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120화 (120/137)

〈 120화 〉 chapter 16. 드래곤 아쥬블란카르

* * *

120.

“하으읏!”

블란카가 신음을 냈다.

그녀는 그 순간 많은 게 바뀐 걸 깨달았다.

정민의 자지는 여전히 딱딱했고, 그녀의 몸과 딱 맞았다.

정민의 정액은 여전히 그녀의 자궁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척추에서부터 올라오는 전류의 양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멍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분명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민과 강한 연결이 생겼다.

정민에게 봉사하고 싶었다.

정민을 사랑하고 있다.

솔직히 이런 감정은 드래곤에게 익숙하지 않다.

드래곤이란 마나가 모여 탄생하는 생명체.

홀로 살아가는 게 기본이고, 같은 드래곤을 만나는 경우도 흔치 않다.

평생 성이란 걸 모르고 사는 개체도 많다.

성이나 격렬한 감정을 경험한다고 해도 일종의 유희로서 경험하는 거지, 본체로서, 동등한 상대라고 생각하는 존재와 경험하는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블란카도 방금 전까지는 정민과의 관계를 유희라고 취급했다.

유희라고 생각하기 힘들만큼 엄청난 수준의 쾌락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이 차원에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일 뿐, 시간이 흐르고 차원 이동이 가능해지면 모든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바뀌었다.

블란카는 정민을 사랑하고 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라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준하는 감정인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지 알게 됐다.

‘나태!’

“어때, 블란카. 이래도 계속할 거야?”

정민이 그녀의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만, 어느 정도는 피곤한 모습.

5일 동안이나 혹사했으니, 아무리 인큐버스에 버금가는 인간이라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어? 진짜?”

“그래 진짜다. 진짜니까 그 손 멈춰도 된다.”

블란카는 자기 허벅지를 때리려는 정민의 손을 제지했다.

“이제 조금 인정할 마음이 들었어?”

“응. 이제 인정할게. 다 그대 덕분이야.”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기 배가 빵빵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정 후 살짝 줄어들었던 자지가 다시 기운을 차린 것이다.

“...그대는 짐승이다. 정말 분위기를 따지지 않는군.”

“다 블란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 너도 거울을 보면 동의할걸?”

정민이 삽입한 채로 자세를 바꾸었다.

이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은 대면좌위가 됐다.

블란카는 가까이 다가온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정신세계에서 이별의 입맞춤을 했지만, 이곳의 정민에게도 하고 싶었다.

그녀 스스로 이것이 미련이란 걸 알았다.

떠나기 싫은 몸부림이란 것도.

입맞춤에 답하기 위해 정민의 입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 입을 손으로 막았다.

“뭐야, 진짜 여기서 끝내게? 끝낼 때 끝내더라도...”

가벼운 입맞춤.

고작 그것만으로, 그녀의 질은 수축했다.

수축에 맞춰 정민의 자지도 불끈하며 쿠퍼 액을 뱉어냈고.

이대로 키스를 하게 되면 그녀는 분명 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터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정민이 가져다준 기회를 날려버리는 멍청한 짓이다.

털썩.

정민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블란카가 마법으로 재운 거였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

철퍽.

그녀를 반기는 소리는 정액 뭉텅이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던 그녀는 마법으로 다시 정액을 질 안으로 넣고 막았다.

본체로 돌아가면 쥐뿔도 안 남을 만큼의 양이었지만, 그거라도 그녀는 원했다.

‘보자...’

마법으로 옷도 챙겨입은 블란카가 케이라를 찾았다.

케이라의 위치는 연구실이었다.

블란카는 바로 연구실로 공간 이동했다.

팟.

“...블란카님? 여긴...”

“시간이 없다. 이걸 받아들여라.”

“...윽.”

블란카가 케이라의 머리를 잡고 마력으로 강제로 기억을 전송했다.

‘나태’에 관한 내용과 블란카가 앞으로 할 일에 관해서였다.

“이제 비켜라.”

“네? 아...”

케이라가 멀어지고, 블란카는 연구실 중앙에 섰다.

네메시아를 소환할 때 쓰던 연구실은 그녀의 본체가 들어서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높이는 조금 부족했지만, 그녀가 알기로 연구실 위엔 별것 없었다.

부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콰지지직.

눈처럼 하얀 드래곤의 본체가 연구실 천장을 부수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금안 앞에는 케이라가 서 있었다.

[케이라여.]

“네, 블란카님.”

[정민을 잘 부탁한다.]

“...네.”

블란카가 눈을 감았다.

케이라와 연구실, 옆 빌딩에 자는 정민이 사라졌다.

그녀는 어른 버전 인간의 모습으로 암흑 속에 떠 있었다.

정신세계 속에서는 보통 드래곤이어야 했는데, 이런 때조차 인간이라니.

‘신기하구나.’

그녀는 암흑 속에서 ‘나태’를 찾았다.

‘나태’는 그 이름답게 암흑 속에서 자고 있었다.

‘나태’는 대부분 그랬다.

자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는 게 나태의 모든 삶이었다.

가끔 잠에서 깨거나, 혹은 자는 상태로도 이것저것 하지만, 자는 게 늘 기본 상태였다.

그래서 ‘나태’는 아직 블란카에게 일어난 이상 사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이제 막 인지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블란카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태가 앞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정신세계 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태의 목소리가 진짜인지 거짓인지도 몰랐고, 나태의 성별도 몰랐다.

‘왜 내 힘을 거부, 아니 어떻게 거부했지? 거부하면... 아니지, 리가 있으니까.’

확실한 건 나태가 그녀의 정신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녀의 정신세계가 나태를 봉인하기에 충분히 넓고 세계와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설마,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나태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나태할 뿐, 능력도 지식도 지혜도 다 가지고 있었으니까.

‘맞다. 다음에 보자꾸나.’

‘다음에 볼 수 있을까? 그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한 번은 볼 것이다. 그때를 기약하지.’

블란카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암흑 속에서 스스로 빛나던 그녀 자신의 모습도 사라지고, 완전한 암흑만이 남았다.

‘방치플레이가 조금 길겠네.’

그녀는 스스로 정신세계를 닫았다.

봉인이 완료됐다.

+++

눈을 떴을 때, 난 침대 위 혼자였다.

5일 동안 본 익숙한 천장이었고, 익숙한 장소였다.

익숙한 사람이 옆에 없긴 했지만, 예상한 일이라 당황하진 않았다.

나태를 봉인하러 갔겠지.

아무리 그래도 신급인데, 섹스하던 침대 위에서 할 순 없을 테니까.

옷을 입고 있으니 케이라가 들어왔다.

“정민아, 블란카님이...”

케이라 답지 않게 급한 움직임에 당황한 얼굴이다.

“왜? 봉인하러 간 거 아니었어? 무슨 문제라도?”

“...스스로를 봉인하셨어.”

뭐?

“스스로를 봉인하셨다고! 이 바보 자식아!”

두 번 듣고 나서야 난 케이라가 그녀답지 않게 급한 걸 이해했다.

나 역시 급하게 연구실로 공간 이동해야만 했으니까.

팟.

연구실은 화이트 드래곤의 거체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몸 사이에 위치한 얼굴을 향해 달렸다.

내 키 보다 큰 눈앞에서 난 눈꺼풀에 손을 댔다.

거기에 얼마 안 되는 내 마력을 불어 넣었다.

우웅.

마력은 안으로 들어간 후, 아무런 변화 없이 사라졌다.

보통은 어떤 반응이 있어야 했다.

케이라에게 마력을 넣었다면, 케이라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몸의 반응뿐 아니라, 마력으로도 반응이 있다.

케이라의 마력이 느껴진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블란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몸으로도, 마력으로도.

마력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진짜, 봉인된 것이다.

“케이라, 이거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하면 봉인을 풀 수 있는데?”

“가르쳐 줄 수 없어.”

나는 케이라가 모른다고 답하길 바랐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런데 그녀는 최악의 답을 했다.

“왜? 블란카는 지금 혼자서 외롭게...”

“너도 알잖아.”

“내가 뭘 안다고! 내가 아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소리쳤다.

소리쳐도 답답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

케이라는 조용히 서 있었다.

담담한, 아니 무력한 케이라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내 모습 같았으니까.

“으아아아아!”

화가 났다.

그 누구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바보 같았다.

신급의 존재를 쉽게 봉인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한 방 먹일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내 기지로 신급 존재를 무너지게 한 것 같아서 기뻤다.

조금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건이 기습처럼 나타났지만, 이번 미국행을 잘 마무리 했으니까.

정말로 바보였다.

결국은 블란카를 희생시킨 것뿐인데.

블란카.

블란카와 크게 감정적 교류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어린 블란카랑 재밌게 놀았고, 어른 블란카와는 뜨겁게 놀았지만, 블란카가 봉인 됐다고 폐인이 될 정도로 교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케이라가 날 버려두고 가면 또 모르지만.

이렇게 스스로 객관화해 봐도, 이 분노에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 되뇌어 봐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나는 힘을 실어 발을 굴렀다.

마나와 성욕과 분노가 섞인 발 구름에 연구실이 흔들렸다.

하지만 연구실 바닥엔 금하나 가지 않았다.

이 연구실은 소환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특별히 튼튼하게 지었다고 했으니까.

블란카는 자기 몸으로 돌아간 것만으로 연구실의 천장을 뚫어 버렸지만.

이게 내 현주소였다.

애매한 능력과 애매한 힘.

모든 위기의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힘.

다르게 말하면 도움받을 동료가 있다는 이야기지만, 그것 또한 나의 힘이지만,

결국은,

결국은,

결국은.

중요한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하...”

허탈하다.

분노조차도 애매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 블란카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가, 내 무력함 때문에 블란카를 핑계로 분노하고 있는가.

“케이라, 내가 대단한 사람이란 거, 아직 유효해?”

미국에서의 시작을 알렸던 케이라의 말.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게 해줬던 말.

“유효해.”

케이라는 다시 한번 내게 힘을 줬다.

좋아, 그럼 대단한 사람이 되자.

힘이 부족하면 힘을 기르면 되지.

이 분노를 동력으로.

미국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