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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117화 (117/137)

〈 117화 〉 chapter 16. 드래곤 아쥬블란카르

* * *

117.

나태.

서큐버스가 ‘성욕’을 모았고, 사령 술사가 ‘삶’을 모았다면, 나태는 ‘게으름’을 모으는 악마였다.

어쩌다 나태가 게으름을 모으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 모든 게으름이 그에게 경배했을지도.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그와 가장 비슷한 감정을 모으기 시작했는지도.

또는 다른 감정을 모으는 악마였다가 게으름에 빠졌을지도.

중요한 건 ‘나태’가 게으름을 모으기 시작했고, 세상에 게으름만큼이나 흔한 감정은 없다는 거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있어도 게으르지 않은 자는 없다.

누구도 죽고 싶은 자는 없지만, 죽음은 게으름처럼 평소에 강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피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나, 게으름은 우리가 밀쳐내도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식욕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감정이지만, 게으름만큼이나 중독적인 감정은 아니다. 식욕은 포만감이 한 번 들면 사라지나, 게으름은 그 끝이 없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는 게 우리의 모습이지 않은가?

나태가 강력한 악마로 성장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자가 가장 강해지다니, 아이러니하지만 때로는 역설이 현실이 된다.

다행인 건 나태는 결국 나태하다는 거였다.

나태에 목적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니까.

나태는 그저 게으르고 싶을 뿐이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컨텐츠나 소비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뒹굴뒹굴하는 게 나태가 원하는 게으름이었다.

나태는 태어난 차원에서 그렇게 살았다.

대륙의 한구석에 박혀 삶의 대부분을 수면 상태로 지내며, 다른 사람의 삶을 컨텐츠 삼아 구경했다.

가끔은 시대의 흐름에 끼어들어 자신이 재밌어 보이는 대로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시대가 얼마나 흘렀을까.

나태는 자신의 힘이 차원 전체에 미치게 된 걸 깨달았다.

차원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으라고 명령하면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상태까지 온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그는 나태였기 때문이다.

나태는 게으름을 모은다.

그럼 게으름을 빼앗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부지런해진다.

그렇다.

부지런해진다.

나태는 모든 생명체에게서 게으름을 빼앗았고, 차원의 모든 생명체는 부지런해졌다.

모두 성실하고, 효율적이고, 뒤로 미루지 않는, 실패가 와도 바로 다시 일어나는, 좌절이란 없는 유토피아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나태에게는 무엇보다 재미없는 세상이었다.

이야기라고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태는 세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게으름을 흡수하는 그의 힘을 조금 줄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그것보다 세계를 떠나는 게 훨씬 더 간편했다.

세계를 떠나면 그를 구성하는 힘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다른 차원 에너지에 의해서 공격도 받겠지만, 그는 더 간편한 길을 선택했다.

다른 차원에 가서도 뒹굴 수는 있으니까.

그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나태는 몇 개의 차원을 옮겨가며 게으름을 모으고, 세계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부지런해진 세계에게 나태는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드러난 정황만 보면, 저주에 가까웠다.

나태가 사라지고 난 뒤 세계는 보통 혼란에 빠졌다.

몇천 년 동안이나 게으름이란 개념이 없다가 생겨나니, 세상이 이상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멸망하는 세계도 있었다.

부지런함이 만들어 놓은 세계 중에는 극단적인 모습을 취한 곳이 많았다.

게으름이 없다는 것 자체가 극단적인 상황이었으니까.

[지각하면 즉결 처형입니다.]

[야근을 거부하는 자, 먹지도 말라.]

[쉬는 건 일주일에 하루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휴가는 독일 뿐이다.]

나태가 만들어 놓은 사회 분위기가 이랬다.

여유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회가 잘 굴러갈 수 있었던 건, 모두가 규칙적으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저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저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며, 아무도 저 기준을 어기지 않았다.

그래서 멸망했다.

갑자기 게을러진 사람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비난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생겨났고, 혼란을 겨우 수습했을 땐 수많은 생명체가 죽어 버렸다.

말이 안 된다고? 세계의 멸망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일어나냐고?

맞는 말이다.

나태가 거쳐 간 세계 중에 20여 개의 세계는 혼란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가 최근에 거쳐 간 세계 중에 2곳은 멸망했다.

인간의 게으름은 어떻게 수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동물과 식물의 게으름은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강해진 나태는 동식물의 게으름도 흡수했다.

게으름이 사라진 동식물들은 열심히 자랐고, 열매를 맺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생산량을 냈다.

그런데 한순간에 그 생산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 생산량에 맞춰서 과하게 늘어나 있던 생명의 균형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세계가 멸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태는 해냈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그 결과에 관심도 전혀 없었지만, 나태는 2개의 세계가 멸망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악마였다.

멸망한 세계의 이름은 ‘프로제’와 ‘세카야.’

그 중 ‘세카야’는 나태가 지구에 오기 직전에 들렸던 차원이었다.

나태가 지구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난 건, 키퍼에게 가족을 잃었던 한 남자아이였다.

나태는 키퍼에 대한 증오가 어떻게 자라게 될지가 궁금했다.

복수는 그가 좋아하는 컨텐츠 중 하나였다.

나태는 바로 그 아이의 정신세계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이, 아이의 게으름을, 아이 주변 인간들의 게으름을, 아이 주변 모든 인간의 게으름을 빨아들였다.

‘키퍼는 악마다!’

그 어떤 근거도 없는 아이의 주장이 ‘지구해방작전’이란 단체가 된 건 그 때문이었다.

나태가 적절하게 힘을 빌려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들 부지런했기 때문에 단체가 빠르게 성장했다.

성장에 방점을 찍은 건 역시 나태가 한 드래곤 소환이다.

직접 힘을 빌려주는 것도 가능했지만, 역시나 그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건 귀찮았다.

대신 드래곤의 힘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그는 드래곤을 소환해 봉인하고, 그 소유권을 아이에게 넘겼다.

또한 그의 거처도 아이의 정신세계에서, 드래곤의 정신세계로 옮겼다.

이 드래곤이 바로 영문도 모른 채 지구로 끌려온 화이트 드래곤 아쥬블란카르였다.

드래곤의 힘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된 지구해방작전은 크게 성장했다.

미국 회원 백만, 전 세계 회원 천만의 거대 단체가 됐다.

그러나 아이의 능력은 거기가 한계였다.

만능이라고 해도 될 법한 드래곤의 힘이 있고, 쉬는 거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능력으로는 지구해방작전을 더 키울 수 없었다.

나태가 슬슬 지겹다고 생각한 시점도 이때였다.

그리고 그가 재밌어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

히어로 리.

나태는 지구해방작전과 리를 정면으로 충돌시키면 재밌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았고, 그렇게 일을 진행했다.

최종적으로는 그의 정신을 ‘리’에게로 옮길 계획이었다.

부딪히는 와중에 ‘리’가 어려워진다면, 억지로 지구해방작전을 무너뜨릴 생각도 있었다.

‘리’는 나태의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그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지구해방작전을 무너뜨렸고, 드래곤의 봉인까지 풀었다.

드래곤이 콧김 한 번으로 날려 버릴 수 있는 존재임에도, 드래곤에게 깝치며 드래곤을 자기 성기 아래 무릎 꿇린 점도 흥미로웠다.

30개 이상의 차원, 십만 년 이상의 삶 속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니크한 캐릭터였다.

그는 한동안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모르는 세계에서, ‘성욕’이 이정민의 정신을 깨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근본은 ‘나태.’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모든 걸 알 정도로 부지런한 존재는 아니었다.

‘비슷하게 ‘나태’는 나에 대해서도 모른다. 나는 마나를 기반으로 내 정신체를 분리했지. 분리한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럼 지금 저 섹스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정민은 제삼자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과 블란카의 섹스를 보고 있었다.

가짜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리얼함이 거기에 있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조금 전까지 섹스하던 건 그대가 아니었나?’

‘그야... 물론 나지.’

‘나도 같다. 나태는 기본적으로 인격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관찰하는 자일 뿐이다. 감각 공유 정도는 하는 것 같지만.’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카가 전해 준 정보를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대강 그림은 잡았다.

잘못된 정보거나, 재세뇌를 위한 떡밥 같은 건 아닌 듯했다.

그는 블란카와 지낼 때 가끔 느꼈던 위화감을 기억하고 있다.

진지해야 할 분위기에 꼬마 블란카와 지나치게 장난친다거나, 꼬마 블란카만 보면 때리고 싶어진다거나.

그때는 꼬마 블란카가 귀여워서라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태의 영향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튼 지구가 위기라는 소리다.

지금은 그냥 섹스에 미쳐 있을 뿐이었지만.

‘잠깐만, 그런데 세뇌? 세뇌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태의 영향을 받으면 부지런해진다며? 지금은 섹스만 하는데? 왜 섹스만 하는 게 부지런한 거야?’

‘지금은 저 섹스가 재밌는 모양이다. 나태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존재다. 부지런해지는 건 부가적인 효과지. 실제로 저 둘 말고는 전부 부지런해진 것 같은데, 아닌가?’

정민이 기억을 되돌아봤다.

케이라가 군말 없이 이세계 연구를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부지런해진 게 맞았다.

‘아니, 십만 년 이상 산 존재라며, 저 섹스가 뭐가 그리 특별할 게 있는 거지?’

‘드래곤과 인간의 관계라 그런 게 아닌가? 이상한 게 다 궁금하군.’

‘이상해? 아니, 자연스러운 거야. 나는 이미 섹스 마스터로 진로를 정한걸. 신에 필적하는 존재가 관심을 가지는 섹스라면 분석을 해봐야지. 혹시 또 모르잖아? 나태를 밀어낼 단서가 저 섹스에 존재할지도.’

블란카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 흐름에 동참하기 싫었다.

더 말하다간 그녀의 치부를 밝혀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잘 모르겠군. 그대의 분야니까 그대가 연구해보라.’

5,700년 만에 첫 경험을 한 블란카의 쾌감이, 나태를 빠지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는 걸 그녀 자기 입으로 밝히고 싶진 않았다.

그러기엔 드래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벌써 끝이야? 나는 아직인데...”

또 질펀하게 가 버리고는 다시 일어나 아직 지지 않았다고 하는 블란카의 육체 쪽 정신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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