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chapter 18. 크루스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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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그, 리님... 혹시...)”
“네, 까밀라.”
“(혹시... 제게 마음이...)”
고개를 푹 숙인 까밀라가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딴판인 느낌이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이고 편안했는데, 지금은 부끄러워하는 느낌.
내가 착각한 건가?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
“(아가씨,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들어온 건 남자 네 사람.
다들 나처럼 수건 한 장만 두르고 들어왔다.
넷 다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통역이 된 건 이전부터 마법을 걸어 놓은 게레로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탕으로 들어와 까밀라 옆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까밀라도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물속에 부풀어 오른 내 자지가 정확히 보이지 않을 거리였다.
“(제가 알기로 융에는 이런 목욕탕 문화가 없는 걸로 아는데, 아가씨께서 뭔가 실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나 걱정되네요.)”
...혼욕 문화가 있었어?
왜 마차에서는 말해주지 않은 거지?
“(다비드, 내가 앤 줄 알아요? 목욕탕 예절은 내가 제일 중요시하는 거라고!)”
얼굴을 그렇게 붉히고서 하는 변명은 역효과 같은데.
역시나 까밀라의 변명에도 네 남자의 얼굴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럴 때는 내가 스스로 변호를 하는 게 중요하다.
잘못하면 성추행범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원인 제공은 까밀라가 했지만, 여기는 홈이 아니니 배짱을 부릴 수가 없다.
“실례라뇨. 상단주님께서는 제게 이곳의 목욕 문화를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톡특하면서도 훌륭한 문화더군요.”
“(그렇죠? 제가 그래서 목욕을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별 일 없었다면 다행입니다. 아가씨께서 목욕을 너무 좋아하셔서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습니다.)”
나도 별 일 없어서 다행이다.
조금만 덜 참았으면 큰 일 날 뻔했다.
처음으로 넘어 온 이세계에서 쫓기는 신세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
“****.”
남은 세 사람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나도 고개는 숙였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인사를 전하지도 못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한 번에 세 사람에게 통역 마법을 걸지 못합니다. 게레로님, 죄송하다고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아, 맞습니다. 오면서도 그랬었죠. 여기 중에 한 사람만 걸 수 있다는 거군요. 그럼 누구를...)”
“이미 상단에서 붙여 주신 페르난도에게 걸었습니다. 오늘 또 걸기에는 어려울 것 같네요.”
하려면 더 할 수는 있었지만, 숨기기로 했다.
능력은 숨길 수 있을 때 숨겨야 필요할 때에 빛을 발하는 법이다.
특히나 이렇게 혼자 다니는 거라면, 늘 조심하는 게 옳다.
“(그렇군요. 그게 맞겠네요. 좋아요, 이렇게 하죠. 페르난도를 불러 통역을 시키겠습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을 더 추가한다고?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나 거기서 거기이긴 하겠지만, 주인의 반나체를 노출하는 게 그렇게 쉬운 건가?
아무리 혼욕이 아무렇지 않은 문화라도, 그게 된다고?
역시나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건 어렵다.
일단은 그러려니 넘어가는 수밖에.
내가 손해 보는 문제는 아니니까.
게레로가 밖을 향해 신호를 주자, 페르난도 루이즈, 페르난도가 들어와 내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내게 목욕탕에 오면서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라고 언질을 줬다.
그도 역시 수건 한 장만 두르고 들어왔다.
“(그럼 목욕탕 회동을 시작해 볼까요.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하시죠. 이쪽은 저희 아가씨를 구해주신 리님. 이쪽은...)”
“****.”
세 사람이 차례로 다시 한 번 소개를 했고, 페르난도가 내 뒤에서 조용히 그들의 인사를 통역해줬다.
크루스 상단 동쪽 지부장 다니엘 구즈만.
크루스 상단 서쪽 지부장 파블로 모야.
크루스 상단 북쪽 지부장 올리베르 아코스타.
그리고 남쪽 지부장이 다비드 게레로다.
참고로 동서남북에 따로 지부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까밀라의 아버지가 죽고난 후에는 지부가 없어졌다고 들었다.
지금은 이름만 남은 직책이라는 이야기다. 하는 일도 축소됐다.
지부가 있을 때는 지부를 중심으로 상행 서너 개를 책임졌는데, 지금은 그쪽 방향으로 가는 상행 하나 정도를 관리할 뿐이라고 한다.
“(아가씨께서는 자작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교섭을 마치셨습니다. 역시 까밀라 아가씨입니다. 상단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선대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까밀라 아가씨라면 분명 선대보다 상단을 크게 키우실 수 있을 겁니다.)”
소개가 끝나자 게레로가 까밀라를 칭찬했다.
다른 지부장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는데, 내용이 비슷했다.
“(구즈만님께서 이번 상행이 성공적이라 들었다며 상단주님을 칭찬하셨습니다.)”
“(모야님께서 이번 상행을 통해 상단이 크게 성장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코스타님께서 상단주님이 상행이 끝나고 더 아름다워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상행이 체질이신 천상 상인이라고 하십니다.)”
페르난도가 비교적 짧게 번역해줬지만, 지부장들의 말은 전부 페르난도의 말보다 길었다.
게레로보다 더 길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감사해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이건 전부 다 리님 덕분이에요. 리님이 아니었다면 진짜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저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다 크루스님의 행운이에요. 평소에 열심히 사신 덕에 하늘이 돌보신 겁니다.”
“(오, 그게 ‘융’의 천신이군요. 맞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천신께서 도우신 거지요.)”
까밀라가 내게 공을 돌리자, 난 늘 하듯 내 공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게레로가 이번에도 처음 듣는 듯이 ‘천신’을 끌고 왔다.
어떻게 저렇게 표정이 한결 같을 수 있는지.
저 대사만 벌써 수십 번 들은 것 같은데.
이 대화 흐름은 마차에서 수도 없이 겪은 거였다.
‘융’에 천신이란 존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것도 게레로의 입을 통해서.
이 후의 대화 흐름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까밀라가 다시 한 번 나를 추켜세우고, 내가 사양하고, 게레로가 다시 까밀라를 칭찬하고.
하지만 내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구즈만님께서 상단주님은 역시 대단하다고 하십니다. 천신에게까지 주목을 받으시다니, 상단의 미래가 아주 밝다고 하십니다.)”
“(모야님께서 앞으로는 천신께도 기원을 드리자고 하십니다. 천신의 사도이신 상단주님께서 기원하시면 상행이 더 성공적으로 끝날 거라고 하십니다.)”
“(아코스타님께서 상단주님이 천신의 총애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상단주님의 아름다움에 천신이 반했을 거라고 하십니다.)”
여긴 게레로 같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더 있었다.
까밀라를 칭찬하는 시간이 세 배는 길어진 것이다.
처음엔 이걸 또 어떻게 견디지 싶어 머리가 아팠는데, 듣다보니 할만 했다.
게레로 혼자 있을 때는 까밀라가 중간 중간 꼭 나를 보면서 말을 걸었는데, 4명이나 칭찬을 연발하니 까밀라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덕이다.
“(뭘요. 천신께서도 그저 저를 귀엽게 봐주신 것뿐이에요.)”
“(이번 상행은 어려웠지만, 결국 해냈어요. 다음에도 반드시 해낼 거예요.)”
“(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도움이죠. 제 몸 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피가 도와주시는 거예요. 저를 믿고 따라와 주세요. 제가 반드시 크루스 상단을 일으키겠어요.)”
네 명의 칭찬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더니, 완전히 콧대가 올라갔다.
나 따위는 이제 생각도 안 나는 모양이다.
아니, 이제 보니 생각은 하고 있었다.
대신 구애의 방식이 조금 바뀌었다.
그 전에는 날 칭찬하면서 내게 환심을 사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도도하게 날 바라보면서 ‘어때요? 저 매력 있죠?’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매력이 넘쳤다.
도도한 눈빛도 어울리고, 물방울이 맺혀 있는 윗가슴은 훨씬 더 어울렸다.
보통 남자라면 저 모습만으로 홀딱 빠졌을 것이다.
아무튼, 까밀라가 조용히 있으니까 나도 견딜만했다.
그냥 보고만 있으면 되니까.
이 쓸모없는 대화를 계속 통역해야 하는 페르난도는 고생이겠지만, 나야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까 상관없다.
물은 따뜻하고, 아주 편안하다.
“(아코스타님이 이번엔 북쪽으로 상행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십니다. 상단주님께 좋은 화장품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모야님이 다음 상행은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상단주님과 함께라면 지금 침체된 서쪽 상행이 다시 활성화 될 거라고 하십니다.)”
“(구즈만님께서 동쪽 상행은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상단주님께서 축복해 주신 덕에 이번에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하십니다.)”
듣고만 있다 보면 상단 수뇌부 회의 같은 느낌도 있는데, 내가 이걸 듣고 있어도 되는 걸까?
음... 잘 따져보면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다.
지부장이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알맹이가 없는 느낌이니까.
그냥 까밀라에게 아부하는 게 전부다.
이대로 시간만 때우다 보면 끝이 나겠지.
그런데 저녁 파티도 비슷한 양상일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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