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8화 (18/149)

〈 18화 〉 마법사의 고민 (3)

* * *

야심한 새벽시간에 문득 눈을 떠버린 메림은 목이 텁텁해지는 느낌을 받고,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수통을 집어 들었다.

꿀꺽꿀꺽­

"후우…"

갈증을 해결하고 나서 다시 잠에 빠지려고 해 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이대로는 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반쯤 일어난 상태로 한숨을 푹 쉰 메림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고는 손바닥 위에 은은한 밝기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그때의 경험 덕분인지 매개체 없이 주문을 사용하는 게 훨씬 능숙해졌네? 생각해보면 맨손으로 주문을 그렇게 난사한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어.

메림의 손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구체는 그녀의 바로 옆,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쌍둥이 자매는 평소에 2인실을 잡는 편이지만 지금은 돈을 아껴야 하는 만큼 둘이서 1인실을, 같은 침대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

어이구, 지지배… 이 버릇만은 못 고친다니까. 이런 모습만 보면 어렸을 때랑 달라진 게 없단 말이지. 좁아서 불편하긴 해도, 가끔은 얘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썩 나쁘진 않네.

동생이 자고 있던 모습을 바라보던 메림은 피식 웃으며 상체가 반 이상 드러날 정도로 흐트러진 이불을 어깨까지 다시 덮어준 뒤에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방의 구석에 내려둔 배낭을 주섬 거리면서 찾아낸 낡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종종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졸음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이런 식으로 책을 꺼내 읽고는 한다.어렸을 때부터 쭉 이어진 일종의 습관이다.

책을 읽고 있던 메림의 눈꺼풀이 점차 감기기 시작했다.

빛의 구체를 꺼뜨리고서 마릴의 옆자리로, 침대로 되돌아간 그녀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잠들기 직전에 책을 읽었던 영향일까? 메림은 그것과 관련된 꿈을 꾸었다.

훗날에 용사로 불리게 되는 이국의 검은 검사가 모험가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기 시작하는 꿈.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동경하는 용사가 나오는 꿈을 즐겁게 감상하던 메림은 어째서인지 은인의 모습과 용사의 모습을 겹쳐보게 됐다.

* * *

아침부터 작업장에서 만들어둔 포션을 록시아와 함께 진열대에 천천히 채우고 있던 로덴은 창문 쪽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슬슬 올 시간인데….

"주인님. 저 같은 게 정말로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어제도 여러 번 얘기했지? 틀림없이 배울 수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져봐. 나한테서 인간의 언어를 배웠을 때처럼 만 하면 돼."

습관처럼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다독여준 로덴은 농담 반, 진담 반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더 어려울지도?"

"아하하…, 그때보다 더 열심히 배워야겠네요."

전날부터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록시아였지만 주인의 격려 덕분에 긴장감을 떨쳐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단어라고만 느껴졌던,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마법을 배우게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록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열대를 모두 채워갈 때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서 가게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단발머리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차림새는 영락없는 마법사인데 행동은 마법사 답지 못한 여성의 정체는 당연히 메림이다. 그녀는 가게문을 덜컥 열고서 숨을 거칠게 골랐다.

"허억…, 헉…! 지, 지각은 아니지?"

"아슬아슬하게."

"안녕하세요! 메림 언니!"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메림은 모자를 고쳐 쓰고는 힘차게 인사를 건네 온 록시아랑 악수를 나눴다.

"후우~! 목소리에서 의욕이 전해지는데? 이 언니가 확실하게 가르쳐줄게!"

"네, 잘 부탁드릴게요!"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거린 록시아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메림은 그녀를 인형처럼 가볍게 껴안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너하고 동생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이번에 처음 보게 됐군. 마릴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응? 아아, 마릴은 오른팔이 다 나을 때까지 외벽 보수 작업이라도 하겠다고 하더라. 마음 같아서는 그냥 푹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우리가 이게 좀 딸려서…."

뒷머리를 살살 긁으며 끝말을 흐린 메림은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 모양으로 만들었다. 여러 가지 의미를 상징하는 몸동작이지만, 지금의 경우는 명백히 돈을 상징하고 있다.

…하긴, 거기서 얼핏 봤을 때 대부분의 장비가 부서져있었지. 자세히 보니까 스태프도 아직 구하지 못한 모양이네.

"어제도 말했지만 잘 가르쳐줘 봐. 과외비는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하핫, 이래 봬도 마탑에서 배웠을 때는 천재 미소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닌 몸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상당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든 메림을 보며 피식 웃은 로덴은 그녀와 록시아를 가게 안쪽의 공간으로 들여보냈다.

"와~ 안쪽은 이렇게 돼있네. 아늑한 느낌도 들고, 나도 나중에 아저씨처럼 이런 집에서 살고 싶어."

"그러려면 열심히 버는 수밖에 없겠지. 가르치는 건 거실이든, 록시아의 방이든 네가 편한 쪽에서 하도록 해. 지하실은 들어가지 말고."

"알았어."

"록시아.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마법이라는 단어 자체에 크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마음먹거라. 너라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네, 삼촌! 열심히 배울게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록시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보여줬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로덴은 오래간만에 그녀의 정보를 확인해 봤다.

[이름 : 록시아]

[종족 : 인간(마족)]

[직업 : 종업원, 노예(마왕)]

[기능 : 마법 LV1, 요리 LV3]

[레벨 : 10 / 99]

[나이 : 14]

……

……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마법에 관한 지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상당히 큰 법이지. 어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림한테 그런 제안을 꺼내본 건데, 여러모로 잘 됐어.

최근 들어 로덴은 스스로도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사랑스러운 소녀인 록시아에게 언제 어디서 질 안 좋은 녀석들이 꼬일지 모른다는 망상을 자주 하게 됐고, 내심 불안했다.

그렇기에 저 아이가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록시아에게는 약간이나마 마법에 관한 재능이 있긴 하지만, 마법사들은 대체로 자존심도 강하고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서 마탑의 인원이 아닌 사람에게 마법과 관련된 지식을 좀처럼 공유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하리만큼 털털한 성격이면서 재능도 갖춘 마법사, 메림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한 기술을 배우게 하는 것도 보호자의 역할, 록시아라면 힘을 함부로 휘둘러서 타인을 상처 입히거나 하지는 않겠지….

"슬슬 장사할 시간이군. 둘 다 점심때 보자."

열심히 배우겠다고 재차 말하는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마지막으로 로덴은 가게 구역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메림은 록시아에게 삼촌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당장 던져볼까 고민하다가도, 일단은 수업 먼저 성실히 진행하고서 천천히 조사해보기로 했다.

"으음~ 나는 어느 쪽에서 수업을 진행하든 크게 상관없을 거 같은데, 록시아는 어디가 더 편해?"

"그러면 제 방에서 가르쳐주세요. 메림 언니."

"우흐흐… 그래, 이 '언니'가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줄게. 중간에 궁금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 '언니'에게 물어보렴."

"네! 언니."

아아아, 언니라는 이 환상적인 울림은 언제 들어도 정말 최고란 말이야. …마릴 그 지지배는 머리가 좀 크고 난 이후부터 거의 이름으로만 불러서 귀여운 맛이 없는데.

입꼬리가 올라간 메림은 록시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방으로 같이 들어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이윽고 마법의 기초에 관한 설명을 시작한 메림은 평범한 아이인 록시아가 이해하기 쉽게끔 중간중간 적절한 비유를 섞어가며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을 해줬다.

"…일단 기초적인 설명은 다음에 마저 해줄게. 그나저나 록시아는 마나를 집중시키는 방법. 알고 있니?"

"네, 삼촌한테 배워두긴 했어요."

"그러면 수고를 하나 덜었네. 어디 보자…."

주머니를 뒤적거린 메림은 바둑돌 만한 크기의 무색 결정을 꺼내 들었다.

"이건 칠색석(七色?)이라는 광물의 파편인데, 주변에 떠다니는 자연의 마나에 반응해서 색깔이 바뀌는 특징을 갖고 있어. 뿐만 아니라 사람이 내보내는 마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덕분에 갓 입문한 마법사의 속성을 확인하는데 자주 쓰여."

메림은 설명을 끝내자마자 칠색석을 들고 있는 손에 마나를 집중시켰고, 칠색석의 색깔은 붉은색, 하늘색, 노란색의 순서로 바뀌었다가 금방 무색으로 되돌아왔다.

"나 같은 불, 얼음, 전기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의 마나를 감지하면 지금 같은 반응을 보여줘."

"와아…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는 건가요?"

록시아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메림은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다룰 수 있는 속성의 종류랑 숫자는 천차만별이야. 일단 선천적으로 마법을 못쓰는 사람은 무속성으로 분류되는, 물리 계통의 마나만 조작할 수 있어. 그런 사람이 칠색석에 마나를 불어넣어도 별 반응은 없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메림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사 중 삼분의 이 정도는 한 가지의 속성만 다룰 수 있고, 선천적으로 여러 개의 속성을 다룰 수 있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

"어때? 어때? 대단하지~? 굉장하지~? 이 언니는 더블도 아닌, 무려 트~리플이라고? 쩔어주지 않아?"

"어…, 음…, 네…, 굉장해요. 메림 언니."

"후후훗, 이 언니가 좀 쩔어주긴 하지."

노골적으로 칭찬을 좋아하고 있는 메림의 모습을 본 록시아는 마음속으로 굉장히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칠색석에 관한 설명을 끝마친 메림은 그것을 록시아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좋았어! 이제 록시아가 무슨 속성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록시아도 이 언니 같은 트리플 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한번 기대해보라고."

"네!"

로덴에게 배운 요령대로 정신을 집중한 록시아는 칠색석을 받치고 있는 손바닥에 마나를 집중시켰고, 곧장 반응을 보인 칠색석의 색깔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빨간색.

"오, 축하해. 록시아는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적성이 있다는 게 증명됐어."

…그 다음은 진한 파란색.

"오오! 더군다나 더블이구나! 이건 물속성의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뜻이지."

…그 다음은 갈색.

"어어어?! 나…, 나하고 같은 트리플이네…?"

……칠색석의 변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노랑, 하늘, 회색…, 마지막으로 찬란한 황금색으로 한 번씩, 일곱 가지의 빛을 순서대로 발한 뒤에야 무색으로 되돌아왔다.

"…………어라…?"

칠색석의 변화가 네 번 연속으로 이어졌을 때부터 말을 잇지 못한 메림은 눈을 껌뻑 껌뻑 뜨며 록시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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