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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27화 (27/149)

〈 27화 〉 항구도시 (3)

* * *

규칙적으로 덜커덩 거리는 쌍두마차 안에서 누구다 할 거 없이 전원 죽은 동태 같은 눈동자가 돼버린 네 사람.

일행 중에 입술을 여러 번 오물오물거리던 메림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여인숙."

"숙…, 숙… 숙맥?"

"맥…, 맥주요."

"주름살."

로덴의 차례가 끝나고 다시 메림의 차례가 되돌아왔다.

"살… 살… 살…."

하아아…

"살려줘…."

"인마, 그건 단어가 아니지."

로덴 일행이 합류한 중소규모의 상단이 항구도시를 향해 출발한 지 어느덧 사흘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잠도 아예 안 오는 마당이라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서 끝말잇기까지 동원한 상황.

…뭐, 그나마 이 네 사람은 상대적으로 쾌적한 환경에서 먹고 자고 있으니 양반이다.

마차를 둘러싼 상단 호위병들과 고용된 모험가들의 처진 모습과 낯짝은 아주 그냥 좀비가 따로 없었다.

사흘간 계속 행군하느라 체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데다가 야영을 할 때는 돌아가며 불침번도 섰고, 결정적으로 상행길 중간중간에 마주하는 마물의 습격을 신경 쓰느라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상단의 규모가 은근히 큰 덕분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산적단의 습격만큼은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그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창문 너머로 반 좀비가 되버린 동업자들의 상태를 바라본 쌍둥이 자매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으… 저걸 보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단 호위 의뢰만큼은 받지 말아야겠어."

"동감이야."

…옛날에 나도 상단 호위 의뢰는 딱 한번 받은 이후로 다신 쳐다보지도 않았었지.

로덴 일행은 비싼 돈 내고 이동용 마차에 탑승한 손님의 입장인 만큼, 마물들과의 전투에는 딱히 관여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위한 준비 자세만 취했을 뿐.

호위병들 중에 크게 다친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다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끝말잇기를 이어가던 중 은은하게 불어오기 시작한 바닷바람이 로덴 일행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죽어있는 눈빛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저편에서부터 새하얀 건물들과 기다리고 기다리던 푸르른 바다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도착이다!!!"

"우워어어어어!!!!!"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호위들이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처럼 낯빛이 밝아져서는 일제히 환호의 함성을 터트렸다.

달라진 공기와 사방에서 들리는 함성소리에 눈을 번쩍 뜬 록시아는 몸을 덮어둔 담요를 치우고는 가까운 창문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세, 세상에! 주… 삼촌, 삼촌! 사방이 온통 물로 가득해요! 저게 말로만 듣던 바다인가요?!"

"응, 지금 보이는 게 바다야. 제법 신기하지?"

"와아아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된 소녀는 잔뜩 흥분한 탓에 주인님이란 호칭이 튀어나오려다가 급히 고치면서도 노을빛에 물든 바다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로덴은 자리에서 딱히 움직이지 않고, 팔짱을 낀 자세로 고개만 돌리며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 세 여자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마차 안에서 사흘 내내 앉아있는 건 상당히 고역이긴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정신이 팔려있는 록시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바다에 데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편,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는 쌍둥이 자매는 두 사람 사이에 거울이 비치된 것 마냥 대칭된 자세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면서 떠들었다.

"아~! 이게 얼마만의 바다야~? 진짜 오랜만에 본다. 안 그래? 마릴."

"그러게, 어렸을 적에 봤을 때 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

…어릴 때 해안가 근처에서 살거나, 휴양지에 놀러 갈 수 있을 만큼 잘 살았었나?

쌍둥이 자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덴은 두 여자의 어린 시절이 살짝 신경 쓰였지만, 딱 그뿐.

자기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만큼 타인의 과거를 들춰낼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궁금증을 떨쳐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도시의 풍경은 전반적으로 하얀색 색감으로 도배되어 있고, 바다 냄새가 가득해서 색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여담으로 항구도시라 그런지 딱히 성벽으로 둘러 쌓이진 않았다. 외곽에 경비초소가 지어져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쉬고 싶었는지 속도를 높인 상단이 순식간에 도시에 들어서자, 초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튀어나와 마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상단주가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가죽 주머니 하나를 조용히 넘겨주니 조사는 상당히 간소하게 끝났다.

"삼촌, 지금 저 아저씨가 건네준 건 통행비예요?"

"좀 더 정확하게는 뇌물이지."

어느 세상이든 뇌물이라는 것은 복잡한 행정 절차를 상당 부분 생략하게 도와주는 윤활유 같은 존재다.

"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항구도시 라드비에 도착하게 됐다. 로덴 일행은 각자의 짐을 빠짐없이 챙기고 쌍두마차에서 일제히 뛰어내렸다.

항구도시의 바닥은 하얀 돌이 깔려있는 덕에 몹시 깨끗해 보여서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참 좋다.

하얀 돌바닥을 밟게 된 여자들은 하나같이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쭉 켰다.

"쓰으으읍~~! 하아아아~! 이게 바로 바다 냄새지."

"여전히 기분 좋은 바람이네. 록시아는 어떻니?"

"생전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라서 엄청 신기해요. 뭔가 미묘하게 짠 냄새도 나고…"

말없이 몸을 풀고 있는 로덴은 아직도 영 찌뿌둥한 느낌이었지만, 바닷가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 덕분에 정신만은 맑게 개였다.

로덴은 과거에 모험 겸 여행은 질릴 만큼 많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순수하게 휴양을 즐긴 일은 없었다. 색다른 신선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면 즉시 바다로 떠나보실까!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그렇네."

메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나머지 세 사람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끼룩끼룩 거리는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하늘은 서서히 꼭두서니 색으로 물들어갔다.

이번에는 모처럼 로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즐길 거리가 해변만 있는 건 아니잖아. 날도 어두워졌으니 일단은 숙소 먼저 잡고서 누워있다가, 야시장이나 가보자고."

그렇게 해서 로덴 일행은 해변을 즐기는 것은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고, 일주일간 몸을 맡길 숙소를 찾으러 기분 좋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도시는 겉으로는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더라도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어두운 이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지리와 자원의 이점을 이용한 관광사업과 무역, 어업 등의 해양업 덕분에 늘 풍족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항구도시 라드비 또한 마찬가지다.

라드비에 위치한 홍등가의 뒷골목.

골목길 안 쪽 깊숙하게 아주 교묘하게 숨겨진, 상당히 특수한 취향의 고객들만이 애용하는 은밀한 창관이 있었다.

이곳은 그다지 화려한 방은 아니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방에는 큼지막한 옷장과 침대 하나뿐이 없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한정되어 있다.

퍼억­!

"…!"

"후우욱…!"

허름한 방의 구조와는 달리 침대만은 굉장히 푹신푹신한 솜으로 채워진 고급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가난한 서민들은 좀처럼 넘보기 힘든 훌륭한 침대다.

그러한 침대 위에는 헐벗고 있는 남녀가 있었다.

퍼어억­!

"……."

"후욱… 후우우우…!"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있는 남녀 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의 비슷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남녀의 모습은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기분 나쁜 숨소리를 내뿜으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대머리의 주먹은 붉은 피가 묻어 있었고, 그의 아래에 깔려있는 알몸의 여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얼굴이 퉁퉁 불어있다.

대머리 남자의 외관은 중년으로 추정되고, 살이 뒤룩뒤룩 쪄있는 몸뚱이는 그야말로 볼품없기 짝이 없었다.

남자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군살 덕분에 그의 얼굴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돼지 같은 녀석이라 평가할 것이다.

이 남자의 이름은 페트로그라고 한다.

항구도시 라드비에서 은밀하게 마약을 유통하거나 특수한 불법 창관을 운영하면서 귀족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부를 축척한 남자다.

그는 창관의 운영자인 것과 동시에 고객이다.

퍼억­!

"……."

페트로그는 살집이 꽉 차있는 주먹을 다시 한번 휘둘렀다. 방안에 살과 살이 부딪히는 뭉툭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저항하지 못하는 여자의 몸을 멍투성이로 만드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오싹한 감촉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돼지의 얼굴에 가학적인 희열이 가득 찬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씨발년! 벌써 뻗어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야?! 아앙?"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감싸면서 비명을 지르던 여자가 더 이상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로그는 쯧, 하는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망할! 어쩌다가 굴러들어 오는 수인은 튼튼하지만 그놈의 털 때문에 손맛이 별로고, 인간들은 몇 분을 버티질 못해!

씨발, 미치겠네… 될 수 있다면 인간하고 손맛이 비슷하면서도 몸이 튼튼한 마족을 좀 구하고 싶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돼지는 문득 반년도 넘게 지난 일을 떠올리며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제기랄! 그때 돈을 더 갖고 왔어야 했는데! 딱 내 취향인 마족계집을 손에 넣을 기회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리다니!!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변두리 영지에 우연찮게 들렀을 때, 기대하지도 못했던 마족 소녀의 모습을 봤을 당시 돈이 모자라서 입찰하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길길이 화를 낸다.

돼지는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여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마족년을 한 번쯤 원 없이 때려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페트로그는 몸 밑에 깔려있는 여자의 아랫도리를 향해 자그마한 고기 막대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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