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 * *
135.
스르륵.
금발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가 천천히 침대 위로 떨어졌다.
머리카락에 숨겨졌던 까밀라의 얼굴이 드러났다.
목이 얕게 베여 피가 흘러나왔지만, 생명의 지장은 없어 보였다.
풍성한 장발이 단발로 변한 것 뿐.
“(...제가 살아 있는 건가요?)”
“네, 살아 있습니다.”
“(...리님!)”
까밀라의 두 눈에서 커다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묶인 건 아직 풀지 않을 예정이다.
풀면 나한테 달려들 게 뻔하거든.
저 가슴에 안기는 거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그 가슴 때문에 여기에 발목을 잡히고 싶진 않다.
“(아가씨!)”
페르난도는 아직 기어 오는 중이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다.
솔직히 까밀라가 죽는 줄 알았을 거다.
그의 각도에서는 까밀라의 머리가 흩날리는 게 목이 날아간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나는 그를 묶은 줄을 먼저 베었다.
그러자 그가 바로 튀어나가며 까밀라의 줄을 풀고, 그녀의 몸을 이불로 덮었다.
...역시 여자가 먼저다 이거지? 이 배은망덕한 것.
그래도 하나 고마운 건, 그가 옆에서 까밀라를 제어해주고 있다는 거다.
“(페르난도? 왜 잡아?)”
“(...지금은 참으세요. 얼굴이 엉망입니다.)”
“(아...)”
덕분에 나에게 달려오려는 마음 밖에 없던 까밀라가 그 자리에 멈췄다.
“(상단주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님.)”
“(저, 저도요! 정말, 리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두 사람은 내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칼을 쓸 수 있는 자리에서 정수리를 내보인다는 것.
내게 목숨을 맡기겠다는 소리와 같다.
그들의 진심이 저 인사에 담겨 있다.
진심이 담긴 감사의 인사를 받는 건 기쁜 일이다.
키퍼가 된 후 이런 일이 자주 있지만, 그래도 늘 새롭고 신선하다.
“인사는 됐습니다. 그보다 크루스님, 숙제는 어떻게 됐죠? 누구에게 넘기기로 했나요?”
“(...당연히 리님이죠! 리님이 이 상단을 맡아주세요!)”
까밀라가 칭찬해 달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눈물자국이 가득하고 머리가 매우 헝클어져 있지만, 본바탕이 예쁘니 그것조차 귀여워 보인다.
뭣보다 나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얼굴이니 그렇겠지만.
아, 이래서 잘생기면 피곤하다니가.
“좋네. 그럼 이제부터 내가 상단주인가?”
“(네? 아, 네. 맞아요.)”
나는 두 사람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메시지 마법으로 페르난도에게 말했다.
[내가 까밀라를 죽이려고 하면, 내 뒤를 찔러. 칼은 저기 게레로 걸 쓰고.]
페르난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밀라는 페르난도의 놀란 반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때까지처럼, 그녀는 온전히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상단주라면... 전 상단주는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겠지?”
“(...네! 리님 마음대로...)”
까밀라가 얼굴을 붉혔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게 뻔했다.
옆에 페르난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스르릉.
아타만티움 검이 검집에서 부드럽게 뽑아져 나온다.
둘 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페른난도가 까밀라의 앞을 가로 막는다.
“(지금 뭐 하시는...)”
“꺼져.”
나는 페르난도를 게레로가 쓰러진 방향으로 밀쳤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찔러. 안 죽을 거니까.]
메시지 마법을 보내고 검을 까밀라의 목에 댔다.
“(리님? 지금 왜...)”
“마음대로 해도 된다며? 내가 상단을 운영하는 데 네가 도움이 될까? 안 될까?”
“(아니 그게 왜... 저는 리님과...)”
“왜? 결혼이라도 하게?”
“(네! 맞아요! 결혼하려고... 앗!)”
나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까밀라의 목을 살짝 찔렀다.
아까 게레로가 낸 상처 옆에 작은 상처가 났고, 피가 흘렀다.
“내가 왜? 너처럼 일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과 왜? 예뻐서? 예쁜 애들은 산더미처럼 많아. 너 같은 바보랑은 숨도 같이 쉬고 싶지 않아.”
“(...네?)”
까밀라의 얼굴에 이제야 좀 굳는다.
칼을 들이대도 나를 믿는 듯한 눈치였는데, 지금은 표정이 완전 썩었다.
“(그럼 왜 조건을 거신 거죠? 제가 마음에 드셨던 게 아니었나요?)”
“그야 상단을 편하게 넘겨받고 싶으니까. 누가 너 같은 허영 덩어리를 마음에 들어 하겠냐?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봐. 아, 넌 머리가 없지.”
이건 진심이었다.
진심이 담긴 욕설이라 그럴까, 한 마디 한 마디에 까밀라의 표정이 더욱 더 썩어갔다.
“(그, 그럼 왜 구해주신...)”
“내가 가지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새치기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거, 지금 널 죽이는 게 훨씬 편하지 않겠어? 어차피 나중에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죽이고 모든 책임을 지부장들에게 넘겨 버리면 되는 거지.”
“(그런...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리님이 그럴 리가...!)”
까밀라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이 칼이 들어가 있는데 움직이다니, 잘못하면 진짜로 벨 뻔했다.
이 애, 진짜로 바보다.
“...잘 가라.”
난 검을 아주 높이 들었다.
이건 페르난도에게 주는 신호였다.
페르난도는 내 신호를 눈치 채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안 돼!)”
푸욱.
나는 페르난도의 검을 피했다.
검은 로브만 뚫었다.
그래도 옆구리를 쥐며 뒤로 물러났다.
[계속해! 계속!]
“(...죽어! 너나 꺼져라! 이 사기꾼!)”
“크흑, 이런 기습을... 아악!”
원래는 피도 터지고, 쓰러지기도 하는 연출이 필요했지만, 이 극의 주인공인 까밀라의 눈에는 초점이 없기에 적당히 소리로만 연기했다.
나는 비틀 거리며 문 앞까지 이동했다.
“크흑... 쳇, 다음에는 안 봐 준다.”
악당의 대사,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침실을 나오니 페르난도가 따라 나왔다.
“(거기 서! 리! 거기 서라고!)”
[섰어.]
“(아니...)”
문 옆에 서서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페르난도가 말을 멈췄다.
[뒷정리 잘 하고, 크루스님 잘 위로하고... 넌 잘 할 거야.]
“...”
왜 이런 일을 하냐는 듯이 페르난도가 눈으로 물었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네 방에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
페르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손짓에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조심스레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투명화 마법을 쓰고서.
“(아가씨,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요.)”
“(페르난도...? 리님은?)”
까밀라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페르난도를 보면서, 페르난도를 보고 있지 않았다.
“(도망갔습니다. 제가 쫓아냈어요.)”
“(...그럼 아까 그게 사실이야?)”
“(네. 리는 아가씨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랬구나... 네가 날 구한 거구나.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래도 대단해. 리님, 아니 리는 강한데. 어떻게 그렇게 덤빌 생각을 했어?)”
신기하게도 까밀라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목소리도 높아졌다.
방금까지는 동태 눈깔이었는데, 어느새 내게 반했던 것처럼 변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까밀라라면, 금방 다른 남자를 찾을 것이다.
그게 그녀가 남자로 생각하지 않던 하인 중 하나라고 해도, 이런 경험을 겪고 나면 바로 마음을 줄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오크에게서 구해준 거 한 번에 내게 푹 빠졌겠지.
“(그건... 흠흠, 저는 상단주님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아가씨가 계셔야 이 상단이 유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까밀라가 작정하고 쳐다보면 안 넘어갈 남자는 별로 없다.
이미 옛적에 넘어갔던 페르난도의 얼굴이 빨개진 건 당연한 일이다.
와락.
“(고마워, 페르난도. 진짜 고마워. 이젠 너만 믿을게, 너만 있으면 돼.)”
“(아가씨...)”
까밀라가 페르난도에게 안겼다.
안기면서 이불이 떨어졌기에, 알몸으로 안긴 셈이다.
페르난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해피엔딩... 일까?
페르난도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그의 입으로 들은 적은 없지만, 이미 옛날부터 그는 까밀라를 좋아했던 것 같다.
짝사랑이 이루어졌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까밀라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의지하던 모든 남자들이 한 번에 사라졌는데, 아직도 그녀의 옆에는 꽤나 든든한 사람이 남은 셈이니까.
페르난도 정도면 적어도 상단이 망하진 않을 것 같고, 강한 키퍼 누나도 있다.
게다가 페르난도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잘 생겼고, 몸도 탄탄하다.
솔직히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나보다 훨씬 좋은 상대다.
어쩌면 까밀라는 옛적부터 페르난도를 결혼상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무튼, 서로 원하는 걸 얻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봐야되지 않을까?
이제 헐리우드식 키스만 한다면 완벽한 마무리다.
마침 그런 분위기가 됐다.
까밀라가 고개를 살짝 올리고 눈을 감는다.
페르난도는 그 얼굴에 다가간다.
서로의 입술이 바로 앞이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이 좋은 기회를 발로 뻥 차 버렸다.
“(아가씨, 바보예요?)”
“(...?)”
까밀라의 두 눈이 의문으로 가득찼다.
“(정신 좀 차려요, 아가씨. 제발요.)”
와.
이건 예상 못했다.
이렇게 진엔딩 루트로 간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