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항구도시 (8)
* * *
해변가 근처의 가게에서 점심을 먹은 뒤, 숙소에 돌아가 휴식 겸 낮잠을 취한 네 사람은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모이기로 미리 정하고서 두 팀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현재, 로덴과 록시아는 항구에 정박한 상선 주변을 구경하는 중이다.
"와아아… 이게 배라는 거군요. 저렇게 커다란 게 바다 위에 둥둥 떠있다니…."
처음으로 눈에 담은 상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녀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의 옆에 있던 로덴은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난간에 몸을 걸치고 있던 록시아가 무의식 중에 앞으로 기울이려고 하자, 로덴은 살며시 손을 내밀어 그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막았다.
"자칫 위험할지도 모르니, 좀 더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렴."
"저도 모르게 그만… 조심하겠습니다."
그는 최근 들어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쓸 수 있는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주인님, 이 배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 도시에서 출항하는 상선들은 저 바다 너머에 있는 서남 대륙까지 건너갔다가 여기로 돌아오는 거야."
"서남 대륙이요?"
"응, 사막의 대륙이라는 별명이 더 친숙한 곳이지. 나도 예전에 그쪽에서 좀 지내봤었는데, 거기서 봤던 풍경은 어땠냐면……."
로덴이 해주는 사막의 여행담을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 록시아는 언젠가 그런 여행을 주인과 함께 하고 싶다는 자그마한 소망을 품게 됐다.
한편, 상선과 연결된 부두에서는 딱 봐도 뱃사람 다운 차림새를 한 근육질의 남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밧줄 더미와 네모난 나무상자, 오크통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원들이 수입품을 내려놓은 위치에는 인근 상단의 간부로 보이는 상인들이 최대한 좋은 조건에 매입하기 위해 벌써부터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엇… 주인님. 저쪽에 계신 분은…."
주인의 손을 살짝 잡아당긴 록시아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던 인물은 그녀와 같은 뿔과 피부를 가진 마족 태생의 남자였다. 그는 뱃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마족이 나르고 있는 물건이 유난히 많았기에 두 사람은 설마 노예 선원인가 싶어서 유심히 바라봤지만, 마족의 표정은 보람찬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그것, 어두운 그늘이 전혀 없다.
심지어 이쪽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귀여운 미소녀인 록시아를 향해 손을 흔들거리는 여유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록시아는 동족을 향해 손을 맞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저분은 저와는 다르게 무사히 피난에 성공하셨네요. 저렇게 일자리도 잡으시고."
"과거에 마계국이랑 직접적인 전쟁을 겪었던 알트마 왕국, 크로이브 공국 사람들과 달리 우리가 있는 하론 공국의 사람들은 마족들을 적대국의 끄나풀이 아닌, 특이한 이종족 정도로 인식하는 편이니까."
상대적으로 나은 거지, 여기도 마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존재하지만… 저 양반은 그나마 번듯한 일자리를 잡게 된, 운이 좋은 경우네.
오래간만에 동족의 모습을 보게 된 록시아는 마계국에서 지냈던 시절과 피난을 했을 당시의 일이 생각났는지 마음이 싱숭생숭 해졌다.
그런 마음이 겉으로도 드러났는지,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로덴이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말이야… 록시아, 너도 무사히 이 나라에 피난하게 됐다면 원래는 뭘 하고 싶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다 할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어요. 내전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자기 의지에 상관없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처참히 죽는 광경을 매일매일 옆에서 보는 게 두려워서 고향에서부터 도망친 거죠."
그때는 굶지 않고 지낼 수만 있었으면 하고 절실히 바랬는데 말이죠.
"피난길 중간에 노예상들에게 사로 잡혔을 때,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당하고, 매일 같이 얻어 맞고, 채찍질을 당했을 때는 너무 아프고, 너무 무서웠지만… 결국에는 주인님과 만나게 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의 너는 행복해?"
로덴의 말을 듣자, 록시아는 한때 가족이라고 믿었던 빈민가의 친구들과 무사히 이곳에 정착한 뒤에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다양한 경우를 상상해봤다.
만약에 피난에 성공했다면 제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녀는 금방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로덴을 와락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유난히 강하게.
"만약, 피난에 성공한 제가 그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라도 주인님을 모시게 된 지금의 저만큼 행복할 수는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리 말하자, 주인의 허리를 껴안고 있던 록시아의 가녀린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가 버렸다. 앞으로도 이 사람만을 영원히 모시면서 살고 싶다고 애원하듯이.
소녀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전해졌는지, 로덴은 그녀가 만족하여 스스로 거리를 벌릴 때까지 등을 쓰다듬거나 토닥토닥 거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말해주니까 무척이나 기뻐. 나도 록시아랑 만난 이후부터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나 해야 할까… 여기서 계속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생겼거든."
로덴은 과거에 서로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혼자서 여행하고, 생활하는 고독을 고집하게 되면서 점차 마음이 메말랐었다.
경매장에서 록시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마왕이라는 특징 하나 때문에 소녀를 샀던 것뿐이지만… 같이 지낼수록 로덴의 마음속에서 록시아의 존재는 마왕이라는 특이점 따위. 이제 와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로 뒤바뀌었다.
한편, 여태껏 정신없이 주인을 끌어안고 있던 소녀는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주인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본다.
하나같이 로덴을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는 시선이 쏠려있는 게 느껴졌다.
"저도 참,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장소에서 너무 어리광 부렸네요. 혹시라도 제 행동이 주인님을 불쾌하게 했다면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을게요."
"기분 나쁠게 뭐가 있다고… 난 괜찮아. 산책이나 마저하자. 이제 삼일 남았으니까, 이 주변의 경치를 최대한 눈에 담아둬야지."
"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받은 두 남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데이트를 이어갔다.
* * *
날이 어두워지자, 미리 약속대로 다시 합류한 네 사람은 시장을 찾아갔다.
누가 항구 도시의 시장 아니랄까 봐 이 주변은 해산물들 위주로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햐아~! 이제 비린내도 익숙해졌어. 여기 지내는 동안 생선은 종류별로 실컷 먹어봤네."
"응, 응. 평소에는 먹기 힘드니까. 이럴 때 원 없이 먹어야지."
현대와 달리 이쪽에서는 냉동 보관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만큼, 바다와 하천에서 멀찍이 떨어진 도시의 시장에서는 신선한 생선을 구매할 수 없는 상황이다.
뭐…, 메림처럼 얼음 속성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고서 냉동된 생선을 도시까지 운송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인건비와 운송비 덕분에 서민들은 감히 넘보기 힘들 정도로 가격이 껑충 뛰어오르는 게 문제지만.
평소에는 구하기 힘든, 고급 식재료로 분류되는 바다생물들이 풍부하게 진열되어 있는 수산물 시장의 풍경은 가히 장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펄떡펄떡!
"꺄앗?!"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에서 로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고 있던 록시아는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커다란 생선이 예고도 없이 팔딱거리자, 몸이 절로 껑충 뛰고 말았다. 귀엽다.
주인의 손을 꽉 잡으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 록시아의 모습은 귀여웠다. 중요해서 한번 더 강조했다.
"오, 저쪽이 느낌이 좋은데? 오늘 저녁은 저기서 먹자!"
선두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메림의 가리킨 식당으로 들어간 일행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불판이 준비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당연히 해산물 위주로 잔뜩 주문했다.
곧이어 점원이 가져온, 접시에 잔뜩 쌓여 나온 신선한 해산물을 차례대로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집게를 들고 있는 로덴이 불판에 놓인 해산물들을 휘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록시아는 들고 있던 집게를 맞부딪치며 딱딱 거리는 흥겨운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도 즐거워 보인다. 그녀에게 꼬리가 달려있었다면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겠지.
"삼촌, 이런 것도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딱딱해 보이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록시아가 집게로 가리킨 것은 딱딱한 돌멩이가 절로 연상되는 회갈색 덩어리. 순진무구한 소녀의 질문에 싱긋 웃은 로덴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갈색 덩어리들이 저절로 입을 쩍 벌리니 푹 익은 덕에 탱글탱글한 조갯살이 드러났다.
"우와앗!"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록시아의 입에서 갈채가 쏟아진다. 옆자리의 로덴만이 아니라 맞은편에 있던 쌍둥이 자매도 소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다 익었네. 슬슬 먹자."
"네~!"
로덴이 나직이 말하니 세 명의 여인이 나란히 대답했고, 한동안 네 사람은 조개만이 아니라, 생선과 새우의 소금구이도 원 없이 즐겼다.
꽉 찬 배를 감싸고 가게를 나온 로덴 일행은 밤에 즐길 야식의 재료들을 고르기 위해 다시 시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우우…."
한편,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정확히는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의 모습만을 보며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추악한 얼굴의 어느 남자가 있었다.
* * *
"씨발."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만의 낙원에서 가학적인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던 페트로그는 돌연 행위를 중단했다.
"……."
더 이상 가학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에라이 씹… 더 이상 안 움직이게 돼버렸잖아."
약발이 너무 셌나? 조절 좀 할 걸 그랬네….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여자였던 것을 내려다본 페트로그는 상대방이 죽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인간의 죽음을 슬퍼한다… 같은 정상적인 이유가 아니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딴 짓은 안 했겠지.
그저 돈이 아깝다 생각했기에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가학으로 인한 쾌락 다음으로 우선시되는 것은 돈과 보석이다.
돼지는 최소한의 옷만 걸쳐 입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문 앞에는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의 밑에서 일한 몇몇 조직원은 그의 면상을 보자마자 방에 있던 여자가 어떻게 돼버렸는지 대강 짐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직원들의 인사말을 들은 채 만채하며 사막의 대륙에서 건너온 특제 시가를 입에 꼬나문 페트로그는 여자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거, 평소처럼 처리해서 바다에 적당히 뿌려. 혹시 쌓였으면 작업하기 전에 니들끼리 한번 맛있게 돌려먹던가. 클클클…."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린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마음속으로 '역겨운 돼지새끼'라고 외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흥이 완전히 깨져버린 페트로그는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나서 호위를 동반한 채 창관을, 홍등가 거리를 빠져나왔다.
조금 전에 돼지는 사막의 대륙으로 떠났던 상선이 이 도시의 항구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달리 말하면 오늘은 페트로그가 아주 좋아하는 사막의 보석을 고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살덩어리는 평소에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매우 귀찮아 하지만, 값비싼 보석을 고를 때만큼은 직접 보고 만져야만 성이 찬다.
"?!!!"
잠시 후, 걸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시장을 지나치고 있던 페트로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죽고 못 사는 보석보다도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세 명의 여자였다.
아저씨, 아저씨! 이번엔 저쪽으로 가보자! 빨리, 빨리, 빨리~!!
메림! 또 멋대로 뛰어다니지 말라니까! 로덴 씨랑 록시아가 곤란해하잖아!
메림 언니! 저희도 같이 가요!
"…후우… 후우우우…."
세 여자 사이에 체격이 큰 남자도 섞여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마약으로 길들인, 나름대로 엄선한 창녀들의 외모가 싸구려로 보일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쌍둥이 자매의 모습과 갓 피어난 꽃처럼 청순한 미소녀의 모습은 페트로그의 면상만큼이나 추악한 마음속에 욕망이 피어오르게 했다.
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
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
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갖고싶어
갖고 싶어.
때리고 싶어.
내 주먹으로 멍투성이가 되어버린 저년들의 몸을 보고 싶어.
안고 싶어.
깔아 뭉개고 싶어.
……저건 이제 내가 가질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