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25화 (25/149)

〈 25화 〉 항구도시

* * *

가게 안쪽에서 이론수업을 진행 중인 메림과 록시아를 뒤로한 로덴은 혼자서 가게 구역에 남아 간간히 방문하고 있는 모험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예, 그 포션은 하나당 대동화 다섯 닢. 맞습니다."

"길드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서 싸게 팔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진짜였네요."

"잠시만요오… 금방 꺼낼게요."

로덴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앳된 얼굴의 남녀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목에 걸린 인식표는 아직 새 것인 티가 역력한 백자판이다.

즉, 최근에 모험가로 등록한 백자 등급의 신출내기다.

두 사람 모두 검과 가슴 보호대만을 장비하고 있는 걸 보면 고향 마을에서 챙겨 온 재산이 넉넉하진 못한 듯했다.

그걸 증명하듯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모험가가 카운터 위에 올린 금액은 꾀죄죄한 대동화와 동화들이 뒤섞여있다.

어디 보자… 둘, 넷………여덟, 아홉… 흠, 동화 하나가 모자라네?

상대방의 표정을 확인해보니 일부러 모자라게 낸 눈치는 아니었다.

로덴은 동화가 하나 부족하다고 말할까 짧게 고민하다가도 신출내기 모험가의 지갑 사정이 어떤지 훤히 알고 있던 그는 이번 한 번은 그냥 모르는 척,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젊은 남녀는 자기들의 기준으로 거금을 투자해서 마련한 최하급 포션을 하나씩 챙긴 뒤에 가게에서 떠나갔고, 그들과 교대하듯이 곧바로 가게로 들어온 사람은 친숙한 얼굴의 여성이다.

"안녕하세요. 로덴 씨, 메림은 아직 안에 남아있죠?"

"응, 좀 있으면 끝날 시간이니까 편히 앉아있어."

실레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손님용 의자에 앉은 여성은 언니인 메림을 데리러 온 그녀의 동생, 마릴이다.

로덴은 평소처럼 차를 끓여주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거실의 식탁에서 책을 펼치고 있는 메림과 록시아의 모습을 보게 됐다.

"메림, 네 동생 왔어. 슬슬 시간도 다 됐으니까 적당히 마무리해."

"벌써~? 얘한테 가르쳐주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런지 시간 참 빨리도 지나가네. 그치?"

"그러게요. 아직 메림 언니한테 배울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는 남았을 줄 알았는데."

짤막한 말을 건네며 두 여자를 지나친 로덴은 얼마 지나지 않아 4인분의 차를 모두 끓여냈고, 셋이서 함께 마릴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향했다.

마릴을 향해 가장 먼저 다가간 사람은 록시아다. 그녀는 점심시간에 메림에게 받은 고깔모자를 자랑하는 듯한, 살짝 과장된 몸동작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마릴 언니."

"록시아는 매번 볼 때마다 더 예뻐지네? 그 모자도 너무 잘 어울려."

"에헤헤, 고마워요."

헤실거리는 표정이 된 록시아의 모자 위에 손을 얹어서 한참 쓰다듬은 메림은 마릴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신경 써서 준비해줬으니까 당연히 어울리지~ 그나저나, 마릴 너는 오늘 캡틴하고 다른 도시에서 넘어왔다는 한 명… 분명히 수인이랬나? 하여간에 셋이서 같이 출발했다는 채집 임무는 할 만했어?"

"응, 그 사람이 족집게 같이 잘 찾아내 주시더라고. 수인이라서 싸움도 엄청 잘해. 다음에 너도 같이 만나봐."

"읏차차… 수인이 이 도시에 왔어요?"

록시아는 계산대에 놓여있던 의자 하나를 손님용 테이블의 옆쪽에 옮겨서 쌍둥이 자매와 나란히 앉았다.

"록시아는 아직 본 적 없으려나? 털이 북슬북슬한 이종족인데."

"수인에 관해서는 책으로만 접해봤지, 직접 보진 못했어요."

여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가 점차 길어진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말없이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로덴은 찻잔을 든 채 창가로 조용히 걸어갔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차를 들이켠 로덴은 마왕을 쓰러뜨린 이후부터 이 영지에 정착하기 전까지의… 14년간의 여정을 떠올려봤다.

마왕성에서 막 빠져나왔을 시절에는 이름도 바꾸고, 머리도 염색하고, 까마귀를 여러 사람에게 몰래몰래 써서 새로운 신분도 얻느라 제법 바빴지.

20대 초반이었던 그가 금발로 염색한 김에 피부도 그을려볼까 하는 철없는 고민을 하다가도 그건 좀 선을 많이 넘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관두던 기억도 났다.

하여튼, 로덴이 맨 처음으로 골랐던 새로운 신분은 그럭저럭 괜찮은 실력을 가진 은 등급의 떠돌이 모험가. 그때는 이름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을 사용했다.

그 시절에는 모험가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세상 곳곳에 숨겨진 유적도 조사해보고,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의 이곳저곳도 다양하게 돌아다녔었다.

로덴이 모험을 계속했던 원동력은 단 하나였다. 원래 살던 세계,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찾아내는 것.

가능성을 찾기 위해 세상 여기저기를 탐험한다라… 가만 생각해보면 그때 했던 것들이 진정한 의미의 모험인 거 같은데, 거의 10년 정도 싸돌아 다녔던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지구로 돌아가려고 했냐, 라고 누군가가 로덴에게 물어본다면… 그저 자신이 태어났던 그리운 땅을 한번 더 밟고 싶다는 생각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는 친구들의 얼굴은커녕, 한의원을 운영했던 부모님의 얼굴도 가물가물하군. 이름만 간신히 기억나.

10년에 걸친 모험 끝에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깔끔히 포기한 로덴은 다시 한번 신분을 바꾸고, 남은 세월 동안 동방의 대륙에서 다양한 지식과 약초학을 익힌 뒤에 다시 바다를 건너서 이 영지에 발을 들이게 됐다.

"흠, 바다라…."

옛 기억을 더듬던 중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인 바다를 중얼거린 로덴은 여전히 쌍둥이 자매와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록시아에게 다가갔다.

"록시아, 나랑 같이 여기서 지낸 지 벌써 반년도 훨씬 넘었는데… 그동안 매일같이 같은 풍경만 보면서 지내고 있자니 답답하진 않아?"

"네? 아, 아뇨. 전혀요. 전 지금이 가장 행복한데요. 삼촌."

"으응~? 이 아저씨는 뜬금없이 무슨 얘기를 꺼내시려는 걸까?"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로덴이 목소리를 내자, 세 여자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에게 집중됐다.

"별건 아니고, 얘를 너무 이쪽에만 묶어둔 거 같아서 기분전환을 위해 바다에 데려가 볼까 하고. 여름이잖아."

"바다요…?"

"어머…."

짝!짝!짝!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로덴이 꺼낸 말을 들은 록시아와 마릴은 말끝을 흐렸고, 메림은 물개처럼 손뼉을 마주치며 어머나를 연발했다.

"바다?!! 어디? 어디? 어디? 로덴 아저씨, 어디로 갈 생각인데?"

눈을 크게 뜬 메림이 정신 산만하게 내던지는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은 로덴은 머릿속에 떠오른 방향을 말했다.

"…여기서 남쪽 방향에 항구도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마라이트 남작령에 있는 거기?!"

"그런 이름이던가… 너네는 가본 적 있어?"

"들어본 적은 있지. 그 항구도시에 있는 해변의 경치가 끝내줘서 휴양지로 제법 유명하다고 하던데."

주인과 스승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록시아는 눈을 깜빡깜빡 거리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바다는 어떤 곳이에요?"

그녀의 성장 배경을 생각하면 바다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록시아의 인생사를 대강 알고 있는 로덴과 바다를 모르는 사람이 드문 것도 아니라 생각한 쌍둥이 자매는 그녀에게 각자 떠오르는 바다의 이미지를 한 번씩 이야기해줬다.

"사방으로 모래하고 바닷물이 끝없이 펼쳐진 장소야."

"흐흐흐, 지금까지 록시아가 본 강과 호수들을 모두 합쳐도 바다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지."

"음… 그리고 몽땅 소금물로 되어있어. 신기하게 생긴 물고기들도 많이 있고."

세 사람의 들려준 바다를 상상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록시아를 흐뭇하게 바라본 로덴은 자세를 낮춰서 그녀와 같은 높이로 눈을 마주했다.

"어때? 바다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록시아만 괜찮다면 가까운 날에 같이 바다로 가보려고 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굉장히 궁금하긴 한데… 저희가 떠나면 이 가게는요?"

"가게는 잠깐 쉬면 되잖아. 사람이 가끔씩은 여행도 하면서 쉬엄쉬엄 살아야지."

"옳소! 옳소! 옳소! 옳소오!!"

옆자리에 있는 메림은 로덴의 신봉자가 된 듯이 그의 옆에 찰싹 붙어서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록시아는 무심결에 쿡쿡, 거리며 웃다가도 로덴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삼촌! 저도 바다에 가보고 싶어 졌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오늘부터 당장 휴가 계획을 짜야겠어."

솔직한 심정을 밝힌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로덴은 가게에 남아있는 포션과 약초들의 수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봤다.

흠, 남은 재고를 생각하면 한 일주일쯤 뒤에 출발할 수 있겠군. 그리고 챙겨야 할 물건은…

"저기저기저기,아저씨아저씨아저씨!"

생각에 빠져있던 로덴의 집중을 깨뜨린 건, 따발총처럼 말을 건네 오는 메림의 목소리였다.

"…귀 안 먹었으니까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한 번만 불러. 무슨 일이야?"

로덴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동생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은 메림은 히죽 웃더니

"우리도 같이 가자. 바다."

"너희도?"

"응, 응. 해변가 하면 물놀이지. 로덴 아저씨는 딱 보니까 물에 안 들어가고 모래판에 벌러덩 누워서 여자들 수영복이나 구경할 음침한 상인데, 그러면 록시아랑 물놀이를 해줄 상대가 없잖아. 그래서야 바다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고."

"지금 은근슬쩍 굉장히 모욕적인 말을…"

"그런 록시아를 위해 같이 놀아줄 이쁜 언니들이 필요하시다~ 이 말씀이지."

로덴이 하는 말을 칼같이 잘라내며 자기가 할 말을 다한 메림은 끌어안고 있는 마릴과 눈을 마주쳤다.

"마릴은 어때? 오래간만에 바다에 가고 싶지 않아? 그동안 우리도 돈은 제법 모았으니 이번 기회에 실컷 즐겨봐야지."

"로덴 씨랑 록시아만 괜찮다고 한다면… 솔직히 가보고 싶긴 해."

"저는 괜찮아요! 메림 언니랑 마릴 언니하고 같이 가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지금 상황에서 거절하면 나만 나쁜 놈이 되겠는데. 저 왈가닥이 수영복 어쩌고 한 것만 빼면 솔직히 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어차피 바다에 가는 거라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있는 게 록시아에게도 더 즐거운 경험일 것이라 생각한 로덴은 록시아 만이 아닌, 쌍둥이 자매와도 함께 항구도시로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