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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6화 (16/149)

〈 16화 〉 마법사의 고민

* * *

강화인간의 머리통은 바닥에 굴러 떨어져 버렸지만, 그것이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뜬 강화인간은 머리를 잃어버린 자신의 몸뚱이에 서둘러 파장을 내보냈다.

"돌아와!!!"

신호를 받은 강화인간의 몸뚱이가 연신 꿈틀거리더니, 피분수가 뿜어지고 있는 목부분을 한 손으로 틀어막은 채, 머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나란히 따라간 로덴이 강화인간의 몸뚱이와 머리를 번갈아 보며 녀석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건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무슨 기술력을 동원하면 바퀴벌레보다 훨씬 더한 생명력을 갖게 할 수 있는 건지 원…."

몸뚱이의 옆을 쭉 쫓아온 로덴은 저것이 머리를 주워 들기 직전의 상태에서 검을 고쳐 잡는다.

자신의 몸에 파장을 보내고 있던 강화인간은 로덴의 모습을 보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아, 안 돼! 내 아름다운 몸!! 내 완벽한 몸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뭐긴 뭐야, 해충 구제지."

로덴은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는 강화인간을 무시하고, 보통사람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검을 여러 차례 휘둘렀다.

촤라라락­!

초인의 경지에 이른 신체능력과 검술이 결합된, 순간적으로 다섯 개로 늘어난 고속의 참격은 강화인간의 몸뚱이를 사방팔방으로 찢어냈다.

깍두기처럼 잘게 썰린 강화인간의 피와 살점은 후두둑, 하는 질퍽한 소리를 내며 녀석의 머리 앞에 흩뿌려졌다.

강화인간은 머리가 잘려나가도 다시 붙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을 정도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지만, 저 정도로 육체가 손상되면 더는 자력으로 회복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재기불능이다.

"으아아아아!!!!!"

그렇기에 녀석은 절규했다.

"흠."

이건 더 이상 못 써먹겠군.

연격으로 몇 번 휘두른 것 만으로 여러 군데가 깨지고 갈라져버린 검을 미련 없이 버린 로덴은 자신의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메림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메림은 옆에서 아직 누워있는 마릴을 보며 잠시 망설였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내디뎠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공포심과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절망감 때문에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려서 걷는 중에 몇 번 넘어져 버렸지만…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했고, 로덴의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낡은 투구를 통해 메림의 곧은 눈동자를 바라본 로덴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그런 일을 겪은 직후인데도 눈빛이 살아있고, 또렷해. 얘라면앞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겠어.

모험가로서 활동을 하다 보면 지금처럼 죽음의 위기에 빠지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그 순간을 빠져나온 사람은 이후에 둘 중 하나로 갈린다.

다시는 그런 험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며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안전한 일만을 찾게 되는 보통의 나약한 사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신념과 의지를 가진 사람.

눈앞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메림은 틀림없이 후자였다.

로덴은 경이의 뜻을 담아 자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는, 머리만 남은 강화인간을 가리켰다.

네가 원하는 대로 요리해라, 라는 의미다.

그 의도를 알아챈 메림은 로덴에게 고개를 끄덕거린 뒤, 강화인간의 코앞에 서서 마력을 집중했다.

"마릴한테…, 내 동생한테 감히…! 감히 그런 짓을 해?!!"

화르르륵­!

야구공만 한 불덩이를 만들어낸 메림은 동생이 맞은 순간을 떠올리며 독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강화인간을 노려봤고

그녀의 손끝에서 순차적으로 쏘아진 불과 얼음, 전기가 녀석의 머리를 불태우고, 얼리고, 지지고 볶기 시작했다.

매개체 없이 맨손으로 주문을 시전 하는 만큼 위력은 많이 떨어지지만, 머리만 남은 무방비한 상태로 연달아서 공격을 허용해도 될 정도의 무른 위력도 아니다.

"크아아아아아!!!!"

강화인간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확실하게 죽어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조금 전에 확인한 강화인간의 레벨과 기능을 떠올린 로덴은 어째서 모험가들이 그렇게나 처참히 패배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했다.

[레벨 : 48 / 72]

[기능 : 격투 LV4, 재생 LV3]

종합적인 전투능력을 숫자로 알기 쉽게 표기해주는 레벨이 무려 48, 이 어비스는 C랭크 중 난이도가 최상에 속한 장소였다.

이럴 때 보면 정보기능도 마냥 완벽한 건 아니란 말이지.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강화인간의 머리통은 원형이 남아나지 않은 곤죽이 돼버렸다.

"하아… 하아아….!"

격정에 휩싸여 상당히 많은 마력을 소모한 메림은 털썩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로덴은 메림에게 다가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상대방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기…."

당신은 누구시죠, 라는 말을 꺼내고 싶었던 메림이지만….

얼굴을 가린 채,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체를 알리기 싫다는 뜻이었기에, 그녀는 차마 질문을 꺼내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메림은 무의미한 질문 대신, 잡고 있던 로덴의 손을 꾹 쥔 채로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의 말을 전하기로 했다.

"감사…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검사님."

동생이 죽어가는 와중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상황에서 구해준 것 만이 아니라, 상처 입은 동생과 죽어버린 동료의 복수를 할 기회까지 양보해준 이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만약에 상대방이 금전을 요구한다면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을 넘길 것이고, 구두를 핥으라면 기꺼이 핥을 수 있을 정도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복수를 했다는 후련함, 은인에 대한 감사함의 감정이 뒤죽박죽 섞였다.

"너무…흐읏…!감사해요."

정신을 차려보니 메림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로덴은 아무 말 없이 메림의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그녀와 천천히 거리를 벌리고는 강화인간의 잔해 앞에 섰다.

곧 있으면 모습을 드러낼 물건을 받기 위해서.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았는지, 강화인간의 잔해가 증발하면서 그 자리를 메꾸듯이 붉은색 테두리의 상자가 나타났다.

어비스로 불리는 이공간의 법칙으로 인해 보스를 쓰러뜨리면 출현하게 되는, 아티팩트가 담긴 보물상자다.

…고전 게임에서 나올법한 구린 연출과 디자인이라 그런지 이 상자를 여는 순간만은 지금도 두근거리더라.

선물 포장지를 벗기는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로덴은 보물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아티팩트는 태양, 물, 바람을 상징하는 그림이 세 방향으로 새겨진 유리구다.

"검사님…, 그게 아티팩트인 거죠?"

눈물을 닦아내고 로덴의 옆으로 다가온 메림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로덴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유리구를 집어 들어서 자세히 살펴봤다.

유리구 안에는 화살표 모양의 바늘이 허공에 둥둥 떠있었는데, 시험 삼아 이리저리 돌려봐도 바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이것만으로는 명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만큼 로덴은 정보창을 펼쳐 세세한 내용을 살펴봤다.

[하늘의 기분을 예언하는 나침반 : 현 위치에서 다음날 현 시간의 기상조건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바늘이 장착된 구체형 나침반. 기온, 강수량,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내일의 날씨를 알려주는 도구인가… 이거 기대 이상의 물건이 나왔는데?

시험 삼아 유리구 안에 마나를 불어넣자, 바늘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고는 태양과 물, 바람이 그려진 방향을 순차적으로 가리켰다.

"와아…."

감탄사를 내뱉은 메림은 저 움직임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아티팩트가 움직이는 모습 자체가 그저 신기했다.

파지지직­!

유리구 안에서 움직이던 바늘이 완전히 멈출 때쯤, 로덴과 메림은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을 느끼게 됐다. 손과 발을 확인해보니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몸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려 할 때의 징조다.

즉, 여기서 빠져나가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메림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동생과 핀의 모습을 살펴봤다.

다행히도 쓰러져있는 두 사람 역시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몸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다른 세상의 지식이 담긴 문서, 이름 모를 기계장치들과 이곳에서 죽어버린 모험가들을 뒤로한 채, 살아남은 네 사람의 몸은 최하층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 * *

바깥은 파스텔로 번진 것 같은 느낌의 붉게 물든 하늘이 떠있었다.

­여긴 숲이잖아….

­어… 우리 아직 들어간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어비스의 입구 앞이었던 장소가 상당히 소란스러워졌다.

최하층에 있던 네 사람만이 아니라 어비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녹슨 투구를 찾아!!"

그뿐만이 아니라 조금 전에 어비스의 앞을 지키고 있던 모험가들의 머릿수도 배로 불어나 있었다. 로덴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일으킨 소란 때문에 긴급히 추가된 인원들이다.

"…검사님. 조금 전에도 여러 번 말했지만, 정말 감사해요. 검사님만 원하신다면 뭔가 보답이라도… 검사님?"

메림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로덴이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지 않을까 하며 찾아봤지만 그는 진작에 숲 속으로 몸을 숨긴 상태였다.

"저것 봐 봐! 쌍둥이 자매랑 핀 씨가 돌아왔다!!"

어비스에서 빠져나온 사람들 사이에 메림 일행을 발견한 모험가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핀 씨의 다리가 둘 다 아작나 버렸어…."

"마릴도 기절해있고…, 메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있지……"

메림은 몰려온 모험가들에게 최하층에서 겪게 된 일을 차근차근히 설명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검사를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에 검사의 손을 꼭 잡았던 그 감촉을 떠올리며 자신의 손을 얼굴에 가까이 대본다.

……메림의 손에서 약초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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