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화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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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20골드짜리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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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의 최중심부.

알현실.

정갈한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발판이 처참히 갈라져있다.

역대 마왕을 본떠서 만든 석상들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현장은 조금 전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고스란히 표현한 듯했다.

알현실의 한 가운데에는 이 방의 주인이자, 최상위 마족의 지위에 서 있던 자. 마왕이 힘없이 쓰려져 있다.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힘겹게 숨을 고르고 있던 피투성이의 흑발 사내, 한건우는 사투 끝에 쓰러뜨린 마왕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기나긴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허억…, 헉! 드, 드디어…."

씨발…!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혼자서 처리하느라고 몇 번이나 뒤질뻔했는지 모르겠네… 이놈의 패턴을 몰랐다면 바닥에 쓰러진 건 마왕이 아니라 나였겠어.

벌컥! 벌컥!

인벤토리 속에 딱 한 병 남아있던 최상급 체력포션의 절반 가량을 상처부위에 뿌려낸 뒤, 단숨에 쭉 들이켜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후우~!"

새살이 돋아난 부위를 어루만진 건우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그는 검을 집어넣고, 마왕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명색이 마왕답게 가치를 헤아리기 힘든 보물들을 갖고 있었으나, 건우가 원하던 종류의 물건은 없었는지 그는 명백하게 실망하는 기색으로 혀를 찼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돌아갈 방법 따위는 없는 건가.

"…어째서?!"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알현실의 맨 구석 자리에서 밧줄로 꽁꽁 묶여있던 금발벽안의 여기사가 원수를 보는 표정으로 건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시치미 때지마! 용사인 네놈이 어째서 알현실로 진입하기 직전에 토벌대를 다 죽여버린 거야?! 우리는 숭고한 목적을 가진 동료 아니었어?!"

"하…."

내 어이가 없어서.

앙칼지게 소리치고 있는 여기사에게 기가 찬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건우는….

퍼억!!

"…!……!!"

무방비한 복부를 럭비공처럼 걷어찼다. 독기가 가득한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여기사는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을 했다.

"지금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게 누군데…그리고, 동료? 지금 씨발 나한테 동료라고 지껄였냐? 뚫려있는 입이라고 잘도 나불거리기는."

­필리아! 그리고 너희들까지!! 어째서야?!!

­왕국에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야. 나를 용서하라는 말은 안할게 … 건우.

퍼억! 퍽! 퍼벅!­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건우는 악귀 같은 얼굴로 여기사를 여러 번 걷어찼다.

"우웨에… 우우욱!"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채 구토하고 있는 여기사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은 건우는 그녀의 길쭉한 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애초에 너희들이 나를 따라다니던 이유는 마왕토벌을 지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놈을 쓰러뜨리느라 힘이 빠진 나를 처리하기 위해서지. 안 그래?"

"쿨럭…쿨럭…! 무, 무슨 헛소리를!!"

네가 그걸 어떻게,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순간적으로 드러내 버린 여기사는 애써 큰소리를 치며 흐트러진 모습을 감췄다.

"다른 대원들은 다 죽었는데, 너 혼자 살아남아 있는 게 같잖은 정 때문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필리아…아니, 세라스 대장님?"

"…?! 그, 그 이름을 어떻게…?"

"다 방법이 있어. 친절히 설명해줘 봐야 너는 절대로 이해 못 하겠지만. 뭐, 그럴 생각도 없고."

'정보'

건우는 마지막 루프를 통해 해금시킨 특성인 [정보창]을 활성화했다.

이것을 사용하면 마치 고전 게임의 그것처럼 사물 위에 하얀 정보창이 보이게 되는 것과 동시에 시간이 멈추게 된다.

본인도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의식만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마우스 커서의 역할을 하는 작은 구체를 조종할 수 있다.

건우는 멈춰있는 시간 속에서 여기사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정보창을 읽어봤다.

[이름 : 필리아 테르자(세라스 크라이즈)]

[종족 : 인간/요정]

[직업 : 기사, 마왕 토벌대(그림자 사냥꾼 수령)]

[기능 : 정령술LV4, 활LV3, 검 전투LV2]

[레벨 : 72 / 85]

[나이 : 128]

……

……

정보기능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진짜 이름과 직업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커서를 슬금슬금 옮긴 건우는 이번에 '그림자 사냥꾼'이라는 직업명을 클릭해 봤다.

[그림자 사냥꾼 : 알트마의 국왕과 일부 고위층 귀족, 같은 대원들 이외에는 일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원으로 구성된 비밀 단체. 주 임무인 암살 이외에도 첩보, 공작…….]

이 망할놈년들 때문에 마왕을 죽인 직후의 상황에서 그대로 허무하게 죽어버렸었지.

뒤이어지는 설명을 대충 넘기고 나서 정보창을 비활성화한 건우는 하려던 말을 이어서 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우연을 가장하고 마왕 토벌대에 합류한 다른 녀석들도 전부 네년의 따까리들이더군? 그간 준비하느라 참 애쓰셨어."

"…배신자인 나를 능욕할 작정이냐?"

더 이상 잡아떼 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세라스는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최악의 경우엔 입안에 숨겨둔 독약을 터트릴 생각이다.

"널 좆집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상당히 고민했지만…, 따로 해줘야 할 역할이 있어. 멀쩡한 몸으로 보내줄 테니 내가 죽었다고 보고해."

계속 붙들고 있던 세라스의 머리채를 놔주며 검을 꺼내든 건우는,

서걱­!

그녀를 묶어두고 있던 밧줄을 단번에 잘라냈다.

"대장씩이나 되는 네가 하는 증언이라면 그 영감탱이도 고스란히 믿어주겠지…이 정도면 도리어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의 일부를 대신 누리게 될 테니."

"하!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폐하께 거짓 보고 따위를…."

세라스가 덤벼드는 자세로 무어라 말하려고 한 순간, 건우는 미리 준비한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며 마나가 담긴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림자 사냥꾼들과 합공해서 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대신, 부하들은 전원 사망해버렸고, 유일한 생존자인 너는 겨우겨우 빠져나갔다."

"그림자 사냥꾼들과 합공해서 용사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대신, 대원들은 전원 사망해버렸고, 유일한 생존자인 나는 겨우겨우 빠져나갔다…."

건우는 자기가 한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한 세라스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좋아. 그대로만 기억해. 이제 꺼져."

쫘악­! 귀환스크롤이 찢어짐과 동시에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세라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라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건우는 세라스의 정체를 몰랐던, 필리아라고 부르던 시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보지말자 썅년…."

마왕에게 대적할 수 있는 초인에게만 붙는 호칭인 용사.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수식어까지 붙는다면 민심은 용사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무력과 명성, 어느 방향으로든 용사의 귀환이 껄끄러울 알트마의 국왕에게 있어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마왕과 용사의 공멸.

거기까지 생각하던 건우는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정보'

그리고는 검속에 비치는 자신의 정보창을 확인해 봤다.

[이름 : 한건우]

[종족 : 인간]

[직업 : 검성, 용사]

[기능 : 검 전투LV5, 연금술LV3, 요리LV1]

[레벨 : 99 / 99]

[나이 : 21]

……

……

[루프 가능 횟수 : 0/9]

솔직히 말해서, 저런 딱딱한 글자로 확인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번이 진정으로 마지막 인생이라는 것을….

본래 살고 있던 지구에서 난데없이 여기로 넘어오게 된 이후, 무려 9번의 죽음을 경험하며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건우는 차라리 세상이 바라는 대로 죽은사람이 되주기로 결심했다.

* * *

마왕에게 맞서 싸운 용사와 토벌대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노라고 세상에 공표된 지, 14년이 지났다.

하론 공국 서부 변두리 영지, 바르멜라의 도심지.

"…정보."

멍하니 전신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금발의 남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 위에 나온 글자를 쭉 읽어봤다.

[이름 : 로덴(한건우)]

[종족 : 인간]

[직업 : 연금술사(검성, 용사)]

[기능 : 검 전투LV5, 연금술LV3, 요리LV1]

[레벨 : 81 / 95]

[나이 : 35]

……

……

"시간 참 빨리도 지나가네."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의 앳된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거울에 비친 아저씨는 한건우도, 용사도 아닌, 로덴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연금술사다.

거울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정보창을 다시금 확인한 로덴은 완전히 이쪽 세상의 주민이 되어버렸음을 절실히 실감했다.

"손님. 그 거울도 구매하실 건지요?"

그런 로덴의 모습을 지켜보던 점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음, 거울이라… 이왕 새집에서 살 게 됐으니 전신거울이 하나쯤 있는 게 좋긴 하겠지.

"그러죠. 이것까지 포함해서 계산할게요."

"모두 합쳐서…, 은화 여덟 닢입니다."

품속에 있는 지갑을 뒤적거린 로덴은 상대방에게 은화 여덟 닢을 건네준 뒤, 구매한 물건들은 내일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른하늘 이었건만 물건들을 고르느라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가게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이에 노을이 저물기 시작했다.

흠, 간만에 홍등가나 들러볼까?

최근에야 공사가 끝난 포션 가게에 들일 가구들을 고르기 위해 도심지에 들른 로덴은 여기까지 온 김에 여자의 살내음을 맡기 위해서 가까운 홍등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전에는 없던 천막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홍등가로 진입하기 직전, 로덴은 반대편에 보이는 화려한 천막 안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천막을 들춰내자, 머리까지 가리고 있는 망토로 온몸을 가리거나 이와 정반대로 화려해 보이는 옷을 걸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간이경매장… 인가.

여행하면서 몇 번인가 봐왔던 풍경이었기에 이게 어떤 종류의 모임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이런 변방 영지에서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을 파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던 로덴은 인파 너머에 있는 상품을 확인해봤다.

그곳에는 푸르스름한 피부, 붉은색 눈동자를 검은색으로 감싼 역안, 뾰족한 귀와 산양의 것을 연상시키는 뿔을 가진… 마족 소녀가 있었다.

발목에 채워져있는 족쇄는 그 소녀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대신 설명해준다.

"자! 오늘의 마지막 상품입니다! 여러분들도 보시면 단번에 아시겠지만 이 소녀의 정체는… 오, 세상에! 마족! 전쟁이 한창일때, 저희 인간들이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벌벌 떨어야 했던 무시무시한 마족입니다!!"

ㄱ자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뿔달린 마족 흉내를 낸 사회자는 말을 이어서 한다.

"그런 마족에게! 무엇이든지 명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무, 엇, 이, 든, 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침을 튀기는 사회자의 말이 이어질 수록 주변의 공기는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일단 시작은 5골드에서 시작해보도록 하죠!!"

평범한 성인 남자 노예는 금화 한 닢에서 세 닢, 여자 노예는 외모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금화 두 닢에서 네 닢 사이가 평균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싸게 나온 편이었다.

­6골드

­6골드 50실버!

­7골드 30실버!!

사회자의 연설은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낙찰가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부풀려지고 있다.

"……."

로덴은 철창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족 소녀의 모습을 보며 적지않은 동정심을 느꼈지만 딱 그뿐, 그런 알량한 동정심 만으로 남을 구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게로 소녀의 모습을 보면 볼 수록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됐다.

저 아이 뭐지? 왠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 같은 게 전해지는데.

일단 확인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족 소녀의 정보를 살펴본 로덴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름 : 록시아]

[종족 : 마족]

[직업 : 피난민, 노예(마왕)]

[기능 : 마법LV1, 요리LV3]

[레벨 : 8 / 99]

[나이 : 1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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