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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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진짜, 너무하세요.)”
까밀라가 울상을 지었다.
표정이 휙휙 바뀌고, 눈물이 저렇게 빨리 준비된다니.
저건 천성일까, 아님 연기일까.
뭐든 들어줄 생각은 없다.
여자의 눈물이 무기가 되는 경우는 ‘내 여자’가 없을 때나 해당되는 거지, 나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
“너무하다고 생각되면 그만 두면 돼요. 그 정도 각오가 없이 저랑 사귀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럼 상단을 내치면 진짜로 받아주시는 건 맞아요?)”
여기서는 흐름상 고개를 끄덕여야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고려해보겠다는 거죠. 물론 가능성은 많이 올라갈 겁니다.”
“(마지막까지... 진짜, 너무하세요.)”
다시 우는 까밀라.
이번엔 진짜로 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좀 안쓰럽긴 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다다.
괜히 약속을 걸었다가 진짜 상단을 넘기기라도 하면?
난 꼼짝없이 그녀를 책임져야 했다.
지금 하룻밤 같이 자는 게 싫어서 이 짓을 하고 있는건데, 책임지는 건 말도 안 된다.
가능성은 원천 차단해야 한다.
너무 내 멋대로라고?
원래 사랑이 그런 거지.
까밀라는 나한테 허락 맡고 날 좋아한 건가?
그러니 나도 까밀라를 내치는 데 허락 따윈 필요 없다.
“(제 마음을 가져가시고... 또 이렇게...)”
“이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3일 뒤에 다시 올 테니까, 숙제는 그때 확인할게요.”
“(아, 리님, 리님!)”
나는 까밀라를 두고 목욕탕을 나왔다.
목욕탕 앞에는 페르난도가 대기하고 있었다.
“다 들었어?”
“(어느 정도는 들었습니다. 다른 하인들은 아예 건물 밖이라 못 들었을 겁니다.)”
페르난도가 대기하고 있던 곳은 목욕탕 들어가기 전 샤워하는 곳이다.
그가 여기에서 대기할 수 있다는 건, 그가 단순한 하인이나 집사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잘은 모르지만 상단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괜히 페르난도랑 상의하라고 한 게 아니다.
“다행이네. 네가 잘 도와드려. 상단 사람 중 누가 뛰어난 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건 잘 알지만...)”
“그럼 됐어. 가자.”
난 그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공주 침대에 누워 한 번쯤 숙면을 취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이세계에 온 지 3일이 지났으니까, 이제 지구로 갔다가 다시 와야 한다.
“난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나올 거야. 3일 정도 걸릴 테니까, 그때가지 크루스님을 잘 도와줘.”
“(저... 주제넘은 건 알지만, 혹시 그냥 상단주님 마음을 받아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페르난도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안 돼. 그리고 상단을 넘겨도 안 될 수 있다는 거 명심해. 그보다 상단이나 제대로 된 사람에게 넘겨 봐. 너도 그걸 원하지 않나?”
“(...)”
답은 없었지만, 이건 무언의 동의였다.
솔직히 옆에서 본 사람이라면 네 명의 지부장이 노답이란 걸 누구나 인정할 거다.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현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까밀라도 마찬가지고.
“(상단주님, 아니 아가씨가 저렇게 진심을 내보이신 건 선대 상단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처음입니다. 제게는 상단이 잘 되는 것보다 아가씨가 행복한 게 더 낫습니다.)”
“상단이 잘 되는 길이 결국 크루스님이 잘 되는 길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결국 리님께서 아가씨를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일입니다. 부탁드립니다.)”
페르난도는 무릎 꿇은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너의 부탁을 받아서 크루스님과 함께 하게 되면, 그건 크루스님이 행복하게 되는 건가?”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이런 것 뿐이라...)”
진심은 느껴지지만, 동시에 조금 한심했다.
페르난도는 잘 생겼다.
소년의 얼굴이지만 몸도 좋았다.
말하는 것 보면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렇게 찌질하다니.
직책? 신분? 그런 게 문제인가?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쟤도 지부장들이랑 별다른 게 없다는 거다.
“너도 지부장들이랑 똑같아. 네가 하는 짓이 크루스님을 망치고 있다고.”
“(네? 아닙니다! 저는...)”
고개를 든 페르난도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인 것을 어쩌리.
“잘 생각해 봐.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난 간다.”
“(리님? 잠깐만요! 리님!)”
나는 나를 향해 외치는 그를 두고서, 게이트를 열어 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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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가 다시 준비되기 까지 3일.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가지를 해야 했다.
일단 케이라와 엘레나에게 마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이세계체류계약이 다차원에너지 제어로 진화했어도, 두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 내 마력을 받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내 마력과 마나가 많이 상승했음에도 동일했다.
아무리 많은 섹스를 통해 많이 마력을 주입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주입해야하는 게 이 계약이다.
그러면 블란카는 어떻게 버티냐고?
블란카는 현재 봉인상태다.
내외부를 완전히 차단하고 스스로 잠에 들었기에 나의 추가 마력이 없어도 버틸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마력이 줄어들겠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버티기에는 충분한 모양이다.
대신 내가 죽고 나면 내 마력 자체가 흩어지기에 유지할 수 없다고.
이게 내가 쿨타임이 돌 때마다 꼭 돌아와야 하는 이유다.
최악의 경우를 위한 대비책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니까.
아무튼, 오랜만은 아니고 3일 만에 케이라와 엘레나를 다시 안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각각 섹스를 했다.
내 입장에서는 조금 아쉽지만, 3일 만에 하는 데 같이 하자고 밀어붙이기도 뭐했다.
수장님과 나연누나가 미국에 있었다면 케이라와 엘레나도 양보했겠지만, 두 사람은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크루 활동 중이다.
이래서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해버려야 한다.
기회가 한 번 지나가니까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도 곧 할 수 있겠지?
다음은 보고서.
나는 명목상 이세계 연구를 위해 이 미국 키퍼 협회에 머무르고 있다.
실제로 하는 일도 그게 맞다.
나는 이세계로 넘어갔다 왔으며, 케이라는 여전히 제라스, 베네시아와 함께 체류마법진 개량에 힘쓰고 있으니까.
미국 키퍼 협회가 블란카를 포함한 우리 일행의 체류를 도와주는 것도 명목상은 우리가 이세계 연구를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조금 다른데, 이미 ‘나태’에 대해서 다들 알고 있었다.
미국 키퍼 협회도, 한국 키퍼 협회도.
아직까지는 두 협회만 알지만, 곧 전세계 협회에 알릴 예정이다.
‘나태’를 물리치는 일은 내 개인적인 목표지만, 동시에 전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당연히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일이다.
솔직히 알리기 전에는 걱정을 좀 했다.
‘나태’라는 보이지도 않는 악마가 있어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한다니.
누가 믿을까 싶었다.
지구해방작전 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드래곤의 힘을 사용했을 뿐이니까.
다행히 로저스가 중재자가 되어 내 말에 힘을 실어 주었고, 그 덕에 미국 키퍼 협회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다.
지금 받는 지원은 체류를 위한 숙식 제공 정도지만, 필요한 때는 로저스를 필두로 한 미국 최정예 키퍼들을 동원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거기에 더해서 특수한 기술을 가진 키퍼들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이세계에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응하거나, 이세계 연구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제라스가 특히나 의욕적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도 신살기에 관해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신살기를 만들어 보겠다고도 했다.
혼자 힘으로 차원을 넘어온 사람이니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특수한 기술을 가진 키퍼들은 제라스의 연구에 참여, 그에게 영감을 주는 역할도 겸했다.
그래서 내가 보고서를 써야만 했다.
이세계의 기록 하나하나가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짧게는 신살기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길게는 케이라와 제라스의 연구에 도움이 될 거다.
다행히 이 중요한 보고서를 내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진 않는다.
“이제 열게요.”
수연이가 내 왼팔, 아타만티움 팔의 피부를 열었다.
원래는 팔에 피부가 없었다.
내 왼 팔은 영웅의 상징(?) 같은 거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팔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 쯤인 이세계로 넘어가는데 기계 팔은 굉장히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연이가 팔에 피부를 만들어줬다.
요청한 지 3일 만에 뚝딱뚝딱 만들어서 줬는데, 원래 팔만큼이나 진짜 같았다. 딱딱한 거 빼고는 분간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체온이랑도 비슷했다.
수연이가 못하는 건 대체 뭘까?
진짜 우리 수연이 대단하다.
위잉.
수연이가 팔의 피부를 열고 안에서 메모리칩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메모리칩을 팔에 꽂았다.
“잘 녹화 됐나 볼게요.”
수연이가 칩을 기기에 꽂고 영상을 재생했다.
약간 시야가 좁지만, 내가 보았던 숲, 도시, 사람들이 그대로 나왔다.
“잘 되네요. 이세계로 넘어가면서 이상이 생기거나 지워지거나 할 것 같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봐요.”
수연이가 배시시 웃는다.
지금 저 웃음도 내 눈에 낀 렌즈를 통해 팔에다 저장되고 있다.
저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웃음이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영상에서 흘러나왔다.
당연하게도 녹음 기능 역시 지원된다.
카탈루니아 어다.
“이건 제가 언어 분석을 해볼게요. 영상 대상으로는 통역 마법이 안 통하는 거죠?”
통역 마법은 다른 사람의 의지를 해석하는 거기 때문에, 녹음된 소리만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에 엘레나가 굉장히 심심해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케이라 보다 훨씬 늦게 한글을 배웠으니까.
“응. 고마워, 수연아. 덕분에 보고서 쓰기가 쉽네.”
“뭘요. 그런데 그 보고서 오빠도 꼭 써야 하는 거예요? 어차피 저도 영상 분석할 텐데. 언어야 오빠가 두어번만 갔다 오면 다 정리 될 거고요.”
그게 저렇게 쉬운 일인가?
세 번 만에 언어가 정리 된다고?
내가 보고서를 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이 나왔을 때는 수연이가 없었다.
녹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서, 녹화만으로도 정말로 수연이를 칭찬했다.
그런데 언어 분석이 뭐 3번 만에 돼?
“대단하다. 진짜로 대단해, 수연아.”
“아니에요. 진짜 대단한 건 이세계를 왔다 갔다할 수 있는 오빠죠. 저는 별 거 아니에요.”
“아니, 대단한 건 대단한 거야. 넌 키퍼도 아니잖아. 진짜 천재야.”
수연이가 얼굴을 붉힌다.
그녀는 칭찬을 좋아한다.
“그럼 잘했다는 의미로 상 주면 안 돼요?”
“상? 무슨 상? 내가 줄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줄게.”
“진짜죠? 준다고 했어요?”
수연이가 밝게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얼굴이 코앞이다.
꿀꺽.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건 설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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