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항구도시 (2)
* * *
항구도시로 휴가를 떠날 계획을 짜기 시작한 지, 딱 사흘째 되던 날의 아침.
문을 여는 시간부터 가게에 순차적으로 몰려들었던 모험가들이 구매한 포션을 챙기면서 다시 순차적으로 빠져나갔다.
떠나가는 모험가들을 배웅하기 위해 가게 문 앞으로 나온 록시아는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세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들 안녕히 가세요!"
최대한 좋은 조건의 의뢰를 받기 위해 서둘러 길드로 향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고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선 모험가들… 아니, 남자들은 헤벌쭉한 표정으로 록시아를 향해 손을 맞흔들며 떠나갔다.
사람들이 멀어지자, 록시아는 잔돈을 정리하고 있던 로덴에게 다가왔다.
"어제랑 마찬가지로 시작하자마자 진열대가 싹 털렸군."
"아무래도 오늘 이후로는 당분간 쉬게 되니까요."
가게를 잠시 휴업하게 될 것이란 소문이 퍼졌는지, 전날부터 문을 열자마자 영지 주변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이 몰려들면서 겨우 사흘 만에 가게 안의 포션과 약초가 동이 났다.
한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쁜 오산이네. 쌍둥이하고 약속한 날이 올 때까지 여유롭게 준비하면 되겠어.
"이제 지하실에 남은 것들만 오후에 다 팔면 끝나겠구나. 록시아, 문 좀 걸어두고서 밑으로 따라오렴."
"알겠습니다. 주인님."
간판을 외출로 바꾼 뒤,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온 록시아랑 같이 지하로 내려간 로덴은 마지막 남은 재고로 포션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후우…!"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반지를 빼고 마족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록시아는 해방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작업장의 맨 구석자리에 있는 큼지막한 솥으로 다가가 완드를 꺼내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서 정신을 집중한다.
쪼르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에서 나오기 시작한 맑은 물은 솥 안에 미리 그어둔 표시선의 높이까지 가득 채워졌다.
록시아는 솥을 채워낸 직후, 그 아래에 완드를 조준해서 마력이 깃든 불을 붙였다.
물이 서서히 끓기 시작하자, 말린 버섯이나, 계피, 감초 등의 손수 만든 한약재들을 미리 준비한 로덴은 그것들을 솥 안에 아낌없이 부어넣었다.
솥이 다 식는 오후에 원액을 알맞게 섞어주기만 하면 포션을 만드는 이 작업도 당분간은 안녕이군.
약재들과 함께 펄펄 끓기 시작한 솥과 자동 배합기에 남아있는 마지막 원액을 번갈아서 바라보던 로덴은 록시아가 보여준 마법을 칭찬하면서 말을 건넸다.
"물하고 불을 원하는 만큼 바로바로 조절할 수 있으니 확실히 편하긴 하네. 이번에도 도와줘서 고마워."
"제 마법이 주인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그는 곧장 큼지막한 솥과 조금 떨어진, 지하실의 평평한 돌바닥에 편히 앉았다.
"불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너는 위에서 쉬고 있어. 나른하면 침대에 누워있어도 돼."
"저…."
주인의 말을 듣고서 잠시 머뭇거리던 록시아는 로덴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를 기대며 그를 올려다봤다.
"주인님만 괜찮다면 이대로 옆에 앉아있어도 될까요?"
"바닥이 딱딱해서 차갑고 불편할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푹신한 침대에 눕는 것보다 주인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게 훨씬 더 좋아요."
본인의 입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로덴은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고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에 기대고 있는 소녀의 비어있는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에 취했을 뿐인, 별 다른 뜻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소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라 버렸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정작 로덴 본인은 여전히 불을 보고 있느라 록시아의 몸에 찾아온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소녀에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영 애매했다.
"주인님."
"응?"
그제야 로덴은 록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저는… 주인님이…."
주인님이 너무 좋아요. 메림 언니처럼 저도 주인님에게 안기고 싶어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소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한없이 상냥하시고 멋지신 저의 주인님. 그리고 언제나 밝게 웃으시고 아는 것도 많으신 스승님인 메림 언니.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쌍이면서 같은 인간이죠.
반면에 저는 보잘것없는 노예인 데다가…
주인에게 받은 반지 덕분에 평소에는 인간처럼 지내고 있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마족.
머리에 돋아나 있는 뿔을 매만지는 순간마다 태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록시아는 아직 덜 자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더군다나 성숙한 어른인 메림 언니에 비해서 제 몸은 이렇게나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마족이면서 노예일 뿐인 자기가 인간인 주인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함부로 말했다간 지금의 관계가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다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 감정은 록시아의 입에서 다른 말을 꺼내게 만들었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주인님에게 늘 감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잘 부탁해. 너하고 같이 지내고 난 이후로 '이쪽'에서의 생활이 많이 즐거워지고 있거든."
"네…."
록시아는 저렇게 대답해 주는 주인이 좋으면서도 자신을 한 명의 여자가 아닌 딸처럼만 대하고 있는 주인의 태도가 은근히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 * *
출발 당일날.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 각자 크고 작은 배낭을 등에 맨 상태로 가게에서 나온 로덴과 록시아는 한동안은 열리지 않을 가게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이렇게 문하고 창문을 잠가두기만 하는 걸로 정말로 괜찮을까요? 아무리 치안이 좋은 도시라지만 여기는 외곽이라서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 많이 불안하지 않을까 싶은데…."
한때는 빈민가 생활을 했던 록시아에게 있어,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오랫동안 비어있는 집이란 털어먹기 딱 좋은 장소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이해한 로덴은 나긋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동안 집을 오래 비울 일이 없어서 얘기를 안 하긴 했구나. 이 집은 너하고 같이 지내기 전, 개조 공사를 했을 때 각인 계약도 같이 해둔 상태라 괜찮아.
"각인… 이요?"
"쉽게 말하자면 마법을 글자처럼 새겨 넣는 거지. 소모성이고, 요금이 좀 비싸긴 해도 상당히 편리해."
로덴이 마탑에 방문해서 가게에 새겨놓은 마법은 두 가지다.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효과를 가진 마나 실드랑 미리 지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사방에 큰 소리를 내보내는 워닝.
"뭐, 형식상 새겨둔 실드라서 망치 같은 걸로 작정하고 후려치면 간단히 부서지는 정도지만, 가게 안으로 누군가 침입하면 경보음이 울려서 도시의 경비원들이 달려오게 돼있어."
그동안 세금을 꼬박꼬박 잘 냈으니 후딱 달려오겠지. 애초에 재산이랑 귀중품은 모조리 인벤토리에 넣은 상태기도 하고.
"마법은 그런 것도 되는군요… 신기하네요."
로덴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가게에 관한 걱정을 떨쳐낸 록시아는 주인과 함께 쌍둥이 자매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배낭을 메고 있는 쌍둥이 자매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특히 메림은 팔이 떨어질 기세로 방방 흔든다.
쌍둥이 자매는 깔맞춤으로 준비한, 윗가슴과 허리가 노출된 과감한 복장으로 벌써부터 피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고, 하반신에는 핫팬츠까지 입고 있어서 탄력 있는 허벅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아무래도 놀러 가는 것인 만큼 방어구는 착용하지 않고 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 메림은 스태프를 마릴은 아밍 소드를 소지하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 수수한 옷을 입은 로덴 아저씨는 넘어가고, 록시아가 입고 있는 건 처음 보는 옷 같은데 여행 간다고 꾸며 입은 거야?"
"잘 어울리나요?"
"무척 잘 어울려. 로덴 씨가 골라주신 거니?"
"평소에 자주 방문하는 의상점 여주인분이 골라주셨어요."
잘 어울린다는 말에 표정이 한층 밝아진 록시아의 차림새는 두 사람에 비하면 어깨와 팔만 노출된 상태라 수수하지만, 그 나이 때에 잘 어울리는 귀여운 원피스였다.
"슬슬 출발하겠어. 얼른 타자."
"네~!"
로덴 일행이 선택한 이동 수단은 항구도시인 라드비로 향하는 상단과 동행하는 마차였다.
가격만 따지면 짐마차가 훨씬 싸겠지만, 모처럼의 여행이니 쾌적한 쪽으로 고르자고 미리 합의한 상황.
네 사람은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동용 쌍두마차로 걸어가 마부에게 말을 건넸다.
"은화 두 닢입니다."
"여기요."
로덴은 마부에게 값을 지불한 뒤, 옆에 있던 메림이 튕겨낸 은화를 어렵지 않게 받았다.
"곧 있으면 상단이 출발할 것이니 저희도 따라서 출발할 겁니다."
곧장 마차 안으로 들어간 쌍둥이 자매와 로덴과 록시아는 각각 양쪽에 앉은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잘 꾸며진 마차 안은 상당히 신경 써서 만들어진 티가 났다.
"마차 안에 푹신푹신한 의자가 있다니… 심지어 창문까지 달려있어요."
노예로 붙잡혔을 때는 철창 안에 끌려다니느라 짐마차만 타봤던 게 전부인 록시아는 쾌적한 내부 공간이 무척이나 놀라웠는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녀가 창문을 열고서 얼굴을 빼꼼 내밀자, 상당히 규모 있는 행렬이 대기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짐을 가득히 실은 상단의 마차랑 그들에게 고용된 전문 호위병들. 일부 모험가도 섞여있고, 그들의 뒤에는 보따리상이나 품팔이꾼들도 따라붙었다.
목적지가 항구도시인만큼, 오고 가는 물건이 많았기에 상행단의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한편, 동생과 함께 지도를 읽고 있던 메림은 도착까지 얼마나 걸릴지 대충 계산해봤다.
"별문제 없이 쭉 간다고 치면 4, 5일 정도 걸리겠네. 흐흐, 도시에 도착하면 일주일간은 내일 죽을 사람처럼 놀아보자고."
"일단 숙소 먼저 잡아야겠지."
항구도시에 도착하면 뭘 할지 정신없이 떠들고 있다 보니 주변의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차가 출발한 것이다.
로덴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오래간만에 다시 보게 되는 바다를 상상하며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던 로덴의 표정이 후회가 가득한 표정으로 바뀐 것은 마차가 출발한 지 삼일째에 이르게 된 날부터다.
소재가 완전히 고갈되고, 이제 더 이상은 떠들만한 주제도 없었기에 네 사람은 멍하니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잠을 청하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끄으으…."
벌써부터 집이 그리워지는 느낌이네….
앓는 소리를 낸 로덴은 지금까지의 여행길과 달리 마차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환경이 이렇게나 괴로울 줄은 차마 예상치 못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로덴은 자동차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지 절실히 체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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