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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3화 (3/149)

〈 3화 〉 20골드짜리 마왕 (3)

* * *

알몸으로 엎드리고 있던 록시아를 방치하고 아무 말 없이 옷장으로 다가간 로덴은 거기서 새하얀 와이셔츠를 꺼내 들고는,

휙­!

아직도 납작 엎드리고 있는 록시아를 향해 던졌다.

"이왕 벗은 김에 그거라도 걸치고, 잠시 기다리거라."

"네…? 아, 알겠습니다."

의아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대답한 록시아를 뒤로 한 로덴은 그녀가 막 벗었던 넝마를 챙기고 방에서 유유히 빠져나간다.

솔직히 말해서, 로덴에게 성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도심지에 있을 때만 해도 여자를 안기 위해 홍등가로 향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안으려고 할 정도로 절제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쌓인 성욕을 풀어줄 기회가 생긴다면 확실히 풀어준다는 사상의 소유자다.

조금 전 같은 경우에도 상대방이 건강하고 성숙하게 자란 여성이었다면, 그는 거부감 없이 옷을 벗었을 것이다.

사람을 뭘로 보고…, 인간적으로 그런 꼬마를 안는 건 경우가 아니지. 약이나 좀 챙겨오자.

로덴은 조금 전에 챙겼던 넝마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곧장 지하에 있는 작업장의 문을 열었다.

내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업대에는 다양한 크기의 실험용 비커와 유리병들이 나열하고 있고, 옆 자리의 작업대 위에는 톱니바퀴 장치와 조합된 유리 막대기들이 기묘한 모습으로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이리저리 뒤섞고 있다.

지구에 있던 시절에 배웠던 지식과 이 세상에서 새로이 습득한 지식을 끌어모아서 만든 자동 배합기를 볼 때마다 로덴은 갓 걸음마를 시작한 자식을 보는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알아서 움직이는 배합기를 흘끔흘끔 보면서도 작업장 맨 구석의 상자 뚜껑을 찾아낸 로덴은 안에 보관된 각기 다른 종류의 약품 두 개와, 면봉, 빈 주사기, 소독약을 챙겨서 록시아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오, 오셨습니까. 주인님."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영력한 록시아의 가냘픈 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커다란 와이셔츠는 옷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양쪽 손은 긴소매로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았고, 상체와 하체도 무방비해서 위아래로 조금만 각도를 바꾸면 가슴하고 사타구니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준.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 당장은 마땅한 옷이 없는 것을. 적어도 조금 전의 넝마보다 몇 배는 더 깨끗하고, 따듯한 복장이다.

내일은 여자애가 입을만한 옷하고 속옷을 좀 사두어야겠네….

침대에 걸터앉은 로덴은 조금 전에 준비한 주사기를 꺼내 들어서 바늘 부분을 약품병 윗부분에 넣고는 쭉 잡아당겼다.

자그마한 바늘을 통해 병 안에 있는 내용물이 옮겨지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신기했는지 옆에 있던 록시아는 멍하니 구경하기 바빴지만

그녀의 눈빛은 곧장 두려워하는 눈으로 바뀌었다.

저렇게나 무시무시해 보이는 바늘이 자신의 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늘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찌익­하고 튀어나오니 공포심은 더욱 커진다.

아, 부자들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하더니 저의 주인은 이런 몹쓸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군요… .

지금의 상황에서 저항해봐야 돌아오는 건 욕설과 손찌검뿐인 것을 이미 몸으로 철저히 학습한 록시아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지금부터 시작될 고문이 최대한 짧게 끝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날카로운 무언가로 찌르는 느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시원한 물을 적신 천 같은 걸로 팔뚝을 더듬거리는 느낌뿐이다.

"예방약은 이거면 충분하고…."

중얼거리는 로덴의 목소리에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니, 조금 전에 그가 들고 있던 바늘은 옆자리에 방치되어있고, 내용물은 텅텅 비어있는 채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록시아는 자신의 팔뚝을 젖은 솜으로 문지르고 있는 로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주인님은 저 바늘로 저를 찌르려고 하시던 게 아니었나요?"

"이미 찔렀다. 참고로, 저건 그냥 바늘이 아니라 주사기라는 건데… 뭐, 자세한 건 다음에 설명해 주마."

이미 찔렀다니…,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요?

록시아는 머리 위에 여러개의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소녀의 얼굴을 보며 내심 키득거린 로덴은 걸쭉한 약이 들어있는 병과 면봉을 꺼내 들고, 약병 안에 면봉을 푹 집어넣어 약이 듬뿍 묻히게 했다.

"이번에는 앉아있는 상태로 옷을 벗어라."

도대체 주인님은 지금 뭘 하고 싶은 거죠?­라는 표정을 띄운 록시아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고분고분히 와이셔츠를 벗으며 흉터가 새겨진 몸을 노출시켰다.

스윽…슥…

"흐으읏…?!"

약이 발라진 면봉이 흉터에 직접 닿게 되자,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은 록시아는 달뜬 신음을 뱉어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으읏…네…. 하으읏…!"

록시아 정도의 어린아이에게는 다소 자극적인지라 그녀는 연신 움찔거리거나 신음소리를 내버렸지만 이불보를 꽈악 쥐면서까지 최대한 인내를 발휘했다.

"그래, 그래. 착하지. 이걸로 끝이다."

"아앗…아으아…."

마지막으로 등짝에 길게 그어진 채찍 자국에 약과 소독액을 발라내는 것으로 당장 해줘야 할 최소한의 치료가 끝이 났다.

노예라는 입장이 있긴 하지만, 저 나이 때를 생각하면 아프다고 도망가거나, 비명도 지르지 않고 용케도 참아줬다는 생각이 들었던 로덴은 록시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하아… 하앗…! 주인님… 고문은 이제 끝난 건가요?"

고문?

"……크흡! 흐흐흐…."

그녀가 말한 고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된 로덴은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어쩌면 저는 가장 무서운 사람한테 팔려버린 게 아닐까요….

정작 그를 웃게 만든 록시아는 오히려 불안해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일이다.

"후우…! 후! 흐흐… 고문이랜다… 고문. 흐흐흐…."

한동안 몸을 수그려서 부들부들 떨던 로덴은 실로 오래간만에 실컷 웃은 덕분에 표정이 훨씬 더 밝아져 있었다.

"크흠! 큼!"

다만, 그것과는 별게로 뜬금없이 미친놈처럼 낄낄거린 게 다소 민망했는지 그는 과장된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이제 시간도 제법 늦어졌으니 저녁은 간단하게 해결하도록 하지."

꿀꺽­!

그 말을 듣자마자 빵을 맛있게 뜯어먹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버린 록시아는 침을 절로 삼키며 로덴의 뒤를 강아지처럼 쪼르르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덴이 간단히 준비해온 것은 베이컨을 얹은 계란 프라이와 감자를 으깨서 만든 샐러드, 덤으로 먹다 남은 딱딱한 빵 조금.

록시아는 당연히 식탁 끝자락에 덩그러니 놓인, 먹다 남은 빵이 자신의 몫이라 판단하고 눈치껏 그 자리로 이동하려 했으나 로덴에게 저지당했다.

"네 자리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넉넉히 만들었으니 마음 편히 먹어라."

"…정말로 이것까지 제가 먹어도 되는 건가요?"

"당연히."

로덴은 먼저 한입 먹어보라는 뜻으로 록시아를 향해 손짓했지만, 그녀는 아무리 그래도 노예인 자기가 주인보다 먼저 먹을 수는 없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로 굳이 명령하기도 귀찮았던 로덴은 록시아가 바라는 데로 식기를 먼저 들고, 가까이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주인님."

그제야 어설프게나마 포크를 집어 들어서 베이컨과 프라이를 동시에 찌른 록시아는 그것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입안 가득히 터져 나온 육즙에 눈을 번쩍 뜬 록시아의 표정은 저러다가 녹아내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홀한 표정이었다.

뭐하고 비교해야 할까… 평생 사료만 먹은 개가 처음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딱 저런 느낌일 것 같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저렇게 맛있게 먹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도 은근히 나이를 먹어서인지, 복스럽게 먹는 여자 아이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 로덴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식기를 사용하는 흉내라도 내고 있었지만, 중간부터 록시아는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볼이 부풀정도로 음식을 무자비하게 집어넣는 모습은 과거에 많이 먹기 대회에서 보았던 그것과 상당히 비슷했다.

노예였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굶주렸을 테니 어쩔 수 없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다음에 식사예절 정도는 가르쳐 놔야겠네.

로덴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가심 용으로 챙겨둔 빵을 으적거렸다.

두 남녀가 처음으로 같이 하게 된 식사는 참으로 빠르게 끝이 났고, 록시아를 빈 방으로 데려단 로덴은 바닥에 여분용 이불을 깔아줬다.

"일단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낼 방이다. 뭐… 당장은 아무것도 없는 방이라서 다소 불만스럽겠지만."

"다, 당치도 않아요!!"

아이고 표정 굳은 거 봐라. 뭔 농담을 못 던지겠네.

"그럼 내일 보자."

더 있어봐야 록시아가 불편해할 게 뻔했기에 그는 방에서 나가려 했지만 문을 닫기 직전, 록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저의 몸을 원하시는 게 아니시라면…, 어째서 저를 구매하셨죠?"

"점원이 필요해서 그래. 그런 의미로 내일부터 배워야 할 게 많이 있으니, 딴생각하지 말고 푹 자거라."

로덴은 말을 끝내자마자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즉시 문을 닫고 그의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여기를 건설했을 때 들었던 비용이… 조금 크게 주문하느라 9, 10골드 정도 들었었나…? 가게보다 더 비싼 20골드짜리 점원이라니.

자기가 생각해도 그럴싸한 이유 하나 제대로 못 붙인다며 자조한 로덴은 유쾌한 기분으로 잠들었다.

* * *

다음날 아침.

전날에 로덴이 방문했던 가구점 직원 두 명이 찾아와 그가 골랐던 가구들을 순서대로 나르고 있다.

"이건 여기에 두면 되겠습니까?"

"예. 그 거울은 그쯤에 내려놓으시고…."

두 직원은 제법 무거워 보이는 가구들조차 호흡을 척척 맞추면서 로덴이 원하는 위치에 정확하게 내려놓았고, 작업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우. 이걸로 다 옮겼습니다. 선생님. 저번에 분명 포션가게라고 하셨던가요? 다시 봐도 꽤나 크게 지으신 거 같네요."

"집도 겸한다고 욕심을 좀 부리긴 했죠."

작업을 끝마친 직원들에게 가벼운 차를 대접해준 로덴은 그들이 떠나기 직전, 중요한 말을 꺼냈다.

"추가로 주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저번에 주문했던 침대하고 옷장과 똑같은 걸로 하나씩 더 갖다 줬으면 합니다만."

"같이 사는 사람이 생겼나보네요?"

로덴은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무난하게 둘러대기로 했다.

"…친척애를 좀 돌보게 돼서요."

"뭐,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뵙도록 하죠."

직원들이 떠나가자마자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로덴은 록시아의 방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이제 나와도 좋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다. 직원들의 눈을 피해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던 록시아가 로덴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모습은 전날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푸석푸석했던 보라색 머리카락은 비단결처럼 고와졌고, 온몸에 붉게 물들어 있던 크고 작은 흉터들은 옅은 핑크빛을 띠는 살로 아물어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 많은 흉터들이 아물었다는 사실이 본인도 믿기 힘들었는지 록시아는 새살이 난 부위를 연신 만지작 거린다.

"이제부터 네가 앞으로 입을 옷들을 고르러 갈 거니까, 내 뒤를 잘 따라와야 한다."

"도시로 다시 가는 건가요…."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린 록시아였지만 두려워하는 기색까지는 차마 숨기지 못했다. 어느 누가 봐도 마족인 자신이 한낮의 인간의 도시에 가면 어떤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록시아를 거울 앞으로 데려간 로덴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작은 반지를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걸 끼고 나서 거울을 한번 보거라."

"네."

록시아는 고분고분히 왼쪽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꼈고,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 비친 건 평범한 인간 여자 아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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