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chapter 15. 지구해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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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드래곤.
그 종족명을 듣자, 케이라가 마법을 가르칠 때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법을 처음 만든 건 드래곤이야.’
태생부터 마나와 친숙했던 드래곤이 마법이라는 기술을 개발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법을 무시하게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육체만 가지고도 최강의 생명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마법을 이렇게 고도화한 건 인간이지.’
드래곤은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오로지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마법이란 꽤 편리한 학문이니까.
인간이 자신들을 시중들 때 사용하라고 전수한 것이다.
인간은 드래곤을 시중들 때만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인간에게 마법이란 편리한 것 이상의 학문이었으니까.
그들에게 마법은 힘이었고, 명예였고, 사랑이었으며, 또 인생이었고, 복수였으며, 전쟁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인간세계로 퍼져나간 마법은 인간이라는 종의 숫자와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한 개체가 만 년까지도 살 수 있는 드래곤 수십 개체의 희로애락과 수백만의 인간이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며 만 년 동안 느끼는 희로애락은 그 양에서 차원이 달랐다.
인간은 그들의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더 누리기 위해, 극복하기 위해, 완전히 버리기 위해 마법을 개량하고 개량해서 현재의 모습을 정립했다.
시대를 초월해 룬에 ‘의지’를 모음으로써 마법을 보조하고, 적은 마나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모습으로 말이다.
개량된 마법은 다시 드래곤에게 넘어갔지만, 드래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들에게 마법이란 여전히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편리함을 제외하고는 드래곤의 브레스가 훨씬 더 그들에게 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개량된 마법의 키라고 할 수 있는 ‘룬’을 드래곤은 쓸 필요가 없었다.
쓰지 않아도 룬을 쓴 것보다 더 큰 효율을 낼 수 있었다.
그들은 마나를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종족이었으니까.
마나의 주인.
이 별명은 그때서야 붙여졌다.
그리고 아르케니아 마법사들은 그들의 마법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마법을 그들에게 전수해준 드래곤을 ‘위대한 이’라고 불렀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신과 같은 육체를 잃었다 해도 여전히 마나의 주인, 마나는 여전히 내게 복종한다. 눈짓 한 번만으로 너희들의 숨을 끊을 수 있건만, 내 위엄이 어디로 사라진단 말이더냐.)”
음... 확실히 위엄을 느끼기가 어렵다.
백금빛의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는 매우 신비로웠지만, 그것도 발끈하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다 사라졌다.
뱀처럼 세로로 긴 눈동자의 이질감도 얼굴이 예쁘니까 금방 익숙해졌다.
키도 작고, 도발에 쉽게 걸리고, 마빡은 태평양처럼 넓기나 하고.
겉으로는 귀여울 뿐이다.
나 역시 마나에 복역하는 마법사로서 소녀에게서 알 수 없는 위엄을 느끼기는 해도, 시각적인 효과가 더 컸다.
남자는 본디 시각에 약한 동물이다.
“한 번 해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흥, 내가 하라면 못할 줄... 마나여, 저 여자의 입을 닫아라!)”
소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케이라가 마법 쓸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나도 작았다.
마나는 빠르게 움직여 케이라의 입에 닿았지만, 케이라의 입을 닫아 버릴 수는 없었다.
“이게 다 입니까?”
“(아니! 마나여, 저 여자의 입을 닫아라! 이, 아... 마나여! 저 여자의 입을 닫아라! 닫아! 닫으라고!)”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마나는 움직였지만, 서너 번의 마나가 모여도 내가 쓰는 마나량보다 적었다.
그런 정도로는 어떤 마법도 펼칠 수 없다.
룬도 안 쓰는 마법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하고.
“(마나여! 마나여! 마나여! 어디 갔어! 이 나쁜 놈들! 내가 좋다고 꼬리 칠 때는 언제고! 당장 빨리 오라고!)”
소녀가 어린애처럼 떼를 써보지만, 마나는 많이 모이지 않았다.
마나가 미안하다는 듯 소녀의 주위를 맴도는 게 느껴진다.
“진정하시지요. 위엄이 더 없어지십니다. 위대한 이여.”
“(...닥치거라! 네가 날 놀리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더 비참하다! 어디서 마나에 복역하는 존재 따위가, 마나의 주인을 놀리는 게냐!)”
“제가 좀 과했던 것 같네요.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마나의 주인이시여.”
“(사과를 받아주지.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저리 롤러코스터를 타는 걸 보면 정말로 어린애 같았다.
나이가 어린 드래곤인 걸까?
“그럼 위대한 이여,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극악무도한 무리가 나를 봉인하고 내 힘을 이용하고 있다. 봉인을 푸는 걸 도와다오.)”
“어디에 봉인돼 있으십니까?”
“(그건 지금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놈들은 내 본체를 공간 이동시키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으니까.)”
공간 이동?
무언가 감이 왔다.
케이라도 나처럼 느낌이 오는지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극악무도한 무리가 내 힘을 써서 무언가를 이동시킨 곳이 이곳이다. 꽤 멀리 이동시켰기에 봉인이 살짝 약해졌고, 나는 그 힘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봉인된 상태에서도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럼! 본체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지금 모르십니까? 공간 이동의 흔적을 역추적하면 안 될까요?”
케이라가 이례적으로 흥분하며 말을 끊고 얼굴을 들이밀자, 소녀가 놀랐는지 한 걸음 물러났다.
나도 케이라가 흥분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소녀는 다시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힘을 다 썼다. 다음 이동이라면 어떻게 위치를 잡을 수 있다. 그때 잡으면 된다. 이거면 안 되느냐?)”
“됩니다.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이여. 역시 마나의 주인이십니다.”
케이라가 소녀를 끌어안고서 말했다.
소녀의 얼굴에 당황이 역력하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라. 숨 막힌단 말이다. 이거 빨리...)”
케이라는 내가 제지하고서야 포옹을 풀었다.
얼굴이 빨개진 소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감사를 이렇게 폭력적으로 표현하다니, 역시 마법사란 미개하군. 내가 도움을 줄 기회를 준 걸 감사히 여기거라.)”
건방진 말이었지만, 소녀가 가지고 온 기회 때문에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케이라,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거지?”
“응. 맞아. 그게 맞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조금 전까지는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었는데, 지금은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였다.
“(이제 제게도 정보를 좀 나눠 주시겠습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로저스에게 케이라가 설명했다.
“이 드래곤님은 폭탄과 함께 이곳으로 이동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드래곤님께서 찾으시는 건 자기의 몸인데, 테러 집단에서는 그 몸을 이용해서 테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드래곤님께서 도와주신다면 테러 집단의 위치를 찾아 사전에 폭발을 막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역시 하늘은 미국을 버리시지 않았군요. 시련과 함께 극복할 방법을 함께 주시다니!)”
로저스가 하늘을 보며 성호를 그렸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다.
“(내가 돕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돕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드래곤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일단 따뜻한 우유부터 한 잔 가져오너라.)”
“네, 알겠...”
케이라가 바로 우유를 가지러 가려는 모션을 취하자, 나는 케이라와 드래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 이름은 뭐야?”
“(무례하다! 어디서 반말이냐! 본인은 마나의 주인, 위대한 이다. 예를 갖추어라!)”
“죄송... 하다고 할 줄 알았냐? 네가 지금 케이라에게 심부름시킬 위치야?”
우리를 위기에서 구할 수도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존재.
여기서 굽히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한동안 힘들어질 것만 같아서 좀 세게 나갔다.
분위기상 얼마간은 같이 다닐 것 같은데, 양보했다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올 것 같은 직감 때문이었다.
“(나는 마나의 주인이고, 쟤는 마나에 복역하는 존재인데 당연히 그런 위... 아악! 지금, 으악!)”
나는 소녀의 머리에 꿀밤을 두 방 먹였다.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바로 케이라 뒤에 숨었다.
괴롭히는 맛이 있는 캐릭터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어때? 이래도 개길 거야?”
“(흥, 내가 장난 좀 쳤다고 아이를 때리다니, 저놈은 너의 배우자로 맞지 않다. 분명 가정폭력범이 될 거다. 안 그런가? 케이라여?)”
“아니에요. 정민이는 아주 가정적이랍니다. 드래곤님도 금방 아시게 될 거예요.”
“(나는 알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이름은 아쥬블란카르다. 너는 블란카로 부르도록 허락하지. 하지만 저놈은 안 된다. 너는 반드시 풀네임에 존칭을 써야 할 것이야.)”
케이라 뒤에서 고개만 내민 채 내게 호통치는 드래곤 아쥬블란카르.
소녀는 케이라가 나보다 몇 배는 무서운 존재임을 아직 모른다.
지금은 단서를 찾았다는 기쁨에 고분고분하지만, 조금 전만 해도 블란카의 기를 누르려고 도발을 날렸었는데.
“싫은데? 블란카, 블란카, 블란카.”
“(흥, 어디서 벌레가 날아다니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큰 벌레도 봤어?”
“(드래곤에게 인간은 벌레다.)”
“그럼 벌레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건?”
“(케이라! 저 벌레를 잡아라! 나를 공격하지 않느냐!)”
케이라의 뒤에 숨으려는 블란카를 쫓아서 케이라를 중앙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갑자기 굉장히 즐겁다.
심각한 분위기고, 사람이 몇 명 죽었으며, 2차 테러가 예고되어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그렇지만 블란카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주는 분위기.
나나 케이라 말고도 로저스를 비롯하여 협회 사람들까지, 이 공간의 모든 사람이 활짝 웃고 있다.
흐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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