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chapter 16. 드래곤 아쥬블란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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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이제 어떻게 하지?’
정민은 막막함을 느꼈다.
상대는 이미 신이라고 불리어도 좋은 존재.
정민이 보기에는 신에 가까운 드래곤도,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섹스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걸로는 어떻게 제어할 방법이 안 떠오른다.
‘나태’의 성별도 문제였다.
섹스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태’의 원성별이 남자라면, 정민의 능력은 힘을 쓰기가 힘들다.
정민의 의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민은 유일하게 물어볼 수 있는 대상에게 질문했다.
‘블란... 아니, 아쥬블란카르. 이제 어떻게 하면 될지 조언을 좀 해 줄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오옷! 두 가지나!’
‘하나는 신살(??)이고, 하나는 봉인이다.’
정민도 생각할 만한 방법이었지만, 블란카의 입에서 나오는 거라면 또 달랐다.
구체적인 안이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나의 세계, 요이아르에는 신살기가 존재한다. 신살기란 말 그대로 신을 죽이는 무기다. 세간은 전설로 치부하지만, 드래곤에게는 신살기에 대한 전승이 내려온다.’
[신살 앞에서는 불멸자들도 한낱 필멸자와 다름이 없으니. 후예여, 신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전승에 따르면 요이아르에서는 신살이 4번 일어났다. 죽은 신이 어떤 신이었는지조차 남아 있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신살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성능이라고 봐야 하니까.’
‘그 신살기를 찾아 여기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나태를 죽이는 게 가능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정민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의 목표는 차원을 돌아다니는 거였고, 언젠가는 블란카의 차원에도 갈 거였다.
신살이란 목표를 가지고 가진 않겠지만, 운이 좋다면 신살기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이아르? 왜 처음 듣는 것 같지? 시스템 메시지를 내가 봤었나?’
정민은 이세계체류계약 메시지를 못 본 건지, 보고도 넘긴 건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신살기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
‘그건 나도 모른다. 허나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다. 내 세계에 널린 게 신살기의 전설이니까.’
전설 속에 진실을 숨긴다.
정민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로도 비슷했다.
신살기를 숨긴 이들은 신살기가 악신이나 고위 악마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신살기를 여러 개 만들었고, 수십 개의 전설도 함께 만들었다.
드래곤이나 엘프 같은 수명이 긴 종족은 신살기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지만, 밖에서 보면 그조차도 전설 중 하나라고 치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정민의 입장에서도 의심해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정민의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해서 믿을 수밖에 없지만.
‘좋아, 신살기는 알겠어. 그럼 봉인은 뭐야?’
‘말 그대로다. 나태를 봉인하는 거다. 나태는 지금 내 정신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나의 정신세계에서는 내가 신이다. 나태를 내 정신세계에 봉인하면 된다.’
‘...? 그럼 지금은 뭐야?’
‘나의 정신은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내가 분리되어 나온 것도 그렇지만, 이곳이 나의 차원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 차원에 넘어왔을 때, 나는 내 정신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이곳이 이계이기 때문이다. 그대도 알다시피, 세계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거부하지. 물론 나 정도 되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악마처럼 그에 특화된 존재가 아니면 며칠이 한계다.’
이계에서 버티려면 힘을 모아야 하는데, 마나는 차원마다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감정은 어느 차원이나 같고, 감정은 마나를 움직이게 한다.
악마가 다른 차원에서 쉽게 버틸 수 있는 이유이다.
‘더군다나 나는 마법진에 갇힌 상태였고... 내가 이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나태가 내 소환을 취소하거나, 그에게 힘을 받는 수밖에 없었지. 결국 나는 나태에게 힘을 받았다. 그대 식으로 말하자면, 이세계체류계약을 맺은 셈이다.’
‘힘을 받으면서 난 정신체를 일부 분리했다. 나태가 힘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모르니까, 정신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다.’
블란카의 결정은 옳았다.
침대 위의 블란카는 지금 나태를 잊었다.
나태의 힘을 받기 전에는 나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지금 블란카는 나태의 존재를 몰랐다.
나태가 블란카를 뒤에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전면에 나서서 블란카가 블란카가 아니게 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섹스에 미친 지금 블란카의 모습처럼 나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조종했다.
‘어쨌든 살아만 있다면 나중에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태가 내 정신세계로 들어오는 기회가 왔음에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결국 상황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나는 나태의 힘없이 이 차원에서 존재를 유지할 수 없고, 그렇다면 봉인을 하나마나다. 내 존재가 사라지면 나태의 봉인이 바로 풀릴 테니.’
‘네가 죽으면 같이 죽는... 뭐 그런 봉인은 안 되는 거야?’
‘나태는 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신성을 가지고 있진 않다. 봉인이라면 어떻게 비벼볼 수 있겠지만, 그게 한계다. 신살기가 필요한 이유지.’
‘그리고 이제 와서는 봉인 자체도 불가능해졌다. 내 존재는 이 차원의 공격에 거의 사그라지고 있다. 이 힘으로는 원래 정신과 합쳐졌을 때, 나태를 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정민은 블란카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뭐지? 뭔가... 뭔가... 아, 계약!’
정민은 저기 침대 위의 블란카와 섹스했을 때, 이세계체류계약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조금 전에는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블란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약을 맺지 못한 것이 맞다.
날개 무늬까지 봤는데, 거기에서 멈춘 모양이다.
‘잠깐, 그럼 블란카는 지금도 나태의 힘으로 이 세계에서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거야? 내 계약은 실패하고?’
‘아쥬블란카르라고 부르라고 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태클이라니, 정민은 블란카의 성격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드래곤답달까.
‘아니, 너랑 구분하려고 그런 거지. 저 아래 블란카 말이야. 나는 분명 계약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라면 넘어가 주지. 그대와 블란카의 계약은 실패했다.’
‘왜? 나태가 막아서?’
‘나태가 그런 귀찮은 일을 할 리가. 그냥 그대의 그릇이 거기까지였던 게지. 그대가 드래곤과 계약하기엔 너무 약한 것이다.’
정민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게 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블란카의 눈이 잘못된 건가? 블란카는 드래곤 아이로 보고 날 찾아왔다고 했어. 그것도 나태가 조종한 거야?’
‘드래곤 아이라면... 그대를 직접 본 후에도 그런 말을 한 거면 나태가 조종했다고 보긴 힘들다.’
‘그럼 계약이 가능하다는 거 아니야?’
‘그렇다. 하지만 실패했지. 드래곤 아이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니 실패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평소라면 정민도 그런가 하고 넘어갔을 말이다.
실패란 흔한 것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고 죽는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는 계약에 단서가 있다는 걸 거의 확신했다.
‘아니, 평소대로라면 계약은 분명히 됐을 거야. 계약이 실패한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블란카가 이미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이라거나.’
‘이중계약이 안 된다는 말인가? 일리는 있군.’
‘맞아. 그러니까 제대로 이중계약을 맺어 보는 건 어때?’
‘방금 이중계약이 안 된다고... 그대, 설마?’
역시나 드래곤.
정민이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래, 지금 여기서 계약하는 거야, 아쥬블란카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야.’
침대 위의 블란카는 이미 계약이 된 상태라서 정민과 계약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블란카, 아쥬블란카르라면?
그녀는 지금 이 차원의 공격에 사그라지고 있는 상태, 즉 체류계약을 맺은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정민과 체류계약을 맺을 수 있다.
진짜 이중계약을 맺는 것이다.
침대 위 블란카는 나태와, 여기 아쥬블란카르는 정민과.
그리고 그 후에 아쥬블란카르가 침대 위 블란카와 합쳐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대는 이 세계의 사람, 심지어 그 계약은 시스템이 보증하는 것이겠지. 나태에겐 시스템을 뒤엎을 힘이 있지만, 본질은 이질적인 존재. 다시 힘으로 제압한다고 해도, 한 번은 계약이 끊길 확률이 높아.’
‘맞아. 그러면 순간적으로나마 블란카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올 거고.’
‘그때를 노려 봉인하면 된다는 결론이군.’
‘그게 내 계획이야, 어때?’
정민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된다.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대치고는 머리를 좀 썼군. 그대의 머리는 침대 위에서만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너는 드래곤치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거 같은데?’
‘무슨 뜻이지?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건가?’
발끈하는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는 건, 정민이 아쥬블란카르의 표정 변화를 100%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난 이번에도 침대 위 머리를 쓴 거야. 잘 생각해 봐, 우리가 계약을 어떻게 맺을지.’
‘...’
화아악.
아쥬블란카르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정민이 침대 위 블란카에게서 자주 본 그 얼굴.
역시 동일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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