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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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이제 왔어?”
“(...리님?)”
이미 해가 고개를 내밀 시간.
페르난도가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4시간 정도 방에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기다리는 동안 꽤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그에 비할 바는 아니다.
마법들을 켜니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하다.
피곤을 풀 시간도 없을 거다.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1~2시간 정도?
내일도 뒷정리 때문에 정신없이 바쁠 거다.
그 귀한 시간을 뺏는다고 생각하니... 전혀 아쉽지않다.
내가 그렇게 도왔는데, 뭐, 어쩌라고.
“그래, 생각보다 늦었네.”
“(...죽은 사람이 많아서...)”
내가 구해 준 두 사람 빼고, 저택의 하인들은 전부 다 죽었다.
그 두 사람이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한 덕분에, 백작의 사병들이 출동했다.
1층에 있던 지부장의 사병들은 백작가 덕분에 피해 없이 처리했고, 죽은 사람의 처리도 백작가에서 도왔다.
백작가에서 재빨리 출동한 건, 아마 사전에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작가 마법사가 현장에 있었던 걸 보면, 십중팔구 백작가에서도 지부장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겠지.
준비한 사병은 원래 지부장들의 계획이 성공한 뒤에 뒤처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작가 마법사는 어떻게 됐어?”
“(그는 백작가에서 현장 체포했습니다. 백작가에서는 그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라더군요. 그는 이 저택에 마법의 흔적을 남기는 걸 도와주기로 해서 왔다고 합니다. 리님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기 위해서겠지요.)”
내일은 페르난도가 백작가 사병과 함께 지부장들 저택을 수색한다고 한다.
수색이라고 적고 약탈이라고 말해야 할 행위를 하게 되겠지.
“백작가에서 지부장 둘 정도는 떼어가겠네?”
“(...어쩔 수 없죠. 크루스 상단은 아직 힘이 없습니다. 지부장들도, 그들의 사병도 다 죽어서. 그래도 곧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이란 참 편하다.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도 발뺌하면 되고, 일이 실패해도 콩고물이 알아서 떨어진다.
지부장 둘의 재산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백작가가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많을 것이다.
“나 때문에 괜히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리님 때문이라니요. 오히려 리님 때문에 바로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저도, 아가씨도 말이지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페르난도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피곤한 얼굴이지만 미소가 밝다.
그 전에는 뭔가 억울함이 묻어났었는데 말이다.
“그럼 다행이고. 내가 왜 그런 연극을 한 건지는 알겠어?”
“(네. 아가씨께서 바른 길로 가길 원하신 거겠죠. 더불어 저도 정신 좀 차리고요.)”
사실은 그냥 까밀라를 떼어 놓기 위해서였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크루스님은 좀 어때?”
“(많이 놀라셨지만, 앞으로는 잘 하실 겁니다. 제가 옆에서 최대한 해보겠습니다.)”
“그래,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될까?
까밀라 크루스가 다른 사람을 이용하며 살아온 세월은 꽤 길다.
이제 자기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과연 바뀔까?
모르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각성은 잠깐이고, 다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상단을 맡길 것 같다.
까밀라에겐 꿀 빠는 자리가 어울린다.
어쩌면 연이 닿아 백작을 유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상단과는 비교가 안 되는 꿀을 빨겠지.
그리고 백작을 유혹했으면 다음에는 왕을 만나서...
상상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 정도로 까밀라에게는 재능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녀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나라를 말아먹는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경국지색.
그녀가 정말 그 정도로 예쁘냐고 하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겠지만, 그녀에게는 남자를 휘어잡는 기술이 있었다.
그녀 자신에게야 그보다 더 편한 기술이 없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더 이상 그 기술을 쓰는 일을 없길 바란다.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그런 거 잘해 봐야 서큐버스 밖에 더 되겠냐고.
...그게 나지만.
그래서 내가 그녀의 재능을 더 잘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동류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수도로 갈까 해. 전에도 말했지만, 난 신살기를 찾고 있거든. 수도에 가면 아는 사람이 있겠지? 도서관이라든가.”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험가 길드 같은 길드 본부들도 전부 수도에 있으니까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그 말을 기다렸어. 지도 하나만 구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제일 좋은 걸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페르난도가 방을 나섰다.
지금 창고에 가서 하나 가져오겠다고 했다.
지도.
상단의 지도이니만큼 어느 정도 정확한 지도일 것이다.
이곳에서 얻을 것은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노잣돈도 필요 없다.
어차피 식량은 내 배낭에 충분히 들어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난도가 양피지로 된 지도를 가지고 왔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된 종이가 없는 모양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의 산업 자체를 확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지, 어쩌면 마법사와 몬스터의 존재 때문에 내 생각대로 안 될 수도 있다.
이 양피지도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할 수도 있다.
여긴 몬스터가 있으니까.
실은 이거, 오크 가죽으로 만든 거 아닐까?
아무튼, 지금은 그보다 신살기다.
신살기를 찾아야 산업을 뒤집어엎어 버리든, 돈을 벌든 할 수 있다.
지도에 그려진 세계는 넓었다.
헤이엑 백작령과 카탈루니아는 세계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거 대충 수도까지 얼마나 걸리지?”
“(마차를 타고 간다면 한 달입니다.)”
숲에서 여기까지 마차로 3일.
마차가 하루에 이동한 거리가 얼마였더라?
...포기하자.
들어도 계산이 안 된다.
확실한 건 헤이엑과 수도의 거리 열 배 정도가 지도의 크기라는 거다.
그것도 융 쪽은 그려지지도 않은 절반의 세계지도다.
지도의 한쪽은 큰 산맥으로 막혀 있다.
내가 전에 본 산꼭대기가 있는 산맥인 듯했다.
“그런데 이런 지도로는 의미가...”
“(상세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페르난도가 양피지 하나를 더 건넸다.
카탈루니아 지도였다.
역시 일을 잘 한다.
상단도 무리 없이 결국 원래 세를 회복하겠지.
새로 받은 지도엔 중간 중간에 굉장히 많은 메모가 적혀 있어서, 여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여기 글씨를 읽을 줄만 안다면.
“이거 뭐라고 적은 거야? 좀 읽어 줘 봐.”
“(아... 글은 통역이 안 되는 모양이군요. 도적 출몰 주의, 몬스터 현황...)”
나는 대충 근처의 메모들의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내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서 페르난도의 말을 작게 반복하며 영상으로 녹화되도록 했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서 새로 지도를 만들면 된다.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도 수연이가 알려줄 것이다.
수연이가 최고다!
“이건 이 정도면 됐고... 아, 맞아. 나 수배령... 최대한 내지 말아 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원래는 페르난도가 상단 운영을 책임지게 만들어서 수배에서 자유로워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애매해졌다.
페르난도가 상단 운영을 주도하긴 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까밀라가 하게 되는 거니까.
“(그건... 아가씨의 뜻에 따라야 해서...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수배령이 내린다면 조금 곤란해진다.
변장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농담입니다. 아가씨는 제가 최대한 막겠습니다. 이 부분은 저도 양보하지 않을 거니까요.)”
“좋아, 믿을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수도에 가서 도움이 필요하면 누나를 찾아가 보세요. 누나는 강한 키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누나? 어차피 곧 방학이라며? 수도에 없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또 모르니까요.)”
하기야 내가 수도에 한두 달 넘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까밀라 보다 예쁘다고 해서 만나는 게 절대로 아니다.
“이름이 뭔데?”
“(올리비아 루이즈라고 합니다. 일단 방학 때 제가 말을 하겠지만, 그 전에 만날 수도 있으니까...)”
페르난도가 책상에서 양피지를 꺼내더니 몇 글자 쓰고 인장을 찍었다.
“(이걸 보여 주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흠.
받아 보니 지도를 만든 양피지 보다 거칠었다.
품질은 확실히 안 좋다.
그러나 꽤 큰 상단이라고 해도 결국 하인 신분인 페르난도가 이 정도로 쉽게 종이를 쓰는 걸 보면...
이 세계에서 종이를 만들면 큰돈이야 벌겠지만, 사회에 변혁을 주는 정도로는 어려울 것 같다.
“좋네, 그럼 이제 간다. 잘 지내라고.”
“(리님도 잘 지내세요. 꼭 신살기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인사를 받고서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2층 높이에서 가볍게 착지한 후, 빠르게 뛰어 저택을 벗어났다.
한 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새벽 여명에 푸른빛을 띠는 저택이 보였다.
크루스 상단.
과연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다음엔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
헤이엑 백작령을 넘어서 카탈루니아 최고 상단이 되었다 같은 느낌으로다가.
나는 북쪽, 수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