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6화 (6/149)

〈 6화 〉 쌍둥이와 던전 (2)

* * *

아무도 없는 가게에 홀로 앉아 있는 검은 원피스 차림의 소녀는 얌전히 책을 읽으면서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딸라앙­

가게문이 열릴 때마다 항상 들리는 규칙적인 방울소리가 울려 퍼지자,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소녀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어서 오세요."

"다녀왔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인사말을 꺼낸 록시아는 문을 연 사람이 단순한 손님이 아닌, 세금 관련 문제로 잠시 외출했던 로덴임을 알게 되자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달려갔다.

록시아의 모습과 행동은 한 달 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 만큼 확연히 달려져 있었다.

지푸라기처럼 앙상했던 몸은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살집이 붙게 됐고, 흉터로 난자됐던 몸은 적절한 치료약 덕분에 완전히 아물었으며, 죽은 생선처럼 초점이 없던 눈동자는 이제 총명함 마저 느껴진다.

"내가 없는 동안 별 일 없었지?"

"네! 손님 세 분이 방문한 것 말고는 달리 없었고, 뭐가 팔렸는지는 여기에 다 적어놨어요. 한번 읽어주세요!"

팔랑­

방긋 웃으며 대답한 록시아는 그녀가 직접 적어낸 판매 목록을 로덴에게 보여줬다.

마치 100점짜리 시험지를 자랑하려는 아이 같다.

틈틈이 가르쳐 줬다지만 겨우 한 달 사이에 글을 읽고 쓰는 것도 많이 늘었고, 인간 쪽의 말도 능숙하게 됐고… 무언가를 배우는 건 엄청 빠른 편인 거 같네.

로덴이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의 발치 앞까지 다가온 록시아는 손과 발을 꼼지락 거리면서 로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저… 이번에도 가게 열심히 봤으니까…."

주인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던 록시아는 양팔을 높게 뻗으며 눈을 꼭 감았다.

"이제는 의무가 다 됐네. 혼자서 가게 보느라 수고했어."

로덴은 눈 앞의 소녀가 바라는 데로 자세를 낮춰 록시아와 가벼운 포옹을, 체온을 나눴다.

그녀는 이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언제나 눈치를 봐야 했던 노예가 아닌, 그야말로 아버지를 좋아하는 딸 같은 소녀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이런 느낌 전혀 몰랐는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렇게나 좋은 거구나라고 절실히 실감한 로덴은 그쯤에서 록시아와의 포옹을 끝냈다.

"아."

아쉬움이 느껴지는 록시아의 목소리.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리를 벌린 로덴은 안쪽에 있는 문을 열면서 록시아의 등을 살살 떠밀었다.

"나머지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졸리면 조금 자두고."

"……."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린 록시아는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새끼손가락에 끼워둔 반지를 빼냈다.

그와 동시에 눈이 검게 물든다. 피부색도 점차 새파래지고, 숨겨졌던 뿔이 드러나면서 인간 소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마족 소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후… 우."

반지를 통해 변신하고 있을 때는 뭐랄까, 얇은 옷을 껴 입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본모습으로 돌아오니 한층 편해진 기분이 된 록시아는 이윽고 그녀의 방… 이 아닌, 로덴의 방으로 들어갔다.

딱히 주인님의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는 말 안 하셨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그럴듯한 변명을 한 록시아는 주인이 사용하는 침대에 몸을 맡긴다.

"주인님…."

그녀는 주인이 남긴 희미한 잔향에 심취한 듯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로덴과 만나기 전까지 겪었던 인생을 떠올렸다.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서 필요 없는 아이로 버려졌다.

최하급 마족으로 낙인이 찍힐 때는 그동안 자신을 돌봐줬던 시설의 마족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버려졌다.

피난길에 용병단과 마주했을 때는 같은 처지라고 믿었던 친구들에게서 미끼로 버려졌다.

지금의 행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언제나 버림받기만 한 인생을 떠올리며 기분이 울적해진 록시아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저는 늘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착한 아이로 있을 테니 부디 주인님만은… 저를… 록시아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딸라앙­ 딸랑­

한편, 계산대 앞에서 한가로이 손톱을 정리하고 있던 로덴을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다.

"어서 오세… 너희들이냐."

"단골손님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로덴 아저씨."

"안녕하세요."

로덴이 운영하는 포션 가게의 첫 번째 손님이자, 단골손님인 쌍둥이 자매. 메림과 마릴이 문 앞에서 손을 흔들거렸다.

의뢰를 끝마치고서 바로 방문한 모양새인지 쌍둥이의 차림새는 다소 지저분했다.

"되도록이면 신발만이라도 털고 들어오라고."

로덴의 지시에 따라 고분고분히 두 발에 묻은 흙더미를 순서대로 통통털고서 들어온 쌍둥이 자매는 진열대 앞에 마련된 손님용 의자에 몸을 맡겼다.

"으아아~ 이제 좀 편하다."

"메림.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스럽게 입 벌리고 있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입 좀 벌리면 어때? 여기서라도 편하게 좀 있자고."

"나랑 같은 얼굴로 그런 늘어진 표정을 하면 내가 더 창피하단 말이야…"

처음 방문한 이후로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 로덴의 가게로 방문하는 쌍둥이 자매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이제 거의 일상이 됐다.

달그락­

쌍둥이 자매가 앉은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려준 로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네를 보고 있으면 여기가 포션 가게인지 찻집인지 종종 헷갈리더군. 록시아가 안에서 쉬고 있으니까 너무 크게 떠들지는 마."

"네~이."

"늘 고마워요. 로덴 씨. 잘 마실게요."

차를 후후 불며 각자 한 모금씩 홀짝거린 쌍둥이 자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 됐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얼굴을 한 메림은 로덴을 보며 씩 웃었다.

"오늘 아침에 다른 모험가들이 떠드는 걸 들었는데, 그저께 로덴 아저씨랑 비슷한 사람이 서쪽의 홍등가 구역에서 나오는 걸 봤다고 하더라. 진짜야~?"

그리 말하며 팔꿈치로 로덴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있는 메림의 얼굴에는 상대방이 어떻게 당황할지 기대하는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로덴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내가 맞을걸."

"우와아아…."

"아나, 그렇게 순순히 대답하면 안 되지! 이럴 때는 '나는 그런데 간 적 없어!'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발뺌하는 게 정석 아니야?!"

"부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바르멜라 영지의 홍등가에서 운영하는 창관과 도박장은 영주의 허가를 받아낸,엄연한 합법시설이다.

달리 사귀고 있는 사람이 없는 로덴의 입장에서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창관에 들락거렸다는 사실은 굳이 숨겨야 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치, 재미없게 시리."

흥이 다 깨졌다는 얼굴로 차를 들이켠 메림과 얼굴이 새빨게 진채 로덴의 하반신을 흘끔거린 마릴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진열대에 있는 포션을 집어 들고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다음에 봐. 재미없는 로덴 아저씨."

"아, 안녕히 계세요."

"너네도 잘 들어가라."

계산을 끝마친 뒤, 가게에서 멀어져 가는 쌍둥이 자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로덴은 몸을 한번 가볍게 풀고서 점차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여기까지군. 이번에는 나 혼자 치워볼까….

간판을 뒤집은 로덴은 구석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빗자루로 가게의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쓸어내 눈에 거슬리는 흙먼지 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냈다.

그 다음은 마른걸레로 진열대와 손님용 테이블, 계산대와 창문을 간단히 닦아내고서 가게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록시아, 슬슬 밥 먹을 준비…"

로덴은 록시아를 부르며 그녀의 방문을 열었지만, 정작 부르려는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의문은 일단 뒤로 미루고서 곧장 옆에 붙어있는 방문을 열자, 로덴의 침대를 허둥지둥 정리하고 있는 록시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 주, 주인님의 침대를 좀 저,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래? 내 거는 대충 해놔도 상관없으니까 적당히 마무리해. 슬슬 밥 먹어야지."

"네, 넷! 바로 나갈게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로덴이 거실로 발을 돌리자마자 록시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흐아아아…."

주인님의 침대에서 깜빡 잠들어 버린 데다 거짓말까지 해버리다니… 죄송해요. 주인님. 침대는 깔끔히 정리해둘게요.

이후로 같이 저녁을 먹고서 설거지도 함께한 두 사람은 순서대로 씻은 뒤,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침대에 드러눕던 로덴은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끼더니 베개를 향해 코를 벌름거렸다.

내 침대에서… 특히 베개 쪽에 유난히 좋은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록시아가 정리하면서 뭐 향수 같은 거라도 뿌려줬나?

설마 그 냄새의 정체가 록시아의 체취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로덴은 그저 좋은 향수라고만 생각하며 평안한 기분으로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전히 잠에 빠져든, 조용한 새벽의 바르멜라 영지에 돌연 이변이 일어났다.

쿠웅­!

최초에는 갑자기 어디선가 무언가 묵중한 것이 부딪히는 듯한 굵고 짧은 충돌음이 영지 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주, 주인님!! 지금 드, 들으셨나요…?!"

굉음이 들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로덴의 방문을 벌컥 열은 사람은 잠옷 차림의 록시아였다.

자고 있다가 갑자기 커다란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버린 그녀로서는 로덴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나도 들었어. 일단 진정하고 숨을…"

하지만, 로덴이 소녀를 진정시킬 틈조차 없이 주변이 미친 듯이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우르르르르르르!!!!!!

"꺄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패닉에 빠진 록시아는 본능적으로 로덴에게 안겨들어 그의 품에서 덜덜 떨었다.

와르르르!! 쨍그랑!!!

지진으로 인해 물건들이 넘어지고, 깨지는 소리는 로덴의 집뿐만이 아니라 바르멜라 영지의 대부분의 집에서도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진정해, 진정해. 괜찮아,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록시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네…, 네. 주인님…."

지금 이 순간, 영지 내에서 가장 침착한 상태인 사람은 로덴일 것이다.

그는 벌벌 떨고 있는 록시아를 끌어안은 채 진정시키면서도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무언가가 충돌한 강렬한 굉음, 뒤이어 이어지는 지진.

로덴은 이 현상이 의미하는 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어비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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