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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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탁.
게이트를 빠져나와 바닥에 착지했다.
게이트를 지날 때나 공간 이동을 할 때 항상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대로 다른 공간에 빠지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이동하기 전에 나는 죽는 걸까?
새로운 곳에서는 새롭게 태어난다든가?
기억 상으로는 이어지지만, 아주 짧은 순간, 찰나의 순간에 영원의 단절이 있어서,
...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자.
어쨌든 이번에도 땅이 나를 받아주었으니까.
정확하게는 땅이 아니라 크루스 저택 2층의 바닥이다.
“****!”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페르난도다.
그는 격양된 얼굴로 빠르게 무언가를 말했다.
통역이 안 돼서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통역 마법을 걸었다.
“**(리 도망치세요)!”
“뭐라고?”
“(빨리 저택을 나가시라고요! 지부장들이 리님을 노리고 있어요!)”
“왜?”
“(아가씨께서 리님과 결혼 하겠다고 하신 것 때문이에요.)”
“...뭐?”
페르난도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루스 상단을 나에게 넘기자고 의견을 낸 것.
까밀라가 나와 결혼을 결심한 것.
듣는데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말한 의도가 그게 아닌 걸 페르난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페르난도 스스로 날 추천한다고?
대충 봐도 그가 까밀라에게 어떤 마음인지 보이는데, 이게 맞아?
“너 생각보다 더 자존심이 없구나? 거기에서 날 추천해?”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내가 하는 거 봤으면 의미 없는 거 알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건, 네 일에나 적용해보라고.”
페르난도가 이야기를 더 풀었다.
지부장 게레로가 알게 된 것.
게레로가 각 지부장들을 모은 것.
그들이 나를 찾아올 거라는 것.
“습격의 증거는 없는 거 아니야? 그냥 다음 상행을 위한 회의일 수도 있잖아.”
“(게레로 지부장이 저녁에 백작의 마법사 중 한 명을 불렀다고 합니다. 상행에 마법사를 데리고 갈 이유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백작의 마법사라면요.)”
그 마법사는 나를 위한 대비다 이거로군.
나는 검사이자 마법사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왜 지금 안 와? 게이트에서 나올 때 덮치는 게 국룰 아니야?”
지구에서는 그게 제일 간단한 방법이다.
어디에서 게이트로 진입했는지 알면, 대상을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다.
게이트에 나오자마자 눈먼 칼에 맞아 죽을 테니까.
그래서 지구에서는 협회가 존재하고, 크루가 존재한다.
게이트 출입 시에 키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곳 사정은 잘 모르지만,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은 건 며칠 안 지내보고 깨달았다.
여기도 비슷할 거다.
막 생각난 거지만, 나도 생각이 짧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게이트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페르난도가 보고 있던 시점에 게이트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제가 하루 늦췄습니다. 게레로는 내일 귀환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대피하세요.)”
페르난도를 믿었고, 페르난도는 그 믿음에 보답해 줬지만 앞으로도 이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게이트에서 나올 때 죽는 거니 새로 태어나는 거니 하는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주변에 적이 있는지 없는 지나 확인해야겠다.
“잠깐, 그럼 너는? 거짓을 말한 걸 알면 지부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잖아?”
“(저는 걱정 마십시오. 저희 누나가 강한 키퍼라서 굳이 저를 건들진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저는 의심하지 않았으니까요.)”
“누나? 크루스님은 네 누나에 관해 한 마디도 안 하셨는데?”
페르난도의 누나라면 십중팔구 상단 소속일 텐데, 난 누나에 관한 이야기를 까밀라에게 들어본 적이 없다.
키퍼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어떤 이야기라도 꺼낼 법 한데.
“(그... 아가씨는 보통 자기보다 예쁜 사람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아주 합리적인 이유다.
“그래? 그런데 난 파티에서 크루스님보다 예쁜 사람은 못 봤는데?”
“(누나는 지금 수도의 키퍼 아카데미에서 공부 중입니다. 지금은 학기 중이라 수도에 있지만, 곧 방학이라 저택으로 돌아올 겁니다. 누나가 무서워서라도 지부장들은 저를 가만히 둘 겁니다. 저는 날짜를 착각했다고 하기만 하면 돼요.)”
날짜를 착각한 것 정도로 강한 키퍼의 동생을 처리할 리 없다.
그것도 나를 놓친 것에 분노해서 말이다.
지부장에게 중요한 건,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부재니까.
결국 나만 없으면 크루스 상단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페르난도의 말은 크게 틀린 게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도 나처럼 생각이 짧다.
“...너 바보야? 혹시 보복이 무섭더라도 널 죽이고 사정을 아는 사람을 입막음 한 후, 널 죽인 걸 다른 사람에게 누명 씌우면 되잖아. 이를 테면 나 같은 사람에게.”
“(네? 아...)”
페르난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런 생각은 처음 들었다는 얼굴이다.
“중요한 건 게레로나 지부장들이 어느 정도까지 각오하고 있느냐야. 그리고 그들이 날 죽이려고 들었다면, 생각보다 큰 결심을 했을 거야. 아무리 얼굴마담이라지만, 상단주가 좋아하는 사람을 상단주의 저택에서 죽이는 일이야. 백작의 마법사까지 부른 거라면, 그들은 모든 걸 뒤엎을 생각이겠지.”
“(...모든 걸 뒤엎는다뇨?)”
페르난도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 전에, 대답과도 같은 비명이 이 방까지 날아왔다.
꺄악!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여기...)”
나는 페르난도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방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하인들이 도망 다니고,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하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피가 난자했다.
나는 검을 뽑아, 하인을 죽이려던 사람에게 던졌다.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하녀를 죽이려던 다른 사람을 몸으로 밀쳐냈다.
퍽, 푸욱.
몸으로 밀친 사람은 벽에 부딪힌 후 땅에 쓰러졌고, 날아간 검은 사람의 목을 꿰뚫었다.
저건 100퍼센트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몬스터나 천사를 죽인 적은 있지만,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구해방작전 사이에서 도망갈 때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최책감에 빠질 이유는 없다.
각오했으니까.
그래도 죽은 사람의 표정이 검은 복면 때문에 가려졌다는 건 다행이다.
“(일단 밖으로, 아니 저희를 따라오세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페르난도도 사람의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미묘하게 떨고 있었다.
그래도 침착하게 하인들을 통솔했다.
“****!”
복면인들이 양쪽 복도에서 더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칼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저 정도면 1층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페르난도, 뭐라는 거야?”
“(절 죽이겠다고...)”
복면인들이 양쪽에서 우리를 덮쳤다.
수는 모두 10명.
나는 성욕을 일으키며 왼손을 들었다.
화르륵.
성욕이 증폭됐고, 내 의지를 따라 마나가 모여 파이어볼 생성됐다.
성욕을 사용하면 마법의 발동이 배는 빨라진다.
불의 구를 왼쪽 복도로 던지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검을 던진 쪽이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목에 박힌 검을 뽑았다.
푸쉬식!
피가 솟아올라 내 수트와 로브를 더럽혔다.
피는 익숙했지만, 새삼 피가 눈에 들어온다.
“****!”
복면인들이 내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게 다행이다.
나는 각오하고 그들의 급소를 베었다.
강자는 없었다.
검로는 정교했고, 노리는 곳은 예리했지만, 힘과 속도가 너무 별로였다.
그들은 성욕으로 강화까지 한 내 몸놀림을 따라갈 수 없었다.
쿵, 쿵, 쿵, 쿵.
복면인 넷이 목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감상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파이어 볼의 폭발에서 살아남은 네 사람이 페르난도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쪽으로 뛰었고, 페르난도와 하인들은 내 뒤로 움직였다.
복면인들은 삼방향에서 내게 덤벼들었다.
캉!
먼저 달려들어 오른쪽 공격을 검과 함께 날려 버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정면 공격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정면 공격이 베기로 바뀌었지만, 아타만티움 팔을 갖다 대 막았다.
왼쪽에서 오는 찌르기는 다시 검을 휘둘러 쳐냈다.
캉!
무기를 잃어버리고, 자세가 흐트러진 그들의 목을 가볍게 베었다.
그 틈을 노려 남은 한 사람이 검을 찔러왔지만, 몸을 젖혀 피하고 역으로 목을 찔렀다.
쿵, 쿵, 쿵, 쿵.
또다시 네 사람이 2층 복도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숨이 가쁘다.
힘든 건 아닌데, 아니 힘들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지구해방작전이랑 싸울 때보다 쉬운 환경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보다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여긴 진짜 나 혼자니까.
내 뒤를 바쳐 줄 케이라나 엘레나가 없다.
그래도 이 정도 시작이면 괜찮은 거겠지?
“페르난도, 하인들을 데리고... 페르난도?”
“(아가씨!)”
페르난도는 어느새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은 하인 둘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런 상황이면 까밀라를 챙기는 건 맞는데, 하인 둘은 어쩌라고...?
그리고 3층에 몇 명이나 있을 줄 알고 혼자 가? 이 바보 같은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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