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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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실제로 저녁 파티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나는 처음에 잠깐만 소개 되고, 그 후에는 계속 지부장들이 돌아가면서 까밀라를 칭찬하는 그림.
그 탓에 통역하는 페르난도의 입만 아팠다.
그 외에 저녁 파티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나마 하나 뽑으라면 백작성에서 나온 남작 관료와 인사한 정도다.
그는 평민이라고 밝힌 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마 키퍼라는 특수성 때문인 것 같다.
파티는 화려했고, 화려하게 꾸민 까밀라는 훨씬 아름다웠고, 음식은 맛있었다.
덕분에 눈과 입이 즐거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페르난도만 고생했지.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고생해야 할 것 같다.
내 일은 이제야 시작이니까.
난 숙소로 돌아와 페르난도를 데려다가 물었다.
“페르난도, 혹시 신살기에 대해서 아니?”
“(신살기요? 죄송합니다. 처음 들어 봅니다.)”
“그럼 알만 한 사람은? 아니면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뭔지 알아? 신이 아니라도 드래곤을 죽였다든가.”
“(상단 내 사람이라면, 역시 상단주님이시죠. 상단주님은 신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아는 것도 많으시고.)”
이건 다른 지부장들처럼 무작정 아부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실제로 그녀가 ‘융’이라는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페르난도도 다른 지부장처럼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이미 까밀라에게는 마차에서 몇 번이고 이 이야기를 물어봤다.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쓸데 없는 정보였고.
물론 내가 그걸 정정해줄 필요는 없다.
나는 까밀라 말고 알려줄 만한 다른 사람이 없나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 그럼 크루스님께는 내일 물어...”
“(아니요. 오늘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지금 상단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왜?”
“(그건 리님께서 더 잘 아실 거라고... 목욕탕에서 기다리시겠다고 하셨어요.)”
응?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목욕탕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있나?
“페르난도, 목욕탕 회동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할 게 있을까?”
“(목욕탕 회동은 카탈루니아의 전통적인 문화입니다. 예로부터 카탈루니아에서는 중요한 일이나 가벼운 일이나 목욕탕에서 치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은 파티도 목욕탕에서 열립니다. 낮 목욕탕 회동이 길어지지 않았다면 파티는 아마 목욕탕에서 열렸을 겁니다.)”
목욕탕 파티?
다들 반나체로 하는 파티라.
그건 좀 신선할 것 같다.
나중에라도 꼭 경험해보고 싶은 소망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건 남자의 본능이겠지.
“(상단주님께서 목욕탕에서 기다리고 계시겠다는 건... 제 생각엔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손님 접대라면 낮의 회동과 저녁의 파티로 충분할 테니까요. 아, 그리고 사과가 늦었습니다. 저는 리님이 이미 목욕탕 회동에 대해서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당황하셨을 텐데, 미리 알려드리지 못한 점, 정말로 사과드립니다.)”
내게 손해는 없었으니까 이런 건 넘어갈 수 있다.
오히려 눈이 즐거웠지.
솔직히 사과는 까밀라가 해야 한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목욕탕 회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시간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목욕 하고 싶다는 말 말고는 꺼낸 적이 없다.
날 ‘융’ 사람이라고 한 건 자신이면서, 날 전혀 ‘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간 행동을 보면 머리가 없는 게 100%니까.
어떻게 그 머리로 상단주를 하고 있는 건지 굉장히 의문이다.
주변에 있는 지부장 네 사람도 그렇다.
내가 보기엔 일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입에 기름만 좔좔 흘러서 아부만 잘하지.
차라리 페르난도가 낫겠다.
얘도 부족한 점은 있지만, 아까 통역할 때 보면 나름 센스가 있다.
필요 없는 미사어구는 자른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건 됐어, 방금 사과로 충분해. 그보다 혹시 진지한 얘기의 내용이 뭘까? 짐작 가는 게 있어?”
“(융과 교역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거 봐.
상인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와야하는 거 아닌가?
마차에서 이 질문이 나오면 대답하려고 이것저것 모든 정보를 짜깁기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런 질문은 없었다.
게레로도, 까밀라도.
이번에도 이런 질문은 아닐 거다.
짧게 봤지만, 내가 본대로의 까밀라라면 100%다.
“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데. 뭐, 좋아. 그 얘기 도중에 내가 지켜야 할 게 있어? 예절 같은 거.”
“(남녀 간의 회동이라면 거리를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거리를 줄인다는 건 상대에게 구애를 한다는 뜻이 되니까요. 그것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제가 본 리님이라면 분명 실수하지 않으시겠지요.)”
그거였군.
그래서 얼굴을 붉혔던 거였어.
드디어 비밀이 풀렸다.
잠깐, 그런데 먼저 다가온 건 분명 까밀라 쪽이잖아?
자기 멋대로 착각해놓고 나한테 책임을 넘기는 거야?
아무리 머리가 비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게 맞아?
의문이 자꾸 떠올랐지만, 까밀라가 그간 보여줬던 태도를 생각하면 결론은 뻔했다.
이번에 가면 빼도 박도 못하게 내가 실수를 하든지, 아니면 그녀가 나를 덮치든지 하겠지.
진짜 실수를 하고 이 상단을 접수할까?
능력도 없이 아부만 떨 줄 아는 지부장 넷도 까밀라만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걔들에게 넘어갈 바에는 내가 좀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까밀라의 외모는 부족하지 않지만, 그게 다다.
그 외에는 메리트가 하나도 없다.
“(리님? 목욕탕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일단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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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했던 것처럼 빠르게 샤워를 하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수건 하나로만 하체를 가린 상태다.
“(리님...)”
목욕탕 안에는 까밀라가 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수건 한 장으로 가리기에 까밀라의 몸은 너무 입체적이라, 위도, 아래도 조금씩은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다가온 만큼 물러섰다.
거리 유지.
페르난도가 한 조언이다.
“(리님...?)”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까밀라의 두 눈이 두 배로 커진다.
큰 눈에 차오르는 물방울을 보니 바로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다.
“크루스님, 제가 아까 보여드린 것은 실수입니다. 제가 거리 조절을 잘못해서 오해를 불러일으켰군요.”
“(네? 하지만 거리 말고도 분명 반응을...)”
“크루스님을 앞에 두고서 반응하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겁니다. 진실로 아름다우시니까요.”
“(그렇다면 왜 안 되는 거죠? 남자들은 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육체적인 관계보다 정신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입장이라서요.”
대놓고 거짓을 말하자니 마음에 약간 찔리긴 했다.
내가 물론 정신적인 관계를 중요시 하지만, 육체적인 관계를 먼저 맺은 적도 있다.
케이라라던가 말이다.
“(...정말, 안 되는 건가요?)”
“네, 제 행동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정말로요?)”
“네, 안 됩니다.”
나는 세게 말했다.
그녀가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뚝뚝.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울음도 터졌다.
“흐아앙...”
우는 모습을 보니 내 앞에서 저렇게 울었던 또 한 사람, 소연이 떠오른다.
그녀도 저렇게 서럽게 울었다.
울다가 결국 포기했고.
나중에 미련이 남았든 말든, 그 자리에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런데 까밀라의 끝은 달랐다.
첨벙첨벙.
그녀가 물을 헤치고 달려와 넘어질 듯 내 품에 안겼다.
피하기엔 그녀의 몸짓이 너무 위태위태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가슴과 가슴이 수건 하나를 두고 맞닿았다.
가슴의 무게감과 감촉에 내 성욕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성욕 제어를 통해 분신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흐끅, 왜, 안 되는 건데요, 왜요? 이유를 끅, 알려줘요!)”
내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비비는 모습을 보니 참 아련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영화 보듯이 몰입을 못하고 있다.
그녀를 천천히 떼어내 바닥에 앉혔다.
그 앞에 마주 앉아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진짜 알고 싶어요?”
“(네, 끅, 알려줘요. 제가 다 할게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눈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다.
슬픔, 혼란, 기쁨, 희망.
내가 구해준 게 이렇게나 큰 영향을 끼칠 줄이야.
앞으로는 사람도 가려서 구해야하는지도.
아니면 성욕으로 매혹을 쓰지 말거나.
이게 무슨 귀찮은 일이냐고.
“일단 첫 번째. 낮에 목욕탕에서 제게 접근한 건 누구죠?”
“(흐끅, 그건, 리님이... 끅. 리님이 잘 모르셔서...)”
“탈락.”
바로 일어나서 뒤로 도는데, 내 다리를 붙잡는 몸이 있었다.
“(흐끄, 죄송해요! 제가, 제가 다가갔어요. 제가 리님 유혹하려고 그랬어요. 시녀가 그러면 다 된다고 해서, 죄송해요. 끅, 제송해여...)”
진실을 인정한 건 좋다.
그래도 내 안에서 까밀라의 평점은 여전히 바닥이다.
나는 다리를 풀고 다시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두 번째, 크루스님, 상단 일은 전혀 모르죠?”
“(네? 그건 또 왜... 이거랑 그거랑은...)”
“탈락.”
“(제성해여! 끅, 몰라요! 저 바보예요. 삼촌들이 시키는 대로만... 끅.)”
까밀라가 다시 내 다리를 붙잡았다.
이거 계속 하니까 조금 재밌을지도.
그러나 평점이 아주 약간 올랐을 뿐, 바닥과 거의 차이는 없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진짜 탈락시킬 수 있는 말을 해야겠다.
“세 번째, 숙제를 줄 거예요. 혹시 해내시면 또 모르죠. 제가 크루스님을 선택할지.”
“(할 거예요. 하겠어요. 반드시 해내겠어요.)”
어느새 그녀의 눈물은 쏙 들어갔다.
이제 눈빛에 희망이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저 눈빛이 뒤바뀌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좋아요. 그럼 상단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요.”
“(네? 네?)”
“누구한테 맡길지는 페르난도랑 상의하세요. 지부장 중 한 명은 안 돼요. 무조건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넘겨야 해요. 아시겠죠?”
“(그, 그게... 이건 아버지가 하시던...)”
“그럼 저랑은 끝이고요.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
그녀의 눈빛이 희망에서 절망으로 바뀌는 데까지 걸린 시간 단 10초.
괴롭히는 맛이 있는 예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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