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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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페르난도를 불러 와.”
까밀라는 정민이 게이트로 들어간 다음 날, 페르난도를 상단주 집무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상단주님.”
“너, 어제 이야기 다 들은 거지?”
“네.”
까밀라와 페르난도는 남매처럼 자랐다.
상단주의 딸과 총괄 집사의 아들이라 진짜 남매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였다.
어젯밤의 이야기는 비밀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페르난도가 들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야기 좀 해 봐.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일단 확인 하나 하고 넘어갈게요. 리님을 정말로 좋아하세요?”
“응, 좋아해. 너무 멋지신 분이야.”
대답은 화살보다 빨랐다.
까밀라의 눈은 벌써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민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손자, 손녀의 이름까지 상상했다.
반면 페르난도의 표정은 굳었다.
뻔한 이야기였다.
남매처럼 자란 아이들.
인형같이 예쁜 누나.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
둘의 나이가 같았다면 서로 좋아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까밀라는 페르난도보다 3살 많았다.
까밀라가 사춘기였을 때, 페르난도는 꼬맹이여서 까밀라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난도가 사춘기였을 때, 까밀라는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안 좋아하는 게 이상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둘은 신분의 차이도 있었다.
남작과 평민이라는 차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돈으로 산 남작 위, 대를 이을 남자가 없는 집안, 능력 있는 평민이 남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둘은 주인과 하인이라는 심리적 장벽이 있었다.
둘의 부모가 한날한시에 죽고 난 후에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표면적으로는 끝났지만, 그 잔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까밀라는 페르난도를 믿을 수 있는 하인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난도는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리님에게 상단을 넘기시죠.”
“뭐라고? 진짜 상단을 넘기라고?”
까밀라가 황당하다는 투로 반문했다.
그녀는 페르난도가 진짜 상단을 넘기라고 할 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인데, 남 일이라고 넘기라고 하다니.
괘씸했다.
“네, 리님에게 상단을 넘기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리님? 리님이 누구... 아... 맞아! 그 수가 있었네?”
그녀는 그제야 페르난도의 뜻을 알아들었다.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하고 지나갈 정도로 좋은 답이었다.
역시 자신이 아끼는 하인이다.
이런 묘수를 생각해 낼 줄이야.
“네. 척 봐도 상단을 맡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어 보이시고, 아가씨께서 진짜로 결합을 원하시는 거라면 리님께 곧 아가씨 것이게 되는 것이니까요. 넘기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죠.”
“맞아. 내 게 리님 거고, 리님 게 내 거가 될 사이지. 리님께서 이런 걸 원하신 건가? 너한테 언질이라도 주고 가신 거야?”
“그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봤을 때, 이게 아가씨와 리님 두 분 모두에게 좋은 일 같아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맞아. 좋은 일이지. 내 생각엔 이게 리님이 생각하는 정답이 분명해. 내게 상단을 받고 싶다. 그리고 상단을 가장 쉽게 받는 방법은...”
“두 분이 결혼하는 겁니다.”
“그래! 그거야!”
까밀라가 활짝 웃었다.
“이건 리님이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신 거나 다름없어. 그 날은 그렇게 모질게 구시더니, 실은 날 좋아한다고 하신 거야. 역시 내가 반한 사람이야. 유머도 넘치셔!”
“...네. 유머러스하신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이번에도 까밀라와 페르난도의 표정은 반대였다.
까밀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행복감에 젖었지만, 페르난도는 그게 아닌 걸 알기 때문에 얼굴이 굳었다.
그 나름대로는 묘수를 짜냈지만, 그는 이게 통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진실은 까봐야 알겠지만, 어제 목욕탕에서의 태도로만 보면 정민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
‘이런 거에 발목이 잡힐 사람이 아니겠지. 상단을 넘기라는 건 다 버리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이야기였을 거야.’
정확하게 하자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그나마 페르난도의 생각이 진실에 가까웠다.
정민과 함께 하려면 차원을 버리고 지구로 와야 하는 게 첫째 조건이었으니까.
“좋아, 그러면 결혼 준비를 하자. 일단 백작님! 무엇보다 먼저 백작님을 모셔야 해! 백작님 스케줄을 좀 알아 봐. 리님과 나의 결혼식이라면 오실 거야.”
“알겠습니다.”
그 전에 리님께서 승낙하셔야 하지 않을까.
페르난도는 들뜬 까밀라에게 속마음을 전부 이야기하진 않았다.
리님이 승낙한다면 필요 없는 말이고, 승낙하지 않는다고 해도 필요 없는 말이다.
승낙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기쁨에 차 있는 게 나을 테니까.
그게 3일 뿐인 거짓된 행복이라 할지라도.
‘너도 지부장들이랑 똑같아. 네가 하는 짓이 크루스님을 망치고 있다고.’
정민이 가기 전에 해준 이야기가 페르난도의 심장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지만, 그는 이제껏 해온 대로 행동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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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오전, 게레로가 까밀라를 찾았다.
“페르난도가 헤이엑 백작님 일정을 알아보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게레로는 백작의 하인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크루스 상단과 친한 하인으로 백작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페르난도는 조심스레 하인에게 백작의 일정을 물었으며, 비밀 유지도 부탁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하인 입장에서는 같은 하인 출신이 페르난도보다, 상단 지부장인 게레로가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비밀 유지까지 나오는 문의는 자연스럽게 게레로에게까지 흘러갔다.
“아, 마침 잘 왔어요. 저는 리님과 결혼할 거예요. 어때요, 좋은 생각이죠?”
“...”
게레로는 순간 표정 관리를 못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새로운 파티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그가 까밀라를 얻기 위해 노력한 게 얼만데, 그걸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놈이 채간다고?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일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는 겨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어쩌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까밀라는 게레로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을 결정한 후부터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으로 살고 있었고, 그 눈은 항상 먼 곳을 향했다.
“역시, 다비드도 좋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 결혼 준비를 좀 해주세요. 최대한 성대하게요. 곧 상단주가 되실 분인데, 크루스 상단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순 없잖아요?”
“...!”
게레로는 표정 관리를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결혼도 모자라서 상단까지 넘긴다고?
그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결과였다.
그와 함께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다른 지부장이 아니라,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놈이 상단을 받는다고?
기가 차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아, 알겠습니다. 어서... 준비를...”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환영하시는군요. 다비드 아저씨 그런 모습 처음이에요. 감사해요. 결혼식 준비는 다비드 아저씨만 믿을게요.”
게레로는 남자에 빠져 사리분별을 잊은 까밀라에게 분노했다.
이건 자신을 우롱하고, 상단을 우롱하는 일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빨리 준비해주세요. 빨리요!”
게레로는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을 나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변해 있었다.
“...그 놈, 반드시 쳐 죽인다.”
빠드득.
게레로의 이가 서로 부딪히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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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결혼식 일정을 알아보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게레로가 ‘결혼식’을 꺼냈을 때, 페르난도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이유는 페르난도 자신도 정확히 잘 몰랐다.
어차피 게레로를 비롯한 네 명의 지부장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고 결혼식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언제고 들킬 일이었다.
그런데도 페르난도는 이것보다는 오래 숨기고 싶었다.
적어도 정민이 돌아오고 나서 알려지는 게 베스트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내게도 결혼식 준비를 부탁하셨지. 지금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나?”
“진행된 건 없습니다. 혹시 몰라 일정을 알아보는 것뿐입니다.”
“그래? 아가씨께서는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 할 기세시던데.”
“리님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리님이 게이트에서 돌아오시고, 결혼이 확정되면 진행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페르난도는 사실 대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늘 있는 일이 또 발생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실제로 까밀라가 떼를 쓰고 페르난도를 포함한 상단 전체가 그에 맞추기 위해 기상천외한 일을 벌인 적이 종종 있었다.
상단 규모에 맞지 않는 호화목욕탕도 그 중 하나였다.
“리님이 모르는 리님의 결혼이라... 아가씨께서 또 가지고 싶으신 게 생기신 모양이네. 결혼까지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데. 혹시 리님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니지, 이건 내가 직접 물어야겠어. 아가씨께서 원하는데, 안 되도 되게 해야지. 내가 직접 설득을 한다면 리님도 생각을 돌리실 거야.”
“그렇겠지요. 게레로님이 나서신다면 리님과 상단주님의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럼 리님은 게이트에서 언제 돌아오시지?”
“그게...”
페르난도는 오늘 밤에 돌아오실 거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4일 예정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더 걸릴 수도 있어서 정확하게 언제 온다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 게이트가 원래 그런 곳이지. 리님이 돌아오시면 내게 꼭 전해 주게나, 페르난도. 내가 아가씨를 위해 힘내볼 테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페르난도는 저택을 나서는 게레로를 배웅하며 내리쬐는 햇살의 각도를 살폈다.
태양은 정중앙에 떠 있었다.
정민이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10시간 정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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