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마법사의 고민 (2)
* * *
바르멜라 영지에서 발생한 어비스가 완전히 사라진 지 이틀째.
그 짧은 사이, 어비스의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벌떼처럼 몰려들었던 타지의 모험가들은 본래 활동하던 구역으로 쭈르륵 빠져나갔고, 얼마 전까지 굉장히 시끌벅적했던 이 도시의 풍경은 다시 평소대로의 적당히 활발한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아니…, 평소대로라는 표현은 다소 잘못됐다.
현재 이 도시에 활동하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뜨거운 화제가 떠오르고 있다.
진입한 지 겨우 2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그것도 단신으로 어비스를 공략했다는 의문의 검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때 당시, 녹슨 투구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고 해서 붙게 돼버린 의문의 검사의 별명은 러스트 헬름(Rust Helm), 앞부분만 따서 흔히들 러스트라고 부르고 있다.
결국, 러스트의 정체는 뭐였을까?
알트마 왕국에서 보낸 첩자 일거야.
얼굴을 가린 마족이나 요정 검사라는 소리도 있어. 그것도 아니라면 수인일 수도 있겠네.
심지어 모험가만이 아니라 한산한 식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떠들고 있는 시민들 마저도 의문의 검사에 대한 온갖 추측을 내던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맨 구석자리에서 식사를 주문하려는 3인 방이 있었고, 그중에서 고깔모자를 무릎 위에 올려둔 단발의 여성은 멍한 표정으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상상하고 있다.
아아, 이름 모를 검사님….
"…림…… 로…… 킬 거야?"
여성은 녹슨 투구 너머로 간신히 보았던 검사의 눈빛을 떠올릴수록 볼이 점점 상기되고 있었다.
…틀림없이 잘 생겼을 거야.
"메…… 뭘…… 거냐고?"
딱! 딱! 딱!!
한편, 계속 말을 걸어봐도 멍하니 있던 여성이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와 똑같은 얼굴의 다른 여성이 눈 앞에서 손가락을 여러 번 튕겨냈다.
"메림! 뭘로 시킬 거냐니까?!"
"아…, 미안. 나도 두 사람하고 같은 걸로 시켜줘."
"정말이지! 거기서 빠져나온 이후로 툭하면 멍하니 있더라?"
짧게 투덜거린 마릴은 때마침 옆자리를 치우고 있던 종업원을 불러서 세 사람이 먹을 점심 식사를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는 삼인분의 콩스프와 딱딱한 빵이 덩그러니 놓였다.
"뭐야~? 또 이걸로 시켰어?"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모두 파산 직전인걸. 당분간은 아끼고 살아야지."
어비스의 최하층에서 대부분의 장비가 파손당하고, 그곳에서 얻었던 전리품도 일부 잃어버린 쌍둥이 자매와 핀은 현재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뭐, 돈이야 다시 벌면 그만 아닙니까? 가능하다면 알타프 씨도 이 자리에 같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저희만이라도 운 좋게 살아남은 것 자체를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죠."
의자 옆에 목발을 걸쳐두고 있는 평상복의 핀은 엄숙한 표정으로 죽은 동료를 위한 짧은 기도문을 읊은 뒤에야 숟가락을 들었다.
"캡틴, 다리는 이제 좀 어때? 나을 수 있겠어?"
"네. 천운이 따랐는지, 딱 깔끔하게 부러진 상태라 일주일에 한 번씩 최하급 포션을 복용하면서 한 달만 이렇게 얌전히 지내면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다고 합니다."
회복 마법을 받거나, 효능이 좋은 상위 단계의 포션을 먹는다면 순식간에 나을 수 있겠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들은 지금 금전적으로 난감한 상태.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자연 치유와 약물 치유를 병행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정말 고맙게도 평소에 자주 방문했던 고아원의 관계자 분이 잠자리랑 일자리를 같이 내어주신다고 하니 부러진 다리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아이들이랑 놀아줄 겸, 그곳의 일을 좀 도우면서 지내려고요."
"당분간 지낼 곳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프를 뜨고 있던 마릴의 자세는 다소 어색했다. 오른손잡이인 그녀가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오른손 대신, 남아있는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릴 양은 좀 괜찮으신가요?"
"원래 부러졌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은 훨씬 나은 편이죠. 더군다나 조금 전에 핀 씨가 말씀하신 데로 살아있는 것 자체가 행운인걸요."
오른손을 쥐락펴락 해본 마릴은 그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더듬어봤다.
강화인간한테 맞았을 때를 생각하면 그대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배가 이렇게 멀쩡한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마릴에게 있어 최하층에서 겪게 된 일은 끔찍한 기억이긴 했지만, 충격이 너무 커서 금방 의식을 잃은 덕에 트라우마로 번지지는 않았다.
…팔하고 다리가 부러졌던 둘을 빼놓고 유일하게 내 몸만 멀쩡하니까 뭔가 좀 미안해지네.
빵을 잘게 씹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던 메림은 같이 식사하고 있는 두 사람과 적당히 떠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름 모를 검사를 내내 떠올렸다.
어떻게든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정작 상대방은 목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고, 얼굴도 모르겠고, 단서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남자라는 건 확실해. 체격은 좀 큰 편이었고… 그리고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검사님의 정보는…
메림은 빵을 다 먹어치운 손을 바라봤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때 당시 손에 남아있던 씁쓸한 풀냄새가 아른거리는 느낌이 든다.
내가 개코는 아니라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 냄새… 로덴 아저씨네 가게에 방문했을 때마다 안쪽에서 은근히 풍겨왔던 향이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해. 설마… 그 딸바보 아저씨가?
로덴과 검사가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지만, 냄새 하나만으로 단정 짓기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자기가 편한 쪽으로만 생각이 계속 기울기 마련.
지금만 해도 희미한 풀냄새랑 가게의 향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끼워 맞춘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상상한 게 맞다고 가정해도 본인이 아니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더 파고들 수 없는 만큼, 일단은 정보를 좀 더 모아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끝나고, 핀은 쌍둥이 자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목발을 짚었다.
쌍둥이 자매는 고아원으로 가는 길까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핀은 정중히 거절했다.
"흐읏차!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니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다음번에는 서로 건강한 몸으로 뵙시다."
"조심히 돌아가. 캡틴."
"다음에 또 봬요."
그렇게 해서 핀과 헤어진 쌍둥이 자매는 도시의 외곽을 향해, 로덴이 운영하는 가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 * *
"어서 오세요!"
가게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종소리와 함께, 록시아의 맑은 목소리가 쌍둥이 자매를 반겨줬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적당히 앉아 있어."
그녀들에게 애써 무덤덤하게 인사를 건넨 로덴은 록시아에게 자리를 맡기고는 평소처럼 차를 끓이기 위해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릴은 실례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옆에 있던 언니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메림, 뭘 그렇게 코를 벌름거리고 있어?"
"응? 아, 아하하~! 그냥 왠지 무척 오랜만에 들어온 느낌이라서 그리운 냄새구나 싶었지."
"하여간…! 같은 얼굴로 창피하게 그러지 좀 말아줘."
들어오자마자 손님용 테이블에 앉은 그녀들에게 바짝 다가간 록시아는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낡은 책을 마릴에게 돌려줬다.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빌려줘서 고마워요. 마릴 언니."
"우리가 재밌게 읽었던 책을 록시아도 재밌게 읽었다니 다행이네. 어느 부분이 가장 재밌었니?"
"그게 있죠. 책의 중반부에서 요정 기사 필리아랑 처음으로 만났던 장면인데……."
싱긋 웃으며 배낭 안으로 책을 집어넣은 마릴은 로덴이 돌아오기 전까지 록시아와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누기 시작했다.
"킁, 크흥…."
끄응~ 여기에 직접 들어와 보니까 그 냄새가 맞는 거 같기도 한데… 마냥 확신까지는 못하겠네.
평상시였다면 세 사람 중에서 메림이 가장 많이 떠들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옆에 있는 록시아와 동생에게 티가 나지 않게끔 후각에 최대한 집중하느라 말이 별로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 끓여낸 찻잔을 들고 돌아온 로덴은 마릴의 오른손에 감긴 붕대를 유심히 바라봤다.
복부 쪽의 손상이 심각해서 그런지 팔까지는 완전히 회복시키지 못한 모양이군. 상급의 수준에서는 저 정도가 한계인가….
달각.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니, 로덴이 돌아왔을 때부터 그를 줄곧 바라보고 있던 쌍둥이 자매 중, 마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로덴 씨. 정말 감사합니다."
"차를 건네준 정도로 뭘 그렇게 까지…."
"아, 아뇨 차도 감사하긴 한데, 지금은 다른 거예요. 저희가 어비스로 들어가기 전날에 로덴 씨가 건네주신 중급 포션 있죠? 그 포션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만약에 그게 없었다면 마릴은 틀림없이 거기서 죽었을 거야. 내 동생이 살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로덴 아저씨."
마릴과 마찬가지로 로덴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메림은 동생과 눈을 마주치며 같이 고개를 끄덕거린 뒤, 지갑에서 은화 다섯 닢을 꺼냈다.
로덴의 가게를 기준으로 중급 포션의 정가다.
뭐…, 사실 로덴이 줬던 건 정가가 은화 50개짜리인 상급 포션이지만. 쌍둥이 자매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니 넘어가자.
"어비스에서 막 나왔던 날에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었고 어제는 전리품들을 최대한 좋은 가격에 파느라 하루정일 걸려서 오늘에야 왔는데…, 아무래도 값을 지불하는 게 옳은 거 같아. 그러니 받아줘."
"…그때 내가 말했던 건 기억 안 나나? 애플 헤드에 대한 답례라고 했지? 됐으니까 도로 집어넣어."
이후로 쌍둥이 자매와 로덴은 서로 돈을 받아달라느니, 그냥 넣어두라느니 하면서 짧은 실랑이를 벌였다.
후우, 똥고집들 하고는….
중간에 지친 로덴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돈을 받아둘까 고민하다가도 옆자리에 있는 록시아의 모습과 메림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를 번갈아 보다가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는 록시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제안을 꺼냈다.
"보답하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이건 어때? 메림, 네가 이 아이한테 마법을 좀 가르쳐줘. 성과가 좋다면 내가 과외비도 따로 챙겨주지."
"그걸로 좋다면 상관없긴 한데… 로덴 아저씨, 마법은 기본적으로 적성이 있어야 배울 수 있는 건 알고 있지?"
"문제없어."
"그렇다면… 알았어. "
고민하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끄덕인 메림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이게 웬 떡이야?! 저 아이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면서 자연스럽게 여기에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메림은 마법 수업을 진행하면서 러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은인과 로덴이 동일인물인지 밝혀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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