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4화 (4/149)

〈 4화 〉 20골드짜리 마왕 (4)

* * *

강자를 숭배하는 경향이 유난히 강한 마족들의 나라. 마계국.

그곳의 주민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관리자에게 힘과 마나를 측정받는 것으로 종합적인 재능을 판단하고, 계급이 정해진다.

마계국의 주민이었던 록시아도 다른 마족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10살이 되는 해에 측정을 받았다.

…그 결과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최하급이자, 최약체인 제10급. 마족들의 언어로 쓰레기라는 뜻을 가진 [스쿠피타]로 분류됐다.

천애고아였기에 마땅히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그녀는 스쿠피타들의 주거지인 빈민가 구역으로 쫓겨나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구걸과 도둑질 혹은 잡일꾼 생활을 전전하며 빈민가에서 3년을 조금 넘게 버텨냈을 때쯤, 마계국에서 벌어진 내전의 여파가 그녀가 생활하고 있던 구역까지 번지게 되었다.

내전의 불길에서부터 하루하루 버티고 버틴 끝에 결국에는 피난을 택한 록시아는 빈민가에서 같이 지내던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목숨을 내건 여행길에 오른지 약 3개월 만에 인간들의 영역까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노예 사냥꾼을 겸하는 용병단과 마주치며 친구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미끼로 내던져져 버린 순간, 록시아의 짧은 모험은 끝이 났다.

* * *

거울에 비친 인간 소녀의 모습을 보며 록시아는 눈을 껌뻑 껌뻑 거렸다.

거울 속에 있는 인간 소녀도 록시아의 모습을 보며 눈을 껌뻑 껌뻑 거렸다.

"이게… 저예요?"

록시아는 거울에서 눈을 떼고, 두 손을 내려다봤다.

손의 크기와 형태는 그녀의 것이 틀림없었지만 피부색은 마족의 혈통을 상징하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아닌, 온실 속에서 자란 인간 아가씨처럼 뽀얀 빛깔이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동안, 쓸데없는 시선이 쏠리면 여러모로 귀찮거든. 밖에 있는 동안에는 그 반지를 계속 끼고 있거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린 록시아는 두 손을 모아서 새끼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꼭 쥐었다.

저 반지를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 마계국에서 꽤 유용하게 쓴 물건이었는데.

마계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로덴은 록시아의 체격에 맞게끔 미리 잘라둔 망토와 슬리퍼를 건네주고는 그녀와 함께 도심지를 향해서 느긋이 걸어갔다.

"…와아아."

마족인 자신이 인간의 도시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기만 한 록시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보게 된 아침의 시장에서는 돗자리나 나무판자 위에 다양한 옷이나 과일, 잡다한 물건들이 늘어져있다.

­자자! 쌉니다~ 싸요.

­신선한 사과 하나 집어가쇼!

여기저기에서 이제야 막 장사를 하기 시작한 상인들의 모습과,

­이번 의뢰도 실패하면 우린 진짜 망하는 거야…!

­병신처럼 고블린 놈들의 함정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자고.

­얼씨구? 너나 잘해 새꺄.

허름한 장비로 구색만 겨우 갖춘 모험가들의 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별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시장조차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정신없이 둘러보기 바쁜 록시아는 그 와중에도 로덴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주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때 분명히 봤었는데… 여기쯤인가?

집을 구했을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헤매던 로덴은 간신히 찾아낸 의상점 간판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기억력을 살짝 한탄했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다가왔다.

"어머! 귀여운 아가씨네. 아빠랑 같이 왔니?"

"사, 삼초니랑 가치 왔어요."

여주인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시선을 맞춘 소녀에게 말을 걸었고, 록시아는 미리 명령들은 대로 로덴과의 관계를 삼촌이라고 밝혔다.

"이 아이의 옷이 필요해서 왔는데…, 몸에 맞는 크기의 옷들로 좀 골라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속옷도."

로덴은 여자아이의 옷을 골라주는 재주 따위는 없었기에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 최선을 다해서 꾸며줄게요. 꼬마야 따라오렴. 이 언니가 이쁜 숙녀로 만들어줄게."

"주ㅇ…, 삼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갔다 오렴."

"…네."

정작 록시아는 로덴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엄연한 명령이었기에 얌전히 여주인의 뒤를 따라갔다.

멀어지는 소녀에게서 눈을 돌린 로덴은 창가 쪽에 몸을 기댄 채 거리의 풍경을 멍하니 감상하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록시아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긴 했지만 마왕이라는 정체를 숨기는 기색은 영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여자아이인 데다 지금까지 말도 잘 듣고 있고, 나이대를 생각하면 상당히 얌전한 태도가 마음에 쏙 들었기에 그냥 이대로 저 소녀랑 같이 생활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뭐, 이제부터는 가게를 운영해야 하는 입장이니 말 잘 듣는 점원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게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겠지.

"삼촌… 다 이, 입었어요."

어느새 옷을 골라온 건지 옆에서 록시아의 어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건, 하늘하늘한 프릴이 들어간 선분홍색의 레이스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자색 스커트를 입은 록시아의 모습.

"어, 어울리나요?"

"특히 그 리본이 잘 어울리는데."

화룡정점으로 나비모양으로 묶여있는 도톰한 리본을 옆머리에 장식하고 있으니 소녀다운 귀여움이 유난히 강조됐다.

"이야~ 뭘 입혀줘도 다 어울려서 고민 좀 했는데, 마음에 드시나요?"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드네요. 이걸 포함해서 얼추 비슷하게 어울리는 다른 옷 두 벌도 같이 사도록 하죠."

"오호호~! 리본은 서비스로 드려야겠네요."

오래간만에 통 큰 손님을 맞이해서 그런지 싱글벙글 웃은 여주인은 눈여겨봤던 옷들을 깔끔히 담아내 로덴에게 건네줬다.

계산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온 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옷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로덴은 록시아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새 옷을 산 기념으로 이 주변을 좀 더 걸어볼까? 앞으로 여기서 지내려면 주변 풍경도 눈에 익혀야 할 테니 말이다."

"네!"

로덴은 지금까지 중 가장 힘차게 대답한 록시아와 함께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적당히 눈에 밟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맨 구석자리에 앉아 점원에게서 메뉴판을 받았다.

턱을 괴며 메뉴판을 대충 훑어본 로덴은 그것을 록시아에게 건네줬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아무거나 원하는 데로 골라봐라."

"……."

하지만 록시아는 건네받은 메뉴판을 멀뚱히 보기만 할 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덴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자기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 참, 글은 못 읽겠군. 위에서부터 쭉 읽어줄 테니 이거다 싶은 걸로 말해보거라."

"네. 주인님."

"어디 보자…, 커피류를 제외하면 샌드위치, 애플파이, 팬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민트푸딩."

민트푸딩은 또 뭐야….

이런 유의 음식점과는 인연이 없었던 록시아는 로덴이 말해주는 음식명을 들어도 아리송했다.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맨 처음 말해주신 게 가장 싸겠죠?

"그러면 저는 샌드위ㅊ"

"샌드위치만은 안 된다."

록시아의 입에서 그 단어가 완성되기 직전,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받은 로덴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아니, 이게 뭐하고 해야할지… 샌드위치 만은 절대로 먹이면 안 된다는 느낌이 확 들었거든."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소녀가 뭘로 골라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건너편 자리에 있는 다른 손님이 팬케이크를 잘라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저쪽에 있는 분이 먹고 있는 거랑 같은 걸로 먹어도 괜찮을까요…?"

"되고말고."

로덴은 점원을 불러 팬케이크 두 개와 그가 마실 커피를 주문했다.

"두 분 모두 맛있게 드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조각난 버터가 올려진, 먹음직스러운 팬케이크가 두 사람을 맞이해줬다.

"생각보다 뜨거우니까 어제처럼 손으로 집지 말고 제대로 식기를 사용하거라."

"우으으…."

전날 밤에 보여줬던 추태를 떠올려버린 록시아는 볼이 화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달그락달그락…

"그래, 그렇지. 지금처럼 포크로 찍어서 잘라내면 돼."

맞은편 자리에 앉은 로덴이 가르쳐주는 데로 팬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낸 록시아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팬케이크 조각을 후후­불면서도 낯선 기분을 느꼈다.

여태껏 그녀가 먹어온 빵은 차가운 것이 전부였기에 음식에 의해 입이 데이지 않도록 식힌다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처음으로 맛보게 된 팬케이크는 너무나도 달콤하면서도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잘 먹네."

"너무… 맛있어요."

소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하고는 식사를 이어간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맛'이 뒤죽박죽 섞여서 충돌하고 있으니 여간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전날과 다르게 음식의 맛을 감상할 수 있게 된 록시아는 생각했다. 먹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행복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행하는 것이라고.

후루룩.

한편, 진작에 자기 몫의 음식을 다 먹어치운 로덴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메뉴판을 곰곰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몹시 궁금하고, 신경쓰인다.

…한번 도전해 볼까?

로덴은 짧은 고민 끝에 점원을 불러내어 한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저희 가게의 명물인 민트푸딩입니다~!"

그는 조금 전부터 미치도록 신경 쓰였던 녹색의 푸딩을 한 숟가락 뜨고는 입안에 밀어 넣었다.

오오, 뭔가 시원한 게 제법 신선한 느낌이야.

"…주인님이 드시고 계신 그건 뭔가요?"

어느새 팬케이크를 다 먹었는지 로덴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록시아.

"이건 푸딩이라는 건데, 한 입 먹어봐라."

"네."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 음식을 공유하고 싶었던 로덴은 큼지막하게 뜬 푸딩을 록시아에게 먹여봤지만….

"우우욱…!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건 도저히…, 우으읍!"

"……."

곧장 헛구역질을 하는 록시아를 바라보며 내심 섭섭한 느낌을 받아버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