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20화 (20/149)

〈 20화 〉 마법사의 고민 (5)

* * *

"하아…."

집에 남은 빈방에서 하룻밤 재워달라는 말을 듣고, 한숨을 푹 쉰 로덴은 지갑을 뒤적거리고는 메림에게 은화 한 닢을 내밀었다.

"자, 이 주변의 구체적인 숙박비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돈이면 2인실은 문제없이 구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메림은 은화를 받지 않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이이~ 돈이 없다는 게 아니라고 아저씨이~! 잘 생각해봐~! 지금 나랑 마릴은 둘 다 얼큰하게 취해있는 상태잖아~?"

히끅­!

"우리 같은 초절정 미녀 쌍둥이 자매가 무방비한 상태로~ 단 둘이서 여관에 들어가면 아~주, 아~주 위험하지 않겠어~?"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들한테 굉장히 실례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록시아를 업은 자세를 살짝 고쳐 잡은 로덴은 메림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뜬다.

"여관은 믿기 힘드니, 무방비한 상태인 너희 둘을 내 집에서 재워달라?"

"빙고~! 척하면 척이네~!!"

"정말이지… 내 집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잖아."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는 로덴을 올려다본 메림은 취기가 가라앉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덴 아저씨라면 괜찮아."

"…뭐?"

들려오는 당돌한 대답에 로덴은 눈을 번쩍 뜨면서 메림을 바라봤고, 그녀는 로덴이 업고 있는 록시아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그야, 아저씨처럼 딱딱한 대사를 꺼내는 사람은 안전한 법이라고? 더군다나 록시아도 같이 살고 있는 집인걸~?"

어두운 한밤 중의 거리에서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있으니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감각이 예민한 로덴은 등에 업혀있는 록시아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밖에 너무 오래 있었나….

"미리 말하지만, 빈 방에 침대는 없어. 바닥에서 이불만 깔고 자도 상관없는 거면 따라와도 좋아."

"하핫~! 임무 중에 노숙도 자주 해봤는데 뭘, 그러면 신세 좀 질게."

등에서 떨고 있는 록시아를 얼른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 데다가, 술에 절여진 여성 둘이 여관이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메림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소리도 아니라고 판단한 로덴은 쌍둥이 자매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 * *

머리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탈탈 털어내면서 욕실에서 나온 록시아는 졸린 눈을 비비적거렸다.

"다… 씻었어요. 주… 삼촌."

평소의 그녀였다면 집안에서 반지를 빼고, 마족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손님이 같이 있는 상황이라 아직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 졸린 거 같은데,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있으렴."

"네… 오늘은 먼저 잘게요. 삼촌하고 메림 언니도 안녕히들 주무세요…."

"내일 봐~"

눈이 반쯤 감겨 있는 상태에서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록시아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린 마릴도 빈 방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자고 있었으니, 이제 거실에 맨 정신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로덴과 메림 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돌아오는 길에 해장용으로 집어온 탐스러운 포도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그 포도에 손을 뻗은 메림은 두툼한 알맹이 하나를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아~ 달다. 달아."

여기까지 걸어온 사이에 어느 정도 술기운이 달아난 메림은 포도알을 천천히 우물거리면서도 로덴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모를 리 없는 로덴은 포도를 먹다 말고 메림과 눈을 마주쳤다.

"뭐, 할 말 있어?"

"전부터 이런 식으로 단 둘이 남았을 때 아저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괜찮을까?"

"질문에 따라 다르겠지. 일단 말이나 해봐."

"로덴 아저씨는 날 어떻게 생각해?"

단 둘이 남은 상황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건네는 메림의 질문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 로덴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도 일단은 평소의 분위기처럼 대답해 보기로 했다.

"…왈가닥 마법사."

"아하하하! 가차 없네. 모험가 길드에서도 심심찮게 듣던 말이었는데."

유쾌하게 웃으며 포도알을 하나 더 입안으로 집어넣은 메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미리 말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술기운으로 막 내뱉는 말이 아니니까 아저씨도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리 말한 메림은 곧장 로덴의 바로 옆자리에 앉고는 그의 손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있지,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라서 상당히 망설였는데… 나는 아마도 로덴 아저씨를 좋아하게 된 거 같아."

"……."

"아저씨를 좋아하니까 나랑 사귀어 달라거나 하는 그런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은 그냥 내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고 싶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은 메림의 얼굴에는 어느덧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빠짐없이 털어놓겠다며 로덴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하나하나 천천히 나열해본다.

"키도 훤칠한 게 듬직해 보이기도 하고, 얼굴도 꽤 괜찮고, 평소에 조카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기 훈훈해서 좋고, 이렇게 좋은 가게도 차렸으니 경제적으로 넉넉한 거 같아서 좋고… 아, 이건 너무 속물적인가?"

"지나치게 솔직하긴 하네."

"뭐, 이게 내 매력이지. 이것 말고도 내가 로덴 아저씨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몇 개 더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틀림없이 이거라고 생각해."

메림은 이야기 도중에 계속 만지작 거리던 로덴의 손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옮겼다. 그의 손에 배어 있는 약초의 잔향이 물씬 풍겨져 나온다.

"우리 사이에 손을 잡게 된 건 이걸로 정확히 세 번째지? 로덴 아저씨… 아니, 나의 은인이자, 수수께끼의 검사인 러스트 헬름 님아."

영지 내에 퍼져버린 별명을 메림의 입을 통해 들은 로덴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그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한 메림은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처음에는 입술을 겹치는 것으로 시작된 행위는 메림이 수줍게 내민 혀가 로덴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고, 로덴 또한 그녀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면서 농밀한 키스로 바뀌었다.

"하아앗… 하아…! 아저씨…."

축축하고도 미끈한, 두 남녀의 새빨간 살덩이가 엉키고 설켰다.

상당히 능숙하게 혀를 움직이고 있는 로덴에 비해, 먼저 시작한 메림의 혀놀림은 다소 어색했지만… 그녀는 입속에 미리 준비한 것을 들이밀었다.

메림의 입안에 굴러다니고 있던 포도알이 로덴의 입안으로 넘어가 타액과 과육이 섞인 달콤한 즙이 입안에 퍼지게 됐다.

한차례 뜨거운 키스가 끝나고, 두 남녀는 살짝 거리를 두었다.

"후우… 로덴 아저씨,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는 거 같은데…? 순결한 여성의 첫 키스를 가져간 기분은 좀 어떠신지?"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아놔, 이 아저씨는 키스에 대한 감상보다 그걸 묻는 게 먼저야? 안 그래도 나만 첫 키스라서 억울한데. 더 억울하게 시리…."

불평을 토하면서도 입가를 혀로 요염하게 닦아낸 메림은 품속을 뒤적거리면서 로덴의 질문에 대답했다.

"처음에는 내 손에 묻힌 러스트의 냄새랑 이 가게에서 풍겨오는 향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 그러다가 두 번째로 아저씨의 손을 잡아 보고서 서서히 윤곽이 잡혔지.."

로덴은 메림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손에 배어있는 약초의 잔향을 의식했다.

직업 특성상 매일 같이 약초를 만지는 연금술사인 그에게는 이 냄새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약초의 잔향을 염두하지 못했던 건 무리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어제 록시아 몰래 지하로 내려가서 찾아낸 이것 덕분에 확신하게 됐어."

메림이 품속에서 꺼내 든 건 자그마한 녹슨 쇳조각. 정확히는 강화인간의 공격 때문에 찌그러져 버린 녹슨 투구를 지하에서 수리하다가 떨어져 버린 쇳조각이다.

"…분명 지하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하핫! 미안해 아저씨, 어디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한 번쯤은 들어가고 싶어 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 지하에서 딱히 손댄 건 없으니까 화내진 말아줘♡"

사과의 뜻이 담긴 윙크를 하고서 다시 로덴에게 바짝 다가간 메림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을 붙잡아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술술 이야기했다.

"아저씨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포션의 재료 때문에 도시에 방문했을 때, 바로 그때 우리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서 바로 어비스로 달려온 거였지?"

괜히 마법사는 아니군.

"그래."

"후후, 그때도 여러 번 말했지만… 구해줘서 정말… 너무 고마워. 그때부터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어. 근데 로덴 아저씨는 딱 보니까 돈은 원할 거 같지는 않은데…."

메림은 붙잡고 있던 로덴의 손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더니… 풍만하고 부드러운 젖가슴 위에 올려놨다.

"어차피 홍등가에 간간히 들락거리는 걸 보면 싫어할 거 같진 않고, 나도 평범하게 이런 거에 흥미가 좀 있다고나 할까… 여러 가지 의미로 로덴 아저씨랑 한번 해보고 싶어 졌어. 어때? 이러면 서로 윈윈 아냐? 나 솔직히 겁나 예쁘잖아. 이만하면 몸매도 좋고."

본인의 입으로 자기가 미인이라는 말을 주저 없이 말하는 메림을 보며 로덴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덴은 욕실을 가리켰다.

"일단 서로 씻고 나서 시작하자고. 나 먼저 간단히 씻고서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너도 다 씻은 다음에 생각이 바뀌었다면 동생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면 내 방으로 들어오도록 해."

"응… 알았어."

……잠시 후

쏴아아­아!

"후우우…."

막상 이렇게 준비하고서 하려니까 무진장 긴장되네… 처음은 아프다고들 하던데, 진짜 일려나….

씻는 내내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억누르면서 겨우겨우 샤워를 끝마친 메림은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양 손으로 양쪽 뺨을 가볍게 짝짝­! 맞부딪히며 눈을 번쩍 떴다.

수건 한 장만으로 몸을 가린 상태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메림은 로덴이 기다리고 있는 방의 문을 열어 졌혔다.

메림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도 로덴을 향했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에 고정됐다.

"로덴 아저씨, 그건…."

"너도 이게 뭔진 잘 알고 있지?"

옷을 벗고 있는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기다리던 로덴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은 야릇한 분홍색의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는 피임 포션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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