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쌍둥이와 던전 (11)
* * *
먼 과거에 벌어진 전쟁에서 사용한 핵병기로 인해 모든 인류가 멸종한, 실패한 세계 중 하나인 마스티.
머시 클리어(Mush Clear)라는 이름의 전술핵병기들은 폭발의 충격만으로 대부분의 생물을 멸절시켰고
후폭풍으로 지상에 퍼트려진, 개량된 버섯 포자는 살아남은 생물들을 버섯과 결합된 괴이한 생물체로 변이 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고도의 과학력과 결합된 마법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실험체들을 연구, 관리, 감독하는 시설이 여러 개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수시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과학기술을 중점으로 실행한 인류 강화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셀 수도 없이 많은 실패작들을 만들어낸 끝에 10000대 1의 비율로 만들 수 있는 강화인간은 보통의 인간들과 비교할 수 없는 힘과 지혜, 수명과 재생력을 갖췄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극도의 잔인함과 폭력성.
약물이나 마법으로도 절제하지 못하는 강화인간의 과도한 공격성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해결방안을 찾을 때까지 잠정적으로 폐기.
인류 강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모든 시설은 땅속 깊숙이 숨겨지게 됐다.
* * *
"내가…!"
콰직!
"최선을…!!"
쿠직!
"다…!!!"
쿵!
"하라고…!!!!"
우직!
"했잖아!!!!!"
우지끈!!!
"내 말이 우스워?!!!!!"
강화인간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형채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됐던 알타프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쪼개져버렸다.
"아아아!!! 진짜!!!!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나는 어떻게 즐기라는 거야!!!!!!"
쾅쾅!!쾅쾅!!쾅쾅쾅!!!!!
그러고도 분을 삭이지 못한 강화인간은 철판 바닥을 여러 차례 내려쳐서 움푹 파이게 만들었다.
"후…, 후우우…."
한참 동안 씩씩 거리다가 벌떡 일어난 강화인간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밝은 얼굴로 남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는 진짜로 여자 쪽을 즐길 차례네~ 우훙훙훙~★"
약간의 리듬을 타며 일행을 향해 느긋이 걸어간 강화인간은 핀을 지나치고 쌍둥이 자매가 있는 곳으로…
꽈아아악…!
"어머?"
가려고 했지만 핀이 강화인간의 발목을 꽈악 붙잡았다. 그는 아예 양 손으로 강화인간의 다리를 꽉 붙든 채 절실한 목소리를 냈다.
"차, 차라리 저를 먼저… 최대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죽이십시오…!!"
동료들을 이곳으로 이끌어버린 건 나의 실책…어차피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라면 저 두 사람만이라도…!
핀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끈다면 이곳을 탐색하고 있는 모험가팀이 쌍둥이 자매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
그런 숭고한 마음을 알 리 없는 강화인간은 기분이 좋아진 듯 씩 웃으며 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우후후, 후후…, 정말이지, 인기가 너~무 많아도 탈이라니까? 아저씨는 다음 차례에 놀아줄 테니, 이것 좀 놔, 줄, 래?"
"저를 먼저 상대하기 전까…"
퍼어억!!
강화인간은 핀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후후, 끈질긴 남자는 인기가 없는 법이라고. 아저씨, 잠깐 좀 코~ 자고 있어. 지금 이 순간은 여자를 갖고 놀고 싶은 기분이거든."
불행인지, 다행인지 핀을 기절시키는 정도의 위력으로만 힘 조절을 한 강화인간은 쌍둥이 자매와 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쪼그려 앉았다.
"이야~ 둘이 어쩜 이리 똑같이 생겼니? 누구랑 먼저 놀아야 할지 너무 고민되는데…"
한쪽 팔이 부러져 버린 동생을 쭉 껴안은 상태에서 적을 노려보고 있던 메림은 강화인간을 가리키며 미리 준비해둔 마법을 시전 했다.
"파이어볼!"
화르륵! 하는 소리를 낸 자그마한 불덩어리가 강화인간의 안면에 훌륭하게 적중했지만, 그다지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강화인간의 내구력은 둘째 치고, 현재 메림의 수준에서 마력을 집중시키는 매개체인 스태프가 없는 상태로 시전 하는 주문의 위력은 반의 반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젠장…!!"
"후후, 깜짝 선물은 이걸로 끝이니? 마법사 아가씨."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 외에는 희망이 없던 메림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진심으로 분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쌍둥이 자매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릴…."
"메림… 언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 생각한 그녀들은 마지막으로 서로 꼭 끌어안았다.
"으음~ 지금 상황에서 누가 먼저 나랑 놀 거냐고 물어보면 보나마나 서로 자기가 먼저 죽겠다고 말할게 뻔하겠지? 더 이상 신파극을 보는 건 사양이니까, 내가 직접 순서를 정해줄게."
뻐엉!
화염구에 의해 그을린 얼굴을 순식간에 재생시킨 강화인간은 메림을 '가볍게' 걷어차서 멀찍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언니!!!"
"우으윽…."
다만, 강화인간의 기준에서 가볍게 걷어찬 거지, 성인 남성 수준의 각력으로 걷어찬 힘이었기에 메림은 배를 부여잡고 끅끅거렸다.
멀찍이 떨어져 버린 쌍둥이 자매는 서로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아아아!!! 너희들은 어쩜 이렇게 이쁜 행동만 골라서 하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아름다운 모습…! 그러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어!!!"
잔뜩 흥분한 채, 커다란 손으로 마릴의 두 발목을 동시에 잡아 거꾸로 매달리게 한 강화인간은 그 상태에서 씩 웃으며 반대쪽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아…, 아… 아…!! 안 돼!!!"
앞으로 무슨 광경이 벌어질지 단박에 깨달은 메림이 급하게 외쳐봤지만
퍼버버벅!
강화인간은 인정사정없이 마릴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연달아 꽂아 넣었다.
퍼버버버벅!!!
으직!
이윽고 그녀의 배에서 무언가가 뭉개지는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져서야 강화인간은 주먹질을 그만뒀다.
"커헉…! 허어어… 어… 어."
뱃속의 내장이 몇 군데나 터져나가며 있을 수 없는 통증이 마릴을 엄습한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어머머, 이를 어쩌니? 이제 아기는 못 낳겠구나? 어차피 다들 여기서 죽을 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마릴은 쇼크로 인해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 눈이 완전히 풀려버린 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흠흠~ 다음은 어디를 작살내 볼까…."
강화인간이 다시 주먹에 힘을 주려고 하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응?"
천장에 큼지막한 균열이 쩍! 벌어지고, 그 틈으로 누군가가 내려왔다.
낡은 투구와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로덴이다.
"흠~ 체격을 보아하니 남자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봐. 지금 이 아이랑 한참 재미보고 있거…?!!"
투구 속의 틈 사이로 가려진 로덴의 눈을 마주 보게 되자, 순간적으로 오한을 느낀 강화인간은 붙들고 있던 마릴을 내팽개치고, 마치 상자의 구석에 붙은 벌레처럼 방의 모서리 끝에 몸을 바짝 기댔다.
"너, 너…, 너는 뭐, 뭐 하는 놈이야!!!"
새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느낀 강화인간은 말을 더듬거렸다.
"……."
마릴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만에 순식간에 달려와서 그녀를 받아낸 로덴은 구석으로 도망간 강화인간을 무시하고는 메림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릴을 내려놓은 로덴은 바로 옆에 있는 메림을 바라봤다.
넋을 잃었군, 이 상황이면 무리도 아닌가…내가 준 그건 아직 갖고 있겠지?만약에 없다면 인벤토리에 있는 걸 꺼내면 그만이지만….
짝!
"…어?"
메림의 뺨을 가볍게 때리며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 한 로덴은 최대한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포션."
이제야 막 정신을 차린 메림은 잠시 눈을 껌뻑거렸지만, 포션을 언급한 로덴과 그가 손가락으로 지목하고 있는 마릴을 번갈아 보고는 퍼뜩 배낭을 뒤적거렸다.
메림이 서둘러 꺼내 든 건 어비스로 가기 전날에 로덴에게 답례로 받았던 중급 포션이다.
그녀가 포션을 아직 갖고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로덴은 인벤토리 속에서 깨끗한 칼을 꺼내 들고는 마릴의 옷을 찢었다.
"흐으읍…!!마릴…!"
강화인간에 의해 여러 번 가격 당한, 검보랏빛으로 변색돼버린 마릴의 복부가 여실히 드러나자 메림은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로덴은 내장이 상하지 않게끔 복부를 찔렀고, 찌른 부위를 통해 죽은 피가 주르륵 빠져나갔다.
"먹여."
"네, 넷!"
메림은 지시를 듣자마자 포션 뚜껑을 따고 마릴의 입술에 갖다 댔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옆에 있는 로덴이 도와준 덕에 어떻게든 먹일 수 있었다.
그러자 마릴의 복부에 나있는 상처를 통해 마저 빼지 못한 죽은 피가 완전히 빠져나간 뒤에 상처가 아물었고, 변색됐던 복부도 원래의 뽀얀 빛깔로 되돌아왔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릴의 뱃속에서 파열당했던 내장들도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가쁜 호흡도 안정적으로 바뀌며 편안한 얼굴이 됐다.
중급 포션을 사용한 건 처음이지만… 이 정도로 효과가 좋았나…?
메림은 적지 않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동생의 목숨을 건지게 됐으니 그 의문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사실 로덴이 쌍둥이 자매에게 미리 건네줬던 포션은 중급이 아닌, 로덴이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효과가 좋은 상급 포션이다.
급한불도 껐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덴은 가까운 자리에 널브러진 모험가의 시체가 쥐고 있던 검을 주워 들고, 강화인간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뒤늦게나마 자신이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을 자각한 강화인간은 다가오고 있는 로덴을 보면서 이를 갈고 있었다.
이 내가… 생명 과학기술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진정한 신인류인 내가 저런 놈한테, 열등한 인간한테 겁을 먹었다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로덴은 천천히, 산책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좁혀왔다.
"히야아아앗!!!"
본능적으로 느낀 불안함을 떨쳐낸 강화인간이 괴성을 지르며 로덴에게 덤벼들었다. 우선은 발차기!
퍼어억!
발차기가 명치에 적중하면서 경쾌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서 정권! 돌려차기! 내려찍기!
연달아서 공격을 명중시키니 멀찍이 밀려나 버린 로덴의 몸은 맨 구석의 벽에 박혔다.
"아하하하~!! 역시 단순한 착각이었어!! 그저 튼튼한 장난감일 뿐이야!!!!"
로덴을 쫒아간 강화인간은 감히 자신을 움츠러들게 만든 이 장난감을 한방에 죽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머리만 피해서 무자비한 연타를 꽂아 넣기 시작한다.
두두두두두두!!!!
"자, 자, 자, 자!! 점점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지?!"
콰과광!! 콰콰광!!
"네 까짓게 감히 날 물러나게 해?! 네 까짓게 감히 날 겁먹게 해?! 열등한 생물 주제에!!!"
콰아악!!!
잠시 후… 로덴의 낡은 투구에 꽂아 넣은 정권으로 마무리를 짓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상대방에게서 잠시 눈을 뗀 강화인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칠게 숨을 골랐다.
"헉… 허억!! 제…, 제법 튼튼한 장난감이었어."
"…너도 튼튼하길 바라. 진심으로."
나직하게 들려온 로덴의 목소리에 강화인간은 서둘러 고개를 들어 돌리려 했지만
서걱!
…어? 뭐야? 어째서 내 몸이 저쪽에…?
강화인간의 눈에 담긴 건, 목을 잃어버린 채 피분수를 뿜어내는 자신의 몸뚱이와 검을 막 휘두른 로덴의 모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