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마법사의 고민 (4)
* * *
으응…? 일곱? 일고옵? 세~븐? 내가 지금 헛것을 봐버렸나?
록시아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두 눈을 비비적거리던 메림은 자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학생의 눈 앞에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
"저기이…, 록시아? 미안한데, 딱 한 번만 더 해보지 않을래?"
"네, 언니."
록시아가 다시 한번 마나를 집중시키자, 그녀의 손바닥에 있는 칠색석이 다시 한번 일곱 가지의 색깔을 순차적으로 뽐내고서 무색으로 되돌아왔다.
우와, 알록달록한 게 참 예쁘게도 빛나네… 아니, 이럴게 아니지. 다룰 수 있는 속성이 많은 건 둘째 치고 맨 마지막에 비친 화려한 황금색… 그건 분명 빛 속성을 상징하는 색인데?
메림이 마탑에서 배웠던 지식 중 하나는 빛 속성만큼은 다른 속성과 동시에 다룰 수 없다는 것.
비록 한 가지의 속성만 다룰 수 있다고는 하나, 더러움과 사악에 물든 부정적인 기운을 정화하고 질병과 부상을 치유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빛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인재는 상당히 귀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런 귀한 속성을 다룰 수 있다는 것도 모자라서 나머지 여섯 가지의, 달리 말하면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예외 중의 예외인 경우를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됐으니 메림이 적지 않은 혼란에 빠진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제가 잘못 센 게 아니라면 다 합해서 일곱 번 바뀐 거 같은데…, 맞나요? 메림 언니?"
"으, 응? 어…, 어어! 괴, 굉장한데?! 우리 록시아는 무, 무려 세븐이네. 하지만, 아직 이 정도만으로는 마법은 사용하려면 한참 멀었어. 이다음은 목소리에 마나를 담는 법을 배워볼까?"
"네! 가르쳐주세요. 메림 언니."
눈을 빛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린 록시아에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태도를 보여준 미림은 수업을 마저 이어나갔다.
똑! 똑!
잠시 후, 어느덧 점심때가 다 되었는지 문 너머를 두드리는 로덴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은 잘 듣고 있었어? 중간에 졸진 않았고?"
"네, 삼촌. 메림 언니가 알기 쉽고, 재밌게 가르쳐줘서 지루할 틈이 아예 없었어요."
"후우…! 배우는 학생이 무척이나 적극적이라 나도 가르치는 맛이 들려서, 수업 중간에 쉬지도 않고 계속해버렸어."
록시아의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씩 웃고 있는 메림의 대답을 들은 로덴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음음, 저 기분 아주 잘 알지. 우리 록시아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편인지 이해도 잘하고, 대답도 꼬박꼬박 잘하는 데다가 배우려는 의욕도 넘쳐서 가르쳐주는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지거든.
"둘 다 수고했고, 점심은 금방 준비해 줄 테니까 편히들 쉬고 있어."
"저도 도울게요. 삼촌!"
"……."
나란히 거실로 향한 로덴과 록시아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메림은 앉아있던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아…, 맞다. 저 아이한테 로덴 아저씨에 관한 질문을 못했네. 하도 당황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
* * *
메림은 점심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로덴을 가게 밖으로 불러내어 그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록시아가 모든 속성을 다 갖추고 있었다고?"
"표정을 보니까 아저씨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네. 칠색석이 잘못 반응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긴 했는데…, 두 번 연속으로 완전히 똑같은 반응이었다면 아마도 맞을 거야. 직접 봤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 아이한테는 어떻게 말했었지?"
"일단은 그냥 대단하다고 적당히 치켜세우면서 얼버무려놨어. 가르쳐주는 입장으로서 록시아가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로덴은 진지한 얼굴로 소견을 밝히고 있는 메림을 바라보며 의외로 교육자의 기질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품속에 감추고 있는 까마귀 조각상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이건 차마 예상 못했는데…, 마왕의 재능과 관련된 건가? 그리고 얘한테 까마귀를 사용해야 하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식을 왜곡하는 까마귀]는 공식적인 등급을 매긴다면 제1급에 분류될 정도로 귀중한 아티팩트지만, 제약 조건이 있다.
1. 기억을 조작하려는 대상의 레벨이 사용자의 레벨보다 20 이상 낮아야 한다.
2. 지나친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대상의 인식을 크게 왜곡하려고 하면, 처음부터 실패하거나 이후에 기억이 되돌아온다.
3. 이미 한번 사용한 대상에게는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다.
록시아의 안전을 위해 기억을 적당히 손볼까,라고 고민하던 로덴의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그의 손을 덥석 잡은 메림의 한 마디였다.
"있지, 로덴 아저씨도 알겠지만 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해서 좋을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주변에는 비밀로 하자는 거지?"
"가끔 있거든. 특별한 힘이나 재능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말 그대로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잔혹한 사람들이…."
후우웅! 저편에서 바람이 흩날리자 메림은 주홍빛의 단발을 쓸어 넘기고서 말을 이었다.
"나는 록시아 같은 아이가 그런 사람들한테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아저씨도 마찬가지지?"
"…응. 나도 마찬가지야."
녹빛을 머금은 메림의 눈동자를 바라본 로덴은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품속에 감춰둔 까마귀 조각상을 끝내 꺼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 가게의 안쪽으로 다시 들어온 메림은 따듯한 온기가 남아있는 손을 얼굴 쪽으로 조심스럽게 옮겨봤다.
…이제야 겨우 확신할 수 있겠어. 그때 맡았던 풀냄새랑 똑같아. 잘 생각해 보니까 저 아저씨는 검사님이랑 체격도 얼추 비슷해. 이제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는 건 그날의 알리바이뿐이야.
쫙 펼친 양 손으로 양쪽 뺨을 가볍게 짝짝! 맞부딪히며 눈을 번쩍 뜬 메림은 록시아가 기다리고 있는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록시아만 괜찮다면 수업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언니가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
"저한테 물어보고 싶으신 거요? 네, 괜찮아요."
록시아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삼일 전에도 삼촌이랑 쭉 같이 있었니?"
"어…, 그날은 재료를 좀 보충하신다고 점심시간 때에 도시로 들르셨다가 곧바로 돌아오셨어요."
"곧바로?"
"……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삼촌은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하셔서 장사를 일찍 끝내고 하루 종일 누워 계셨어요."
록시아는 로덴이 어비스에 진입했던 시간대에 집안에 누워 있었다며 거짓 대답을 내밀었다.
그 이유는 사전에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으면 이런 식으로 대답하라고 로덴에게 지시를 들은 것도 있거니와, 록시아 본인도 주인이 조금이라도 곤란해질 만한 발언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구나… 대답해줘서 고마워. 이번 수업은 내가 간단한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여주면서 시작할게. 마법이라는 건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감이 잡히거든."
"네…, 메림 언니."
고맙다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오후의 수업을 시작한 메림은 록시아가 대답하던 중간에 뜸을 들이고, 눈을 피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 * *
"… 그래, 손끝에 빛나는 알갱이가 모인다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면서 주문을 말해보는 거야. 너라면 할 수 있어."
눈을 감으며 최대한 정신을 집중한 록시아는 그녀의 스승에게 배운 대로 주문을 외운다. 마나가 담긴, 록시아의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트!"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손바닥 위에 둥둥 떠있는 빛의 구체와 앞자리에서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고 있는 메림을 정신없이 번갈아 봤다.
"후훗, 처음으로 주문을 완성시킨 소감은 어떠신지?"
"너무 신기하다는 말 밖에 안 나와요… 이걸 정말로 제가 만든 게 맞나요?"
"당근이지~! 네 눈 앞에 빛나고 있는 그건 이제부터 록시아도 어엿한 마법사라는 확실한 증거야."
메림의 일대일 과외수업이 시작된 지 벌써 삼 일째되는 날, 그녀의 지도 아래서 마법에 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은 록시아는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가장 기본적인 주문인 라이트를 훌륭하게 시전 해낼 수 있었다.
짝짝짝! 짝짝!
록시아의 양 옆에서 번갈아서 들려오는 새찬 박수소리는 메림과 함께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로덴과 마릴이 내고 있는 소리였다.
"정말 축하해!"
"잘했어."
세 사람의 사이에서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듣고 있던 록시아는 점차 쑥스러워졌는지 고개를 숙이면서도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에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한편, 쌍둥이 자매가 보고 있는 만큼 최대한 감정표현을 절제하고 있는 로덴은 마음속에서 기쁨의 함성을 마구 지름과 동시에 방방 뛰고 있다.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하늘에 주황빛의 노을이 스며들기 시작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딱 좋은 시간이네. 오늘처럼 기념할만한 날은 사치를 좀 부려야겠어.
"록시아, 슬슬 추워질 시간이니 두툼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식당으로 가자. 그리고 너희 둘도 따라와."
"네, 삼촌!"
"로덴 아저… 오빠. 지금 그 발언은 한턱 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문제없겠지?"
"오늘은 원 없이 먹게 해 주지."
메림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군침이 싹 도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의 해괴한 표정 때문에 옆에서 대신 창피해하고 있는 동생과 함께 로덴의 옆을 따라갔다.
* * *
시끌벅적한 주점의 한 자리, 중간중간에 먹다 남은 안줏거리가 수북이 쌓여있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로덴 일행.
"아 진짜… 더는 못 먹어… 언니…."
일행 중에 가장 먼저 뻗어 버리고서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마릴은 수시로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고,
"우으음… 주인님…."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다가 점차 나른해지는 느낌을 견디지 못한 록시아는 주인의 옆구리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크하아아~! 극락이로구나~! 여기!! 맥주 두 잔 더!"
반면, 상쾌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아낸 메림은 맥주잔을 비우기 무섭게 추가 주문을 했다. 그것도 로덴의 몫까지.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히끅! 나랑 똑같이 마시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아저씨가 할 말은 아니지~"
메림이 추가로 주문한 맥주잔의 수를 세는 것을 중간부터 포기한 로덴은 그녀의 어마어마한 주량에 혀를 내둘렀다.
허참, 술을 저렇게 잘 마시는 마법사는 난생처음 보네.
맥주잔에 거품이 넘쳐흐를 만큼 다시 채워지자, 메림은 로덴과 건배를 나누고서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차가운 탄산이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니 그녀의 텐션이 절로 높아졌다.
"크으…! 이렇게 원 없이 마시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아, 오늘은 진짜 잘 먹었어. 로덴 아저씨~!"
"네가 록시아를 기대 이상으로 잘 가르쳐주고 있어서 같이 사주는 거야."
"아하하~! 그 아이가 잘 따라와 주기도 했지만, 내가 좀 잘 가르쳐주긴 했쥐이~!"
주량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점차 한계가 다가왔는지 메림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마신 거 같은데, 이제 슬슬 끝내자고. 일단 여관 앞까지는 같이 동행해 줄테니까, 네 동생 챙기고 얼른 일어나."
"옛~설! 어우, 일어나 이 지지배야."
술자리를 끝내기로 한 로덴은 계산을 끝마친 뒤에 록시아를 등에 업었고, 메림은 마릴을 부축한 상태로 주점에서 빠져나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여관 위치는 영 모르겠네.
"메림, 평소에 어느 여관에서 머물고 있는지 안내 좀 해줘 봐."
"으음~ 여관이라~"
히끅거리면서 로덴의 모습을 바라보던 메림은 벌게진 얼굴로 히죽 웃더니, 그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꺼냈다.
"저기이이~ 로덴 아저씨. 가게 안쪽에 방이 하나 남는 거 같던데, 오늘 밤은 그 방에 우리 좀 재워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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