천장에서 나타난 초록색의 인영이 녀석의 정수리를 향해 기묘한 무기를 꽂아 넣었다.
"셋."
"어어엇?!"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모습에 중앙에서 한 걸음씩 물러난 침입자들은 그제야 용병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됐다.
머리를 뒤덮은 터번, 입가를 가린 천, 뱀의 비늘을 뒤덮은 것만 같은 느낌의 초록색 경갑, 자마다르라 불리는 세 갈래로 나 있는 단검을 양손에 장착하고 있는 이국의 용병이었다.
"이 껌둥이 새끼가!!!"
정체모를 용병에 의해 순식간에 세 명이 당해버렸지만, 아직 4대 1의 상황. 금방 냉정을 되찾은 침입자들은 적, 샤흐바트를 향해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허나, 뱀처럼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네 방향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연달아 회피한 샤흐바트는 가장 먼저 무기를 휘둘렀던 침입자에게 바짝 접근해 녀석의 목을 찔렀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시체의 몸을 밟아서 공중으로 도약한 그는 반대편에 있던 침입자의 머리를 내려찍으며 화려하게 착지했다.
"넷, 다섯."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일곱 명이었던 침입자는 순식간에 두 명만이 남게 됐다.
"정말이지, 힘에만 의존하는 단순한 공격밖에 모르는 놈들이야. 이 나라의 칼잡이들은 하나같이 기교가 없어."
그건 그렇고, 내 의뢰인… 아니, 그 돼지 녀석은 여기저기서 원한을 정말 많이도 사는군. 덕분에 피비린내 나는 실전 수행을 쌓을 기회가 잔뜩 생기니, 나야 좋지만.
"으아아아아!!!!"
샤흐바트가 중얼거리듯 말한 도발 때문인지, 패닉에 빠져버렸는지, 남은 두 명의 침입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행했다.
이번에는 피하는 대신, 한쪽의 공격은 세 갈래의 칼날로 막아내고, 반대편의 공격은 발차기를 사용해 궤도를 꺾어낸 샤흐바트는 다시 한번 발차기를 날려서 신발안에 숨겨진 작은 검으로 침입자의 관자놀이를 찔렀다.
"여섯."
마지막으로 제압한 침입자의 목을 양손에 있는 자마다르를 교차해서 댕겅 베어낸 샤흐바트는 '일곱'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뢰인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거기서 보고 있었나? 이번에도 시체 처리는 그쪽에서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군."
"흐흐, 그러도록 하지. 수고했어."
샤흐바트가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던 페트로그는 이 용병과 계약을 맺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흐흐… 이 깜둥이 녀석은 돈 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는군. 이놈만 데리고 있으면 어떤 조직들도 감히 이 몸을 건드릴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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