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chapter 14. 미국 키퍼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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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미국에 오시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키퍼 협회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며 그렇게 말했다.
방송에 공개되었고 사전에 내게 알려준 내용, 즉 게이트 내에서 마법진을 찾아 그걸로 이세계인을 소환했다만으로도 대부분 상황은 알 수 있었다.
한 달 전이면 애매할 수 있었지만, 사령술사의 지식을 계승하게 된 케이라가 있어서 마법에 관해서는 애매할 게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일까?
공개는 저렇게 했지만, 실은 뒤에 나와 같은 능력자가 있는 거라면?
...사실 있으나 없으나 큰 상관은 없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뭔가 물러설 수 없었다.
이세계인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순 없어도, 독점적인 능력은 가지고 싶은 욕망이랄까.
그리고 혹시나 악마가 뒤에 있다면,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게 훨씬 나은 일이기도 하다.
그런 류의 사명감도 약간은 있다.
더불어 어떤 방식으로든 소환된 이세계인과 체류계약을 맺을 수 있는지도 시험해보고 싶었다.
수장님은 나의 소환 게이트로 넘어온 게 아니지만, 악마 상태에서 계약을 맺어서 제대로 된 표본이라고 보기 힘들고, 얼마 전 기운을 나누었던 처녀 귀신 이다혜는 계약을 맺기도 전에 성불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차원의 기운을 접할 필요가 있었다.
계약이 되든 말든, 이세계체류계약은 새로운 차원의 기운을 받으면 기운을 흡수한다.
한두 차원의 기운만 더 흡수하면 이세계체류계약이 발전할 것 같은데, 이번에 스킬 숙련도를 올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자네가 이세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자인가? 어디서 그런 게이트를... 진짜 축복이야.)”
일렁이는 물 위에 비치는 노인의 얼굴은 선명했다.
주름이 가득한 늙은 나이임에도, 그의 눈빛만은 또렷했다.
“(혹시 내 제자에게 마나를 나눠줄 수 있나? 그래야 소환이 완료될 것 같은데... 그쪽 세계 사람들은 마나를 아예 못 느끼던데, 자네는 다르겠지?)”
역시나 마법사, 단번에 핵심을 찌른다.
날 처음보고는 섹스를 했던 케이라 같다.
이런 사람이라면... 벌써 한 건가?
“혹시 성교는 시도해 보셨나요? 그걸로도 마력과 마나를 전달할 수 있을 텐데요.”
“(역시 말이 통하는 군. 거기 사람들은 그 방법을 격렬히 반대해서 사용하기 힘들었네. 하지만 결국 소용없었어. 사람을 바꿔가면서 여러 번 해 봤는데도, 이세계 마나는 정착하지 않았네.)”
와우.
얼굴을 붉히는 건 테레사와 로저스, 그리고 이 연구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다.
인체 실험 같은 걸 했으니 부끄럽겠지.
그러나 마법사인 케이라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당사자인 베네시아도 담담한 듯했다.
마법사라는 사람들은 차원을 넘어서도 비슷한 모양이다.
“일단 시도해 보겠습니다.”
“(좋았어! 제자야, 빨리 준비 하거라!)”
제라스의 말에 베네시아가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무표정하게 가죽조끼를 벗고, 블라우스까지 손을 대는 광경은 매우 야했다.
하지만 난 성교를 할 생각은 없다.
“그만! 안 하셔도 됩니다. 그거 말고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도록.)”
베네시아가 다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나는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우웅.
마법진 안과 밖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안의 마나가 밖의 마나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이랄까.
성욕을 제어하고, 신성으로 더 상위의 마나를 움직여본 나는 느낄 수 있었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모를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다.
“왼손을 주시겠어요?”
“(네, 여기.)”
엘프의 피부는 하얗고 부드러웠다.
가늘어서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키는 나보다 크고, 가슴은 수연이 보다 없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짜 말고, 진짜 슬랜더 체형의 몸매다.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다.
준다면 마다할 생각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안 하고 있는 거지.
“마나를 전달하겠습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의 마나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그 중에서도 이질적인 것은 다른 차원의 마나인데, 이건 이질적인 걸 넘어서 사람을 흥분시킨다.
“흐음...”
내가 왼팔을 통해 마나를 불어넣자마자, 베네시아에게서 반응이 왔다.
잠깐 관찰한 것처럼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신음조차도 바람 소리처럼 무성의하다.
하지만 귀가 쫑긋 서서는 빨개진다.
몸이 어떤 느낌을 받고 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저 언밸런스한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의 진짜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확 그냥... 해버릴까?
[집중해. 마구 늘리면 답도 없어.]
케이라 귀신 같이 내 낌새를 눈치 채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도 알고 있다.
여기서 베네시아와 섹스, 혹은 진짜로 계약을 맺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꼴이니까.
베네시아의 능력이 출중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C급 키퍼 수준의 마법사일 뿐이다.
베네시아의 매력이 풍부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녀는 얼굴과 귀 투툴의 엘프일 뿐이다.
‘이정민은 자신의 소환 게이트를 통해 넘어 온 이세계인만 이 지구에 임시로 정착 시킬 수 있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이렇게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그 이상의 일들은 하지 않는다.
“흐음...”
나는 마나를 계속 움직였다.
팔에서 어깨, 그리고 심장으로.
심장에서 마나를 돌리니, 마나 일부가 그녀의 마나와 얽히면서 심장에 정착했다.
“흑...”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릴까 말까 할 때쯤에 난 손을 뗐다.
이 정도 반응에, 마나가 정착까지 한다면 이야기는 끝이다.
내가 원한다면 그녀와 언제든지 계약을 맺을 수 있다.
내 마나를 댓가로 그녀를 지구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나를 자궁까지만 인도한다면 말이다.
이로써 나는 이세계인이라면 누구 하고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아니지, 남자는 안 되는 건가?
...이 부분은 나중에 확인할 날이... 솔직히 안 왔으면 좋겠다.
수장님이 레즈비언 섹스를 하는 건 괜찮지만, 나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아직 인큐버스가 되기에는 무리인가 보다.
“끝났습니다. 밖에 한 번 나가 볼까요?”
“(...된 건가요?)”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상태를 봐야할 것 같아요.”
베네시아는 건너편 마법진의 제라스, 그녀의 스승을 바라 봤다.
“(뭘 망설이느냐. 바로 확인해 보거라.)”
베네시아가 천천히 마법진 밖을 향했다.
그녀는 경계에 서서 천천히 손을 밖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 방송 촬영 중에도 같은 장면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손은 마법진 밖으로 나가자마자 순식간에 투명해졌다.
그걸 보자마자 그녀의 귀가 축 늘어졌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걸 주저한 이유다.
그러나 이번에는 투명해지지 않았다.
축 늘어졌던 귀가 다시 올라가는 게 귀여웠다.
“(좋아! 역시 마나를...)”
제라스의 목소리가 올라가다가 내려갔다.
내려간 이유는 단순했다.
베네시아의 손이 5초도 버티지 못하고 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베네시아가 놀라 손을 거두었고, 마법진 안에서 다시 손이 원래 색을 되찾았다.
원래 색을 되찾는데는 투명해지는 것보다 배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마음을 졸일 걸 생각하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이런 실험을 반복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왜 안 되지? 역시 관련 특성이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면 베네시아의 마나를 제가 받아서 다시 넘겨주는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시도해봄직한 방법이네. 좋아, 제자야 어떻게 하는지 알지?)”
이번엔 베네시아가 내 팔을 잡았다.
그녀의 마나가 내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 주변을 돌았다.
그녀의 마나 역시 굉장히 이질적이었고, 마나가 지나가는 주변부가 성기가 된 것처럼 자극됐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성욕 제어를 통해 평상심을 유지하며, 그녀의 마나가 내 심장에 잘 안착할 수 있게 집중했다.
그러자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이세계체류계약의 숙련도가 올라갑니다.]
[이세계체류계약이 새로운 이세계의 기운과 접촉합니다. 차원 링스의 기운을 흡수합니다.]
[새로운의 기운이 기존 기운과 반응합니다.]
[잠재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29/32 > 29/33]
[계약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기운을 접했습니다. 잠재력 상승 폭이 늘어납니다. 지금은 ‘중상’ 상승입니다.]
조금 아쉬웠다.
숙련도 변경 메시지는 안 떴으니까.
잠재력 상승으로 만족해야 하나.
그래도 이세계 기운이 하나인 건 다행이다.
악마라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기운이 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이것으로 이 두 사람이 악마의 주구일 확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이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확신할 순 없지만.
“좋네요. 이젠 제가 마나를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네.)”
조금 전과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내가 마나를 넘기고, 베네시아가 마법진 밖으로 손을 내밀고, 제라스가 좋아하고, 손이 6초 정도 뒤에 투명해지고, 다시 손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결국 계약을 맺지 않으면 다 소용 없었다.
테레사에게 듣기로는 막대한 마나를 쏟아 부으면 베네시아가 투명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정말로 막대한 마나라는 거다.
S급 마정석 하나로 하루를 겨우 버틴다는 데, S급 마정석이면 시장에서 개당 천 억 꼴로 거래된다.
말이 거래지, 사실 거래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원점이군. 자네에게 기대를 걸었었는데...)”
“저 말고 이 마법사에게 기대를 걸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흥, 마탑의 주인인 내가 못하는 데 저런 허접한 마법사가 무얼 하겠다고.)”
마탑의 주인이라.
듣기만 해도 제라스의 수준이란 게 느껴진다.
최소 마스터급 마법사겠지.
나이만큼의 지식과 경험도 풍부할 테고.
하지만 우리 케이라도 금수저라고.
“차원의 바다에 있는 허무 에너지를 모아 마법진이 발동될 때 차원 간 교량이 연결되도록 하는 방법이군요. 차원 좌표도 모른 채 그저 소통만 할 수 있는 원시적인 방법이네요. 교량이 중간에 끊어지기라도 하면 이동 중인 물체는 차원의 바다에서 허무로 사라져 버리는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적어도 상대 좌표는 알아야 제대로 된 소환이나 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그걸 계산하는 방법은 모르시는 것 같군요.”
말은 알아듣지만 이해가 어렵다는 게 이런 걸까?
케이라가 청산유수와 같은 말로 제라스를 도발했다.
이 도발도 우리의 계획에 있었다.
뒤에 누가 있든지 도발을 통해 본성을 드러내게 하자는 계획이었다.
“(...생각보다는 좀 하는 군. 그럼 자네는 좌표 계산을 할 줄 안단 말인가?)”
“당연히 못합니다.”
엥? 할 줄 아는 거 아니었어? 자신 있게 나서기에 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발칙한 것. 역시 그럼 그렇지. 허접한 마법사 맞지 않느냐.)”
“차원 좌표는 절대로 계산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당신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요?”
케이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제라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처음에는 차가운 이성의 대마법사 포스였는데, 지금 보니 늙어서 꼬장 부리는 뒷방늙은이 같았다.
관통당한 것이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케이라, 화이팅!
좀 더 화나게 해서 모든 비밀을 털어 놓게 만들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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