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 * *
136.
[내가 까밀라를 죽이려고 하면, 내 뒤를 찔러. 칼은 저기 게레로 걸 쓰고.]
페르난도는 이 메시지를 들었을 때부터 혼란스러웠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나 싶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찔러. 안 죽을 거니까.]
그야 당연히 안 죽을 걸 알고 있었다.
이건 연극이니까.
그런데 왜?
그냥 싫다고 하면 될 텐데, 그냥 이 백작령을 떠나면 될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붙잡는다고 붙잡힐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런 귀찮은 연극을 하는 걸까?
정민은 이런 연극을 할 정도로 까밀라를 싫어하는 걸까?
까밀라가 어디가 어때서?
예쁘고, 재력도 있고, 성격은... 좀 별로지만, 얼마든지 정민의 뜻대로 개조할 수 있을 것이다.
까밀라는 정민에게 그만큼 빠져 있으니까.
아버지의 상단을 가볍게 내어줄 정도로.
대체 왜?
페르난도는 머릿속을 채우는 물음에 답을 내지 못했다.
정민을 찌를 때에도, 정민이 넌 잘 할 거라고 할 때도 여전히 영문을 몰랐다.
그러다 까밀라의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 모든 게 상관없어지기도 했다.
[고마워, 페르난도. 진짜 고마워. 이젠 너만 믿을게, 너만 있으면 돼.]
‘그래, 아가씨만 살아 있으면 됐지. 아가씨가 있으면 상단은 없어지지 않아.’
그리고 그의 사랑도.
이번에는 다른 어떤 때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그동안 까밀라가 페르난도에게 고마움을 말한 적은 꽤 많이 있었지만, 알몸으로 표현한 적은 처음이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심화되어, 키스하는 분위기까지 왔다.
그의 첫키스, 그가 아는 한에서는 까밀라의 첫키스였다.
그때, 페르난도의 두 눈에 까밀라의 감은 두 눈과 촉촉한 입술만 보이던 그때에, 그의 머릿속에 정민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너도 지부장들이랑 똑같아. 네가 하는 짓이 크루스님을 망치고 있다고.’
이대로 키스를 하면 어떻게 될까.
페르난도의 뇌가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크루스 상단은 아마 까밀라의 신뢰를 얻은 페르난도가 관리하게 될 것이다.
지부장들이 하던 때보다는 훨씬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아마 수익도 몇 배는 늘어나겠지.
시간이 지나면 까밀라와 결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페르난도가 평생 꿈꿔왔던 일이다.
까밀라는 지금과 변함이 없을 것이다.
네 명의 지부장을 의지했던 것처럼 페르난도를 의지할 것이다.
네 명이 한 명으로 줄었으니, 까밀라의 마음은 훨씬 더 페르난도에게 향할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이도 낳을지 모른다.
애가 애를 낳는 광경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나쁘지 않은 삶이다.
좋은 남편, 잘 나가는 상단, 귀여운 아이.
까밀라가 목욕탕처럼 갑자기 어딘가에 꽂힌다고 해도, 그걸 해결해 줄 남편과 해결해 줄 재력이 있다.
평생을 원하는 대로 살면서 행복할 것이다.
키스만 하면 된다.
이것은 까밀라를 위한 선택이다.
이것은 페르난도 자신을 위한 선택이다.
이것은 크루스 상단을 위한...
아니야!
페르난도가 까밀라의 어깨를 잡고 몸을 밀어냈다.
“아가씨, 바보예요?”
그는 인생 처음으로 까밀라를 비난했다.
의아해하는 까밀라의 두 눈동자가 그의 가슴에 박혀 아프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건 까밀라를 위한 키스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건 페르난도 자신을 위한 키스가 아니다.
“정신 좀 차려요, 아가씨. 제발요.”
“...왜?”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죠?”
“그건... 너야.”
까밀라의 볼이 빨갛게 물든다.
앞뒤 사정을 다 배제하고 그녀에게 빠져들 정도의 아름다움.
페르난도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차렸다.
“저를요? 갑자기 저요?”
“갑자기는 아니야, 너랑 안 사이가 얼만데... 네가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거 내가 제일 잘 알잖아? 그리고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도 다 알아.”
페르난도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노력을 알아준다는 건 너무나도 기쁜 일이니까.
그래도 억지로 참았다.
“후우...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이런 상황일수록 더 똑바로 봐야죠. 아가씨는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저를 이용하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이용? 어떻게 이용이 돼? 내가 너를? 어디에?”
“상단 운영에 이용하시겠죠.”
“그거야... 이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네가 나랑 사귀게 되면, 혹시 결혼까지 하게 되면... 넌 이 상단의 주인이 되는 건데?”
이게 왜 이상한 거냐는 눈빛에 저항하기 위해 페르난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 큰 두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해진다고 해도, 까밀라의 말을 들어줘선 안 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까밀라는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원하는 걸 얻어내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귀여운 외모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모든 걸 내어줬다.
외모가 막히면 미소로 원하는 걸 얻어냈다.
미소가 익숙해지면, 그녀는 눈물을 보여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페르난도는 보통 미소에서 그녀가 말하는 대부분의 것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여자의 외모는 중요한 무기 중 하나고, 무기를 잘 쓰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다른 무기를 배우지 못했다.
다른 무기를 배워야 할 시점에 전 상단주, 까밀라의 아버지가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을 배우고 열심히 일해야 할 시점에, 그녀의 외모와 상단이라는 배경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지부장들은 까밀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했고, 덕분에 그녀는 웃고만 있으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아니, 실은 그녀가 지부장들을 유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옆에 붙어 있으면 상단과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목욕탕을 만든 것도 그런 무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몸을 보여주면서, 잡힐 듯 말 듯 하면서 애태우면 지부장들을 그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까밀라는 다른 무기를 배우는 대신에, 하나의 무기를 갈고 닦았다.
미소만으로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성인 넷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지부장 넷이 마지막까지 그녀의 처음을 놓고 싸웠던 건, 그녀의 힘이었다.
그녀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었다.
심지어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쓰기 때문에 죄책감 따위는 하나도 없는 힘이다.
그리고 지금 그 무기를 페르난도에게 쓰고 있다.
페르난도의 인생을 휘어잡고, 제 멋대로 하기 위해서.
그녀에게는 좋을지 모르나, 페르난도에게는 최악이었다.
결국 그녀는 페르난도에게 마음을 주는 게 아니니까.
그저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옆에 있는 페르난도를 이용하는 것뿐이니까.
이용하는 데 댓가는 점점 늘어가겠지만, 설사 결혼하고 애를 낳는다고 해도 그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까밀라는 페르난도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까밀라의 옆에서 자라온 페르난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간 애써 부인하며, 혹은 이용당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옆에 있었지만, 그도 자신이 까밀라를 망치는 주범 중 하나라는 걸 잘 알았다.
정민의 말처럼.
“그럼 상단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요.”
“...뭐?”
페르난도는 자신이 이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정민은 결국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처음에 그렇게 말한 걸까?
그는 새삼 정민의 지혜에 감탄했다.
“저는 상단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저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면, 상단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요. 그리고 저랑 같이 가요. 상단에 비하면 부족하겠지만, 아가씨를 행복하게 할 자신은 있어요.”
“왜 그래야 해? 굳이? 난 너를 좋아하는데? 이제 내가 좋아할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너도 알잖아.”
“그런 생각이시라면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밖에 나가면 저 대신 아가씨의 상단을 운영해 줄 사람은 널려 있으니까요.”
“왜 이러는 거야. 너도... 너도 내가 예쁘지 않았다면 좋아하지 않을 거잖아!”
까밀라가 소리치고는 눈물을 흘렸다.
목에서 피가 흐르는, 알몸의 까밀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애처로웠다.
“시작은 그럴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에요. 저는 아가씨가 칼에 베여 얼굴에 큰 흉터가 생긴다고 해도 아가씨를 좋아할 거예요. 아가씨의 팔다리가 잘려 불구가 된다고 해도 아가씨를 좋아할 거예요. 아가씨가 문둥병에 걸려 온몸의 피부가 문드러진다고 해도, 아가씨를 좋아할 거예요.”
페르난도가 처음 전하는 진심.
그동안 숨기고 있던 마음을 전해서 그는 속이 다 후련했다.
“흑, 끅, ...그럼 날 왜 좋아하는 건데?”
“저희 부모님이 죽었을 때 생각나세요? 울고 있는 저에게 오셔서 아가씨가 같이 힘내자며 웃어 주신 적이 있어요. 전 상단주님이 돌아가셔서 아가씨도 슬프셨을 텐데, 아가씨는 웃고 계셨어요. 아가씨에게는 그런 힘이 있어요. 힘들 때도 웃을 수 있는 힘. 그 힘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데만 쓰지 말아요. 그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세요.”
“끅...”
페르난도는 떨어진 이불을 들고 와 가만히 앉아 있는 까밀라를 덮었다.
“...결국 내가 예뻤다는 거 아니야?”
고개를 든 그녀는 그녀 말처럼 예뻤다.
“웃으면 더 예쁠 거라는 말이죠.”
“...그게 뭐야.”
까밀라가 피식 웃었다.
페르난도가 옛날에 봤던 그 미소와 비슷했다.
“내일부터 바빠지실 거예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테지만, 저는 도와드리는 거밖에 할 수 없어요. 상단은 아가씨가 운영하셔야 해요.”
“...이제 알겠어. 난 네가 싫어.”
“알면 됐어요.”
페르난도는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또 짝사랑을 시작하겠지만, 까밀라가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