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8화 (8/149)

〈 8화 〉 쌍둥이와 던전 (4)

* * *

바르멜라 영지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한 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갔고, 지금은 로덴의 가게 안에 네 명의 남녀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비스를 탐색해 봤다고?"

"어제 처음 들어가 봤지만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 솔직히 어렸을 때 읽었던 책에 써져있는 게 다 구라인 줄 알았는데, 전부 사실이었어. 처음 보는 것 투성이야."

"엄청 신기하긴 했어요. 무척 반듯하게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건물들도 있었고,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사과가 맺힌 나무도 있었는데, 거기서 하나 따왔어요."

전날에 탐색한 어비스의 풍경을 최대한 자세히 묘사하던 마릴은 테이블 위에 커다란 보따리를 올려둔 다음, 그것을 풀었다.

그러자 몹시 거대한 사과가 모습을 드러냈고, 메림과 겹쳐 앉아있던 록시아가 자신의 머리보다 더 커다란 사과, 애플 헤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와… 이거 사과 맞죠?"

"응~! 사과 맞아. 거기 있는 주변의 동물들이 먹어도 다 멀쩡하길래 그 자리에서 동료들이랑 같이 먹어봤는데 존맛이었어."

난생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록시아가 메림의 끝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존맛… 이요?"

"'존나 맛있다'의 줄임말. 여기서 한 단계 더 격상시키면 개존맛이고, 그다음 단계는 개씹…."

"에라이."

"겍."

옆에서 보다 못한 로덴이 손날을 세워 메림의 머리 위를 꾹 눌렀다.

"연약한 숙녀의 머리 위에 거리낌 없이 수도를 날리다니… 록시아에게 이런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면 정서에 상당히 안 좋다고?"

"그건 내가 할 대사야. 마법사면 마법사답게 올바른 지식만 알려줘야지. 애한테 뭔 해괴한 말을 가르쳐주고 있어."

손날 모양으로 지긋이 눌려버린 고깔모자를 다시 펼친 메림이 반론을 펼쳤다.

"핫, 마법사의 본분은 최대한 다양한 지식을 추구하는 법이라고~ 로덴 아저씨. 그렇게 앞 뒤가 꽉꽉 막혔으니까 사귀고 있는 여자가 없지."

아픈 곳을 찌르기는….

"핑계는 참 그럴듯하네. 그나저나 너희는 어비스 탐색을 더 할 생각이냐?"

"네. 들어가기 전엔 좀 불안하긴 했지만… 처음 보는 타입의 마물들이 있긴 해도 생각만큼 위험하진 않더라고요. 조금 욕심을 내서 심계 1층까지 내려갔다 왔는데, 오늘 얻은 전리품들만 팔아도 평소 벌이의 5배 이상은 가뿐히 넘어요."

"소문을 듣고 가까운 도시에서 굴러온 동업자들까지 몰린 덕에 길드에서 정해준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게 문제야. 다음에 또 들어가려면 무려 일주일을 기다려야 해."

그나마 이것마저도 쌍둥이 자매와 동료들이 이쪽 길드 출신인 덕에 빨리 들어갈 수 있는 편이라 한다.

"……."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들은 로덴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기로 했다.

"돈도 좋지만, 너무 과한 욕심은 내지 마. 그 공간이 괜히 어비스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심계로 깊이 들어갈수록 급격하게 위험해지는 특징을 가진, 사람을 잡아먹는 마경이지."

"직접 가본 사람처럼 말하네? 로덴 아저씨는 전직 모험가였어?"

"…칼로 먹고살던 옛 친구한테 들은 경험담이다. 그 녀석도 어비스에서 여러 번 죽을 뻔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남았어."

"헤에… 뭐, 일단은 잘 새겨둘게."

"충고 고마워요."

상대방의 기분이 어느 정도는 전해졌는지 솔직하게 고맙다고 표현한 쌍둥이 자매는 벽에 걸쳐둔 각자의 무기를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이건 안 챙기나?"

로덴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애플 헤드를 통통두드리며 가게에서 나가려는 자매를 불러 세웠다.

"오늘은 두 사람에게 썰도 좀 풀 겸, 그 녀석을 건네주려고 온 거야. 존맛이니까 한번 먹어보라고."

"껍질은 좀 두꺼워서 크게 벗기셔야 할 거예요. 탐사 전날에 다시 올게요."

"선물 고마워요! 다음에 또 봬요. 메림 언니, 마릴 언니!"

"바이 바이~!"

여느 때처럼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쌍둥이 자매의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배웅한 로덴.

그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애플 헤드를 보며 오랜만에 순수한 호의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정말이지 무식하게 크군. 일단은 샐러드나 만들어 볼까.

…장사를 끝낸 뒤, 시장에 같이 다녀온 두 사람은 도마 위에 내려놓은 식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록시아,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칼을 사용할 때는 늘 조심해야 돼."

"네."

써억­썩­

록시아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 양상추를 썰고 있었고, 옆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로덴은 그녀가 혹시라도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수시로 흘끔흘끔 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으니까, 다치지 않게 맨 끝에서부터 천­천히…."

솔직히 말해서 이 아이의 손에 날붙이 같은 건 절대로 쥐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필요한 일이야.

칼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만 훗날에 칼에 의해 크게 다칠 일이 없는 만큼, 로덴은 최근 들어 조금씩이나마 식칼을 사용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고 있는 상황이다.

잠시 후.

얇게 저민 닭고기 살과, 조금 전에 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채소, 쌍둥이 자매에게 받은 애플 헤드의 일부를 잘게 썰어서 버무린 뒤, 마지막으로 드레싱을 더해서 완성시킨 샐러드는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럼 먹자."

"잘 먹겠습니다! 주인님."

식사 인사를 하며 샐러드를 한 움큼 찍어낸 록시아는 입을 크게 벌려 주인과 함께 만든 샐러드를 맛봤고, 즉시 감상평을 내뱉었다.

"메림 언니가 말해준 것처럼 존맛… 아니, 개존맛이에요! 주인님!"

"…하아아아……."

깊은 한숨을 내뿜은 로덴은 록시아가 그 왈가닥 마법사한테 해괴한 말을 배우게 됐다며 마음속 깊이 한탄했다.

* * *

다음날 점심이 지난 시각, 로덴은 외출하기 전에 앞서 록시아에게 늘 하던 교육을 해주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반지는 계속 끼고 있고, 만에 하나의 경우가 생겼다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주인님이 건네주신 양피지를 쫘­악 찢으라고 하셨죠?"

배운 대로 잘만 대답해주는 록시아가 대견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은 로덴은 천천히 도시로 걸어가기 시작하면서도 배웅하고 있는 록시아를 향해 크게 말했다.

"그러면 잠깐 나갔다 올게! 얼마 걸리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

"네! 제 쪽도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주… 삼촌!!"

주인님이란 단어가 튀어나오려다가 삼촌이라는 호칭으로 고쳐 부른 록시아는 점차 멀어져 가는 주인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점차 멀어지고 있는 가게가 작은 점이 되어 갈 때쯤, 도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로덴의 발걸음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어비스가 발견됐다는 위치는 분명 이쪽 방향의 숲 속이라고 했던가…? 옆 마을로 가는 방향이기도 하군.

그런 생각을 하던 로덴이 느긋이 걸어가고 있으니, 도심지를 기준으로 동북쪽 방향에 위치한 울창한 원생림으로 진입했다.

굵직한 나무에서부터 이파리가 무성한 가지가 드높게 솟아 있는, 대부분의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숲 속은 시계가 좋지 않아 제법 음산했다.

로덴은 숲 속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통된 방향으로만 찍혀 있는 발자국들을 발견했고, 그 흔적을 쭉 따라간다.

…직선방향으로 걸어서는 40분 정도 거리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덴은 이번 산책의 목적지, 어비스가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쌍둥이 자매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어비스를 지키고 있는 모험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흐흐, 이번에도 내가 이겼군?"

"아이 씹… 더는 못해먹겠네. 너는 모험가 말고 도박사로 직업을 바꿔야 하는 거 아냐?"

"군소리 말고 돈이나 내. 빨리 다음 판이나 하자고."

지키고 있다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비스 입구 앞에 자리를 잡고 있던 5명의 모험가들은 한가롭게 포커를 치고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음? 누가 오고 있는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로덴의 기척을 느낀 모험가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로 목소리를 냈다.

"이봐~! 여기는 바르멜라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는 어비스니까,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미리 등록하고 나서 오라고."

이쪽은 다수고 상대방은 혼자인 만큼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포커를 이어서 하고 있는 모험가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더니, 로덴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그를 알아봤다.

"분명… 포션 장사하는 연금술사 양반 맞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요?"

"별 대단한 이유는 없고, 어비스의 통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서 산책 겸 와봤습니다."

"아따, 이 양반이 혼자서 위험하게 시리. 숲에서 강도나 마물 하고 마주치면 어쩌려고…."

"어비스로 오는 길목은 모험가가 많이 드나드니까 어지간한 길목보다는 훨씬 안전하지 않습니까?"

최근에 이곳을 찾아온 모험가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덕에 어비스로 가는 길목의 강도와 마물들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

뭐, 로덴의 입장에서는 강도가 나오든, 마물이 나오든 별 상관없겠지만.

"맞는 말이긴 하지. 단순히 구경하는 사람까지 막으라는 말은 없었으니 질리도록 보고 가쇼."

"하하, 고맙습니다."

모험가들을 향해 너털웃음을 지은 로덴은 어비스와 이어지는 통로를 유심히 바라봤다.

허공에서 투명한 유리벽이 깨져 있는 느낌의 커다란 균열 사이로 완전히 다른 풍경이 살짝 엿보였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차원, 이계의 풍경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쌍둥이 자매 덕분에 이미 예상은 했지만… 저 풍경은 역시 마스티 구역이군.

로덴은 어비스의 통로를 바라보며 정보창을 활성화시켰고, 문자들을 쭉 읽어 봤다.

[연결된 차원 : 마스티]

[최대 계층 : 심계 4층]

[위험도 : C]

[입장 제한 인원수 : 22/25]

"흠…."

혹시나 해서 와봤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그냥 내버려 둬도 별 문제는 없겠어. 한두 달 정도만 지나면 모험가들이 알아서 공략하겠네.

눈앞에 있는 어비스가 최대 S에서 최소 D로 구분되어있는 5단계의 위험도 중, 두 번째로 낮은 C랭크의 어비스임을 확인한 로덴은 별 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방치하기로 결심했다.

"제법 신기하게 생겼군요. 그럼 이만."

"벌써 가는 거요? 조심히 돌아가쇼."

별다른 미련 없이 돌아선 로덴이 그대로 가려는 순간,

파지지직­!

어비스의 통로에서부터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보니 모험가 일행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허억…! 헉!! 허어어억!!"

"후우! 훅…!"

전원 남자, 4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모험가 일행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도 흥분하고 있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모험가 중 한 명이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씨바아아알!!!! 우리가 드디어 아티팩트를 찾았어!! 씨부랄 아티팩트를 가져왔다고!!!!!!"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