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쌍둥이와 던전
* * *
일반적인 노예를 소유하는 경우, 그 수가 다섯 이상을 넘지 않는 이상 단순한 개인 소유물로 인정되어 굳이 시청에 보고 할 의무 따위는 없지만,
록시아의 경우에는 앞으로도 친척관계라는 설정으로 밀고 나갈 예정이었기에 이 도시에서 아무 문제없이 지내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신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현재, 식사를 마무리한 로덴과 록시아는 영주관 맞은편에 위치한 시청 건물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거라. 알았지?"
끄덕
무언의 대답을 확인하고서 록시아의 손을 이끈 로덴은 시민권과 세금을 담당하는 창구 쪽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창구 너머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말라깽이 청년은 로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어…, 로덴 씨 맞죠? 한 달 만이네요."
기억을 더듬어서 상대방의 이름을 떠올린 청년은 로덴이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 바르멜라 영지의 신분패 작성을 도와줬던 관리였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저번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게 제 일인 걸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로덴은 록시아의 등을 살짝 떠밀며 관리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 친척동생인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제가 돌봐주게 됐습니다만."
무슨 용건인지 단번에 짐작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린 관리는 책상 위에 널려있는 업무용 서류들을 구석에다 치운 후,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 아이의 신분패를 발급받으러 오셨겠군요? 어디서 온 아이입니까?"
"라이델 영지에서 왔습니다."
"라이델…."
작게 중얼거린 관리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라이델 영지에서 사용했던 신분패는 챙겨 오셨겠죠?"
신분패를 발급하기에 앞서, 과거에 살았던 도시에서 사용한 신분패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절차였다.
"예, 예. 당연하죠. 여깄습니다."
살이 빠질 정도로 성실히 일하는 양반 같은데, 이거 미안하게 됐수다.
관리에게 마음속으로 짧은 사과를 건넨 로덴이 그에게 보여준 것은 신분패가 아닌, 자그마한 까마귀 조각상.
루덴이 종종 사용하는 아티팩트 [인식을 왜곡하는 까마귀]였다.
관리가 조각상을 보는 즉시,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서 미리 생각해둔 대사를 술술 읊었다.
"저 아이의 이름은 록시아. 나이는 14살, 출생지는 라이델 영지, 로덴과의 관계는 사촌동생. 당신은 정식적인 발급 절차를 거친 결과, 록시아를 바르멜라 영지의 제3급 시민으로 판정했다."
"록시아… 나이는 14살… 라이델 영지… 로덴의 사촌… 3급 시민…."
까마귀 조각상을 도로 집어넣은 로덴은 그가 했던 말을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펜을 끄적이던 관리가 서서히 정신을 차릴 때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록시아의 신분패는 언제쯤 받으러 오면 되겠습니까?"
"예. 일주일 정도만 기다려 주시면 되고, 발급 수수료는…, 아직 성인이 아니니까 은화 한 닢만 주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관리에게 인사와 동시에 은화 한 닢을 건넨 로덴은 그 길로 록시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 잠시 후, 록시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로덴은 그녀의 방 앞에 양동이와 걸레를 내려놨다.
"어제는 시간이 늦어서 그대로 쓰게 했지만 아무래도 한 번은 닦아야겠더군. 앞으로는 네가 쓸 방이니까 청소는 스스로 해야겠지?"
고개를 끄덕거린 록시아에게서 등을 돌린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설거지하고 오는 동안에 닦아두거라. 내일은 새 침대랑 옷장도 들일 거니까 깨끗이 해야 한다?"
"네! 깨끗하게 닦을게요. 주인님."
씩씩하게 대답한 록시아의 얼굴에는 확연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서 내심 불안했는데, 드디어 자기가 할 일이 생긴 것 자체가 그저 기뻤다.
탓탓탓!
물을 적신 걸레를 꼭 짜고, 방의 맨 구석부터 힘차게 나아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주인한테 언제 순결을 뺏기거나 학대당할지 몰라하며 불안에 떨었던 소녀는 지금은 그저 순수하게 주인을 돕고, 기쁘게 해서 칭찬을 받고 싶었다.
* * *
아침밥을 챙기자마자 찾아온 가구점 직원들의 도움으로 새 침대와 옷장을 들인 뒤, 두 사람은 가게 구역의 진열대 앞에 서있었다.
"이 빨간 병은 체력 포션이고, 저기 노란 병은 스태미나 포션, 저~어기 투명한 병들은 해독제… 맞죠?"
"그렇지, 내가 체력 포션을 꺼내오라고 하면 지금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그 병을 가져다주면 되는 거야. 여기 진열할 때는 오른쪽에서부터 효과가 좋은 걸로 정렬하니까 그것도 잘 기억해 두고."
"네!"
"그리고 포션들의 가격은……."
로덴은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록시아에게 진열돼 있는 포션의 종류와 가격을 가르쳐 줬다.
"좋아. 당장은 이 정도만 기억해두면 충분할 거다. 오늘 하루는 견학한다 생각하고, 필요할 때마다 잔돈을 꺼내서 도와주거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꼬박꼬박 대답도 잘하고, 저렇게나 의욕을 보이고 있으면 가르쳐주는 입장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지는 기분이 들었다.
계산대 뒷자리에 록시아를 앉혀둔 그는 문 앞에 걸어둔 외출 중 팻말을 치우기 위해 가게문을 활짝 열어젖히려는 순간,
꽈앙!
"꾸악!"
로덴이 문을 반쯤 열었을 때, 묵직한 느낌이 들더니 그의 가게에 괴상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진짜! 내가 뭐라고 했어? 문에 바짝 붙어있지 말라고 했잖아!"
"아이고 엉덩이야…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어서 궁금했지."
가게문 앞에는 엉덩방아를 찢고 있는 여마법사와 그녀에게 잔소리하고 있는 여전사가 있었다.
주황색 머리의 마법사와 방패 전사는 똑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자매였다.
"… 어서 오세요.라고 말해야 합니까?"
문 앞에 걸어둔 팻말을 뒤집어서 열림으로 고친 로덴이 그리 묻자,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며 일어난 마법사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네에~! 귀하디 귀한 첫 손님이니까, 서비스 좀 많이 해달라고요. 아저씨."
아저씨….
"아,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 도시의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험가인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털털한 마법사와는 정반대로 다소곳하게 인사한 방패 전사의 말투와 분위기만 보면 이 쌍둥이 자매는 서로 직업을 잘못 선택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반짝
쌍둥이의 목에 걸려있는 모험가들의 신분패, 은은한 구릿빛을 띄고 있는 인식표가 로덴의 눈에 들어온다.
흠, 둘 다 모험가로군. 저 색깔은 분명히… 딱 중견급이네.
5단계로 나뉜 모험가 등급 중 제3위인 동 등급은 이런 변방 도시에서는 나름대로 대접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일단 쌍둥이 모험가 자매를 가게 안으로 들인 로덴은 그녀들과 간단한 통성명을 나눴다.
단발머리의 마법사가 언니인 메림, 포니테일의 방패 전사가 동생인 마릴.
"얼마 전부터 길드에 소문이 오갔는데, 드디어 이 촌동네에도 포션 가게가 생기게 됐다고 들었거든. 로덴 아저씨."
이제 막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메림은 연장자한테 존댓말을 듣기가 영 어색하다는 이유로 서로 편하게 얘기하자면서 제멋대로 말을 놨고,
"임무 때문에 여길 지나는 길이기도 했고, 오늘은 열리지 않았을까 싶어서 조금 전 까지 메림하고 같이 문 앞에 있었어요. 로덴 씨."
반면에 동생인 마릴은 여전히 존댓말을 유지한다.
"그러냐? 아무튼간에 기념비적인 첫 손님인 만큼… 소소한 증정품이라도 하나씩 나눠 줘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로덴은 진열대의 맨 왼쪽 자리에 위치한, 가장 성능이 낮은 체력 포션을 두 개 꺼내고는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흐흐~! 선물 고마워. 로덴 오빠."
"어허."
오빠라고 치켜세우며 날름 포션을 챙겨가려는 메림을 가볍게 제지한 로덴은 진열대에 널려있는 포션들을 가리켰다.
"예의상 다른 물건 하나라도 사면서 집어가야지."
"으…, 안 그래도 몇 개는 사갈 생각이었다고. 미리 묻는 건데, 얼마에 팔고 있는 거야?"
메림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건넨 질문에 로덴은 미리 정해둔 가격으로 대답했다.
"종류마다 다르긴 하지만 여기 올려둔 최하급 체력 포션의 경우에는 하나당 대동화 5개."
"대박."
가격을 듣자마자 손뼉을 치며 감탄한 메림은 옆에 있는 동생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들었어? 마릴? 최하급 하나당 대동화 5개에 팔고 있데!"
"으응, 우리 길드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싸네….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고개를 끄덕거린 마릴은 투명한 병들이 진열되어 있는 쪽을 유심히 바라봤고, 병에는 약품명 대신 독을 사용하는 마물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로덴 씨. 마물의 이름이 적혀있는 이 병들은 혹시…?"
"여기 주변에 서식하는, 독을 가진 마물의 종류별로 대응할 수 있는 해독제지. 일단은 10 가지 종류만 구비해놨지만."
"10 가지 종류?"
쌍둥이 자매는 체력 포션의 가격보다도 다양한 해독제를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일반적인 모험가 길드나 포션 가게는 해당 구역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마물 2, 3 종류에 대응하는 해독제만 취급하는데, 이런 작은 가게에서 10가지 씩이나 준비하다니…
말없이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쌍둥이 자매는 진열대에서 최하급 포션 4개와 해독제 하나를 꺼내 들어 계산대에 올려놨다.
"다 합해서 은화 2개, 대동화 6개다. 성능은 걱정하지 말라고. 조금이라도 불만족스러우면 배로 환불해줄 테니."
"오~ 자신만만한데. 아저씨."
로덴의 눈빛을 보고 결코 허세 따위가 아님을 느낀 메림은 은화 3개를 흔쾌히 내밀었다.
"록시아. 지금은 얼마를 건네줘야 하는지 알지?"
"네. 사, 삼촌 자, 잠시만요."
계산대 밑에 있는 잔돈 주머니를 주섬주섬거린 록시아는 메림에게 쪼르르 달려가 양손에 담은 대동화 4개를 건네줬다.
"고마워~! 귀여운 꼬마 아가씨. 삼촌이랑 하나도 안 닮았네."
"쓸데없는 말은 덧붙이지 마시지? 자, 여기 증정품."
"사러 오든, 환불하러 오든 다시 들러야겠는데? 또 보자고. 아저씨랑 꼬마 아가씨."
"아하하…, 메림이 하는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로덴의 반응을 보며 키득거린 메림과 그녀의 옆에서 멋쩍게 웃은 마릴은 천천히 손을 흔들며 가게에서 떠났다.
후! 시작부터 참 특이한 손님이 다 오네.
"록시아, 조금 전에는 잘해줬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주면 돼."
"에헤헤…."
칭찬의 말을 꺼낸 로덴이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볼이 발그레진 채 배시시 웃었다.
딸랑!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손님이 가게에 들어왔고, 두 사람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