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쌍둥이와 던전 (9)
* * *
로덴이 명단에 적혀있는 쌍둥이 자매의 이름을 확인하기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약 4시간 전….
어비스 심계 3층.
콰직!
"끼에에에!!"
핀이 연달아 휘두른 철퇴를 방어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팔이 부러져 버린, 새하얀 피부의 괴인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메림 씨! 지금입니다!"
후방에서 주문을 완성시킨 메림의 스태프 끝에서 쏘아진, 거대한 불덩어리가 붉은 궤적을 그리며 괴인을 집어삼켰다.
퍼어엉! 강렬한 폭음과 함께 새까맣게 그을려버린 괴인은 그대로 힘없이 쓰러지다가 연신 움찔거리더니 축 늘어졌다.
"허억… 헉!"
"퉷! 몇 번을 찌른 건지 모르겠네, 이 망할 벌거숭이 새끼… 진짜 더럽게 안 죽더라."
피 섞인 침을 뱉은 알타프는 숯덩어리가 돼버린 괴인의 시체를 걷어찼다.
"후우…! 이 계층의 마물이 유난히 강한 것도 있지만, 이번에는 저희가 오히려 기습을 받아서 시작이 아찔했군요."
일행들은 하나같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습공격에서 자신을 지키려다가 부상을 입은 동생을 향해 달려간 메림을 제외하면.
"마릴!!"
한달음에 달려간 메림이 팔을 부여잡고 있던 동생의 소매를 급히 걷어내니,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버린 팔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다.
"…완전히 부러진 정도는 아닌데, 뼈에 금이 좀 가버린 거 같아."
팔에서 느껴지는 자극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마릴이었지만 그녀는 언니 대신 자기가 다친 것으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서둘러서 포션을 꺼내 든 메림은 퉁퉁 부어오른 팔 위에 포션의 일부를 뿌린 뒤, 나머지를 마릴에게 먹였다.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이게 적당하겠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근처에서 적당한 크기의 길쭉한 쇳덩어리를 주워온 핀이 그것을 부목 삼아 마릴에 팔에 바짝 붙인 뒤, 붕대를 둘둘 감아줬다.
"아까 전에는 지켜줘서 고마워… 좀 괜찮아?"
"응. 메림이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부상은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리고 대장도 고마워요."
동료들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지은 마릴은 자기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붕대를 감은 팔을 쥐락펴락했다. 적절한 응급처치도 받았으니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금방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마릴의 부상을 봐주는 동안 혼자서 전리품을 회수한 알타프가 돌아왔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지금까지 잡은 놈들 중 가장 커다란 게 박혀있던데? 이것 보라고."
그는 동료들에게 보란 듯이 괴인의 흉부에 박혀있던 큼지막한 수정을 들이밀었다.
"이건… 크기랑 비례해서 그런지, 마력도 더 많이 느껴지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만한 마력이라면 은화 세 닢 정도는 받을 수 있을 듯한데."
"~"
수정안에 깃든 마력을 감지한 메림의 평가에 알타프는 저절로 휘파람을 불었다.
심계 3층에서 서식하고 있는 하얀 괴인들은 지금까지 상대한 마물들 보다 훨씬 민첩하고, 끈질기며, 힘도 강했지만, 그나마 한 마리씩만 행동한 덕분에 6마리까지는 어찌저찌 잡을 수 있었다.
짝!
이만하면 충분한 성과라고 생각한 핀은 손뼉을 마주치며 동료들이 주목하게 했다.
"슬슬 보급품도 거의 다 떨어지기도 했고, 시간도 얼마 안 남았을 테니…. 이번 탐색은 여기까지!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이 장소에서 가만히 쉬는 걸로 하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시죠?"
딱히 반대 의견은 없었다. 다른 이들도 지금이 적당히 끝낼 타이밍이라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약 20분 남짓. 한숨 돌리기만 하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아~! 이런 기세라면 다음 기회에 공략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때까지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이번 원정도 별 탈 없이. 무사히 귀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긴 탐색이 끝났다는 안도감 속에서 몸을 움찔거린 알타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아래쪽이 근질근질하네. 잠깐 일 좀 보고 올게."
그는 가까운 모퉁이 너머로 잽싸게 뛰어간 뒤, 즉시 바지를 내렸다. 쪼르륵 거리는 물줄기 소리가 들린다.
"으으, 시~원하구나…."
배설 행위를 통한 해방감에 몸을 부르르 떨던 알타프는 아랫도리를 탈탈 털어내며 바지를 올리던 중,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
파티의 눈 역할을 도맡을 정도로 눈썰미가 좋은 알타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칠 만한, 미세한 부자연스러움.
벽면에 손을 짚어보니 미묘하게 튀어올라와 있는 스위치가 만져졌다.
설마… 비밀방?!
화들짝 놀라며 스위치에서 손을 뗀 알타프는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흘겨봤다.
"아직도 싸는 중이야? 너무 오래 싸는 것도 건강에 안 좋다고?"
"자, 잠깐만! 아까 물을 좀 많이 마셔서 그런지 계속 나오고 있네… 아하하하…! 좀 만 기다려봐."
어설프게 변명하며 더 깊은 모퉁이로 몸을 숨긴 알타프는 최대한 조용히…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혹시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은밀하게….
"후우우…."
저 녀석들한텐 미안하지만 애초에 내가 발견한 거잖아? 그러니 아무 문제없다고. 여기 있는 아티팩트는 이제 내 거야….
예기치 못한 크나큰 행운은 그의 마음속에 새까만 욕망이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꾸우욱
그리고, 욕망과 초조함은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눈앞에 있는 스위치가 보물이 들어있는 비밀방과 연결된 장치인지, 파멸로 이끄는 함정을 발동시키는 장치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만약이라는 단어는 가장 무의미한 단어지만… 그럼에도 굳이 말해본다.
만약, 알타프가 동료들에게 스위치의 존재를 알리고, 마법사인 메림과 함께 이 스위치를 살펴봤다면 특정 마법을 발동시키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가정일 뿐, 알타프가 스위치를 완전히 누름과 동시에 천장에 붙은 스피커에서 여성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해당="" 층에="" 계신="" 연구진들을="" 최하층으로="" 피난시킬="" 전송="" 마법="" 장치가="" 가동됩니다.="" 현장에="" 분들께서는="" 모든="" 작업을="" 일제히="" 중단해주시고,="" 절차에="" 따라…=""/>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전송 마법?"
그 목소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일행들에게도 똑같이 들렸다.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알타프 씨!! 이쪽으로 빨리 돌아오세요!!"
"어…, 어! 가고 있어!"
욕심에 눈이 멀어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알타프는 당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동료들에게 합류했다.
<…카운트를 시작합니다.=""/>
무언가 복잡한 설명을 한참 동안 하던 여성의 목소리는 숫자를 10에서부터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10… 9…="" 8…=""/>
이 목소리는 메림 일행만이 아닌, 심계 3층에 있는 다른 모험가 그룹에게도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1… 0.="" 전송을="" 시작합니다.=""/>
우우우웅!
그 말과 함께 심계 3층에 있던 모든 모험가의 발아래에 복잡한 마법진이 나타났고, 빛에 휩싸인 그들은 순식간에 어비스의 맨 아래층, 심계 4층으로 이동하게 됐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뒤틀린 뒤에 다시 정신을 차린 모험가들이 보게 된 풍경은 사뭇 달랐다.
새하얗고 평평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벽과 천장, 바퀴가 달려있는 의자, 연구일지가 널려있는 책상, 수시로 깜빡거리고 있는 네모난 기계들이 있는 커다란 방.
모험가들이 살던 세상의 지식만으로는 낯선 풍경이지만, 현대인이라면 상당히 익숙한 형태의 물건들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핀이냐…?"
"표정을 보아하니 당신들도 휘말린 모양이군요."
주위를 둘러보다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메림 일행과, 남자 넷으로 구성된 모험가 그룹은 같은 길드 소속이며, 전원 동 등급이다.
대검을 등에 매고 있는 남자가 대표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들은 3층에서 사냥하고 있다가 뜬금없이 이쪽으로 이동하게 돼버렸는데, 너희는 뭔가 짚이는 거 없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었거든요."
각 그룹의 파티장이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알타프는 속으로 흠칫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우연한 타이밍에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스스로 정당화했다.
"뭐, 됐어. 이제 와서 원인을 따져봐야 의미 없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이 방에는 딱히 출구도 안 보이는 거 같은데… 역시 저 놈을 쳐야 하나?"
"정황상 그럴 거 같긴 합니다."
그들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방 한가운데에 세워진 커다란 원형통이다. 지금까지 보았던 원형통들과 달리 온전한 형태였고, 그 안에는 2M가 넘는 크기의 하얀 괴인이 담겨 있었다.
"3층에서 사냥한 괴인과 비슷하지만 덩치가 훨씬 크군요. 이 어비스의 보스일까요?"
"커다란 피클통을 보는 기분이네. 이게 보스든 뭐든 간에 일단 조져야겠지."
원형통을 둘러싼 모험가들은 최대한 큰 공격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그 안에 있던 괴인이 눈을 번쩍 떴다.
풀쩍!
그 즉시 높이 뛰어올라 원형통에서 빠져나온 튀어나온 괴인은 온몸에 묻어 있는 녹색의 액체를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는 눈 앞에 있는 모험가들을 쓱 훑어본 뒤에 기분 나쁘게 히죽거렸다.
"우후후후, 지금까지 실패작들이랑 노는 건 재밌었니? 귀여운 장난감들아."
모험가들이 살기에 반응할 틈도 없이 잔상만 남는 엄청난 속도로 주먹을 휘두른 괴인의 공격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검을 매고 있던 모험가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고,
파삭!
머리통이 부서지면서 뇌수와 피, 뼈와 살이 섞인 물체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어머… 생각보다 훨씬 물렁한 장난감이네? 최대한 천천히 부숴야 나도 제대로 즐길 수 있겠어."
* * *
딸랑!
"주인님! 어서 오세요!"
주인이 없는 동안 가게를 보고 있던 록시아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로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그에게 쪼르르 다가갔지만, 그녀는 곧장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님…? 혹시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
나도 참… 이 나이 먹고 표정 관리 한 번을 못하는군.
조금 전까지 록시아가 읽고 있다가 덮어둔 낡은 책을 바라본 로덴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전했다.
"…돌아오자마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다시 나갔다 와야 할거 같구나. 오늘 장사는 끝이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문 걸어 잠그고, 푹 쉬고 있으렴."
록시아는 주인이 어디로 가려는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방 올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네…. 다녀오세요. 주인님."
…가게문의 간판을 외출로 바꿔두고 재빠르게 동북쪽 방향의 숲으로 달려간 로덴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당장 머리를 가릴만한 건 이것밖에 없나.
그가 꺼낸 것은 여기저기 녹이 슬어버린 낡아빠진 투구.
모험가 시절, 아득바득 모았던 돈으로 맨 처음 구매한 장비라 쭉 버리지 않고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물건이다.
투구를 내려다보던 로덴은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책을 읽고서 모험가를 동경하게 됐다는 쌍둥이 자매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손님이기도 하고, 귀중한 단골이기도 하니 이런식으로 잃어버릴 수는 없겠지.
로덴은 낡아빠진 투구를 뒤집어 쓰며 작게 중얼거렸다.
"가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