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2화 (12/149)

〈 12화 〉 쌍둥이와 던전 (8)

* * *

"기상~ 기싸앙~!!"

짝짝짝­!

말번초였던 메림은 손뼉을 치는 소리까지 동원하면서 파티원들을 깨웠다.

딱딱한 철판 위에 모포를 깔아 두었을 뿐인, 차마 좋다고는 표현하지 못할 잠자리라 그런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일어난 일행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남아있었다.

"하~아암. 메림…, 벌써 움직일 시간이야?"

"좋은 아침이라고 해야 하려나… 자기 전이랑 주변 풍경이 똑같아서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안가…."

"다들 잘 주무셨습니까…? 배만 채우고서 곧장 출발하도록 하죠."

수통에 보관한 물과 보존식으로 허기를 달래기 시작한 일행은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장비를 착용하며 잠을 완전히 떨쳐냈다.

"라이트(Light)"

조금 전까지 의지하고 있던 모닥불이 완전히 꺼짐과 동시에 한껏 폼을 잡으며 스태프를 치켜든 메림이 라이트 마법을 시전 했다.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구체가 지팡이의 고리 한 가운데에 생성되었다.

메림은 손가락을 빙빙 돌려 구체를 조종하더니, 파티의 눈 역할을 맡은 알타프의 머리 위에 둥둥 떠오르게 했다. 그것도 하트 모양으로.

"우웅~ 내가 주는 선물♡"

"아이고, 마법사님의 선물이라니 황송하기 그지없어라."

두 사람이 가벼운 어조로 농담을 주고받은 모습을 지켜본 핀이 희미하게 웃으면서도 여전히 벌어져 있는, 더욱더 깊숙한 심층으로 내려가는 균열을 내려다봤다.

"일단은 저랑 알타프 씨가 먼저 들어갈 테니, 거기서 다시 부르면 두 분도 바짝 따라오세요."

네 명이 동시에 들어가기는 다소 좁았기에 인원을 나누기로 했고, 쌍둥이 자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확인한 핀과 알타프는 균열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쿠웅­!

심계 2층의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허리춤에 있는 무기를 뽑아 들어 경계태세를 갖춘 핀과 알타프는 주변을 날카롭게 훑어봤다.

여전히 철판과 톱니바퀴로 구성되어 있는 공간이었지만… 구석자리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거대한 크기의 원형통이 놓여있었다.

절반 이상 깨져있는 원형통은 정체를 모를 초록색의 액체로 흠뻑 젖어있다. 마치…

"…깨진 알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일단 주변에 수상한 낌새나 기척은 없어. 대장."

핀은 천장을 향해 내려와도 좋다고 소리쳤고, 사뿐히 내려온 쌍둥이 자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원형통에 집중됐다.

"옛날에 여기 살던 사람들이 만든 건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기분 나쁜 조형물이네요."

짤막한 감상만을 남긴 채 진형을 짜고 심계 2층을 탐색하기 시작한 일행이 처음으로 마주한 건, 건량과 육포를 깨작거리고 있는 다른 모험가 그룹이었다.

의자로 삼기 딱 알맞게 솟아오른 톱니바퀴 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던 모험가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니, 그들도 기척을 느끼고 메림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로 처음 보는 얼굴, 아마 다른 도시에서 건너온 모험가들이다.

남자 넷에 여자 한 명으로 구성된 모험가 그룹은 자연스럽게 무기 쪽으로 손이 올라갔다.

어비스로 들어가기 전에 길드에 이름을 등록한 만큼, 어지간하면 피를 보는 경우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한 것이다.

나머지 일행을 멈춰 세우고, 비어있는 양손을 가볍게 든 채 홀로 다가간 핀이 부드럽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단순히 지나가던 길이니 그렇게까지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예."

상대방의 정중한 태도에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진 모험가 일행의 목에 걸린 인식표는 동이 둘, 강철이 셋이다.

"보아하니 여기서 탐색을 좀 하신 거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이쪽 계층에서 사냥해야 하는 마물의 특징을 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바깥에 있었을 때도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현장에서 직접 얻는 정보가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법이다.

"……."

그들은 자기들끼리 눈을 잠시 마주치다가도 그 정도쯤이야,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거린 모험가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동그란 쇳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어. 눈 같이 생긴 부분에서 매직 미사일 같은 게 나오니까 조심하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행은 정보료로 대동화 세 닢을 건네준 뒤, 모험가 그룹을 지나쳤다. 쇠냄새가 물씬 풍기는 회색빛의 복도를 계속 나아간다.

"캡틴, 우리가 어비스에 들어온 지… 대략 17, 18 시간 정도 지나지 않았어?"

"대강 맞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아티팩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그러게, 마커스 파티가 이 계층에서 아티팩트를 찾았다고 엄청 자랑했었는데…, 벽을 더듬다가 나타난 방에 있었다고 했었지."

어비스는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일정 시간이 지나갈 시 통로를 통해 넘어온 사람들을 바깥으로 쫓아내는 구조로 되어있다.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정확히 24시간. 현재 메림 일행에게는 7시간이 조금 모자라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복도를 빠져나온 일행의 눈 앞에 복싱 경기장 4개를 이어 붙인듯한 넓이의 공동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때,

선두에서 함정이나 숨겨진 방의 여부를 확인하며 나아가던 알타프가 무언가를 찾아냄과 동시에 수신호를 보내 일행을 멈추게 했다.

"…아까 그 친구들이 얘기한 그대로의 생김새네."

알타프가 조용히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공중에 낮게 떠있는 쇳덩어리 마물들이 공동을 순회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후열에 있던 쌍둥이 자매가 그것들을 보며 수군거렸다.

"1층에 있던 녀석들처럼 골렘의 일종이겠지?"

"스스로 움직이는 쇳덩어리면 골렘 말고는 달리 없잖아."

옆에서 조용히 적들을 관찰하던 핀이 차분하게 작전을 짰다.

"어디 보자… 숫자는 다섯… 이번에는 메림 양이랑 알타프 씨가 선제공격을 하면서 시작하죠. 원거리 공격을 사용하는 부류라고 했으니, 마릴 양은 메림 양을 지키고 있어 주세요."

그의 지시대로 곧바로 자세를 잡은 메림은 주문을 영창 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작은 적을 상대하는 만큼 정확도가 높은 주문을 선택했다.

"아이스 니들(Ice needle)"

캐스팅이 끝나자 지팡이 끝에서 서리를 머금은 얼음송곳이 만들어졌고, 그녀의 옆자리에 있던 알타프도 품속에서 비도를 꺼내 들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메림과 알타프는 각자 꺼내 든 공격수단을 동시에 날렸다.

푸푹! 쨍그랑­!

"스트라이크~!!"

비도와 얼음송곳이 적에게 보기 좋게 적중한 모습을 본 두 사람은 똑같은 대사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삐삐삐삐­!

그 즉시 일행들을 위치를 찾아낸 나머지 소형 골렘 세 마리는 한가운데에 박혀있는 수정을 통해 에너지를 모아서 발사했다.

핀과 알타프는 적에게 전진하면서 회피, 메림에게 날아온 광선은 그녀의 옆을 지키던 마릴이 버클러를 높이 들어 막아냈다.

"읏! 팔이 조금 저릿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막을만해!!"

"우오오오!!!"

소형 골렘들이 다시 공격을 충전할 틈도 없이 녀석들에게 달라붙은 핀이 힘찬 함성과 함께 양손의 철퇴로 동시에 두 마리를, 알타프가 검을 휘둘러 마지막 녀석을 처리했다.

메림 일행 측의 선공으로 시작한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게 됐다.

"후우~! 선빵은 언제나 옳다!"

"동감, 선빵 최고!"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들 했어요."

각자 한 마디씩 수고의 말을 건넨 일행이 소형 골렘의 잔해에서 전리품을 챙기려는 찰나,

쩌저저저­억!!

그들의 눈 앞에 심계 3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균열이 생겨났다.

"어라…?"

"이제 겨우 다섯 마리만 잡았는데…."

일행들은 지금의 상황에 얼떨떨해하면서도 파티장인 핀을 바라봤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군요. 일단 다 같이 정해봅시다. 이 계층에서 만족할지, 이다음 층으로 내려갈지."

* * *

점심시간. 홀로 도심지에 방문한 로덴은 슬슬 떨어져 가는 재료를 보충하기 위해 북적거리는 시장을 지나가고 있던 길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물건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장에 널린 물건들을 두리번거리지만 그의 관심을 이끌만한 물건은 딱히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을 빠져나온 로덴은 모험가 길드 맞은편에 위치한 3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 영지에 정착한 이후 그가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게 된, 인근에서 나름 잘 나가는 상단인 '홀름 상단'의 본부다.

건물 앞에 널린 상자를 나르느라 바빠 보이는 직원들 사이에서 장부를 작성하고 있는 상단 간부가 로덴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먼저 말을 걸었다

"로덴 씨. 요즘에 장사는 좀 잘 되십니까?"

"최근에 생긴 어비스 덕분에 지나치게 잘 돼서 문제죠. 일전에 구매했던 약초들과 유리병들을 다시 주문하려고 합니다."

"로덴 씨의 가게에 배달한 뒤로 열흘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부족해지다니."

"지나치게 잘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번보다 두 배 더 많은 분량으로 부탁합니다."

로덴은 미리 준비해둔 은화 주머니를 건네줬고, 그것을 받은 간부는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뜻으로 주머니 안의 금액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구하시는 수량이 조금 많아서 사흘 정도 뒤에야 보내줄 수 있을 거 같습니다만은…."

"아직 남아있는 재료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네, 로덴 씨의 가게로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방문하신 김에 안에서 차라도 한잔 어떠십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괜찮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어서 서둘러야 하거든요."

간부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등을 돌린 로덴은 곧장 맞은편에 있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구하기 힘든 건 아니지만 직접 구하려면 다소 번거로운 정도의, 상단 규모에서는 잘 취급하지 않는 종류의 재료를 따로 의뢰하기 위해서다.

­이게 진짜야?!

­저 녀석들이 쉽게 죽을 리 없어….

­말도 안 돼!

"음…?"

곧장 접수원에게 향하려 했으나, 무언가 소란스러운 느낌을 받은 로덴은 많은 모험가들이 웅성거리는 게시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뢰 게시판은 바로 옆에 있는데, 저 게시판에 뭐가 붙어 있길래 저렇게 몰려있는 거지?

호기심을 느낀 그는 모험가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다가가 게시판에 붙은 명단을 읽어봤다.

"……."

그것은 어비스에 진입한 이후로 24시간 이상이 초과한, 사망자로 처리된 모험가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었고, 그 명단에는 쌍둥이 자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